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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lighter Nov 13. 2021

놀면 뭐하냐고? 백수도 24시간이 모자라

ep2. 아무래도 백수가 제 천직인가 봅니다




한국에서 교육받고 자란 많은 젊은이들이 으레 그렇듯, 나도 좋은 대학·좋은 직장에 들어가기만 하면 인생이 술술 잘 풀릴 줄 알았다.






#1. 조직이 내 인생을 책임져 줄 거라는 환상



초중고 12년, 대학 4년, 직장 1년 총 17년간,

단 한 번도 조직에 소속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니까 어디라도 속해 있지 않으면 사회에서의 존재 가치가 없어지는 줄 알았다.

그래서 내 꿈도 항상 어딘가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누군가 내게 소속이 어디냐고 물었을 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곳에 들어가 싶었다.


수험생 때는 좋은 대학들어가는 게 목표였다.

대학생이 돼서는 뭔가 멋지고 쿨해보인다는 이유로 검도부에 들어갔다.  

검도 훈련이 끝나면 바로 아르바이트 일터로 향했다. 학기 중이나 방학을 가리지 않고 4년 내내 카페, 초밥집, 대형 마트, 드럭 스토어, 이자카야 등에서  알바를 하며 사회의 일원으로서 일찍이 경제활동에 참여한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3학년 말 취준 시즌이 되자 남들이 가고 싶어 하는 안정적인 대기업에 들어가고 싶었다. 

일본 대기업은 한국 기업과는 달리 지원자의 스펙을 거의 보지 않아서,

2점 대의 처참한 학점에도 불구하고 운 좋게 대기업에 입사할 수 있었다.

 

그렇게 휴학 없이 4년 만에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회사에 취직했다. 

모든 게 완벽했다. 

새로운 보금자리에 가면 성공한 인생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설레는 맘을 안고 사회에 첫 발을 내딛었던 순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구름 위를 걸을 기세로 힘차첫 발을 디뎠는데,

알고 보니 구름은 딴딴한 고체가 아니라 수증기여서 자이로드롭을 탄 듯 순식간에 땅바닥으로 내리 꽂히는 느낌이랄까.

학교 밖은 내가 알던 세상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A Whole New World)이었다.   

짜릿한 자이로드롭 (출처: 롯데월드)



결론부터 말하면 첫 직장에서 딱 1년을 채우고 그만뒀다.



#2. 첫 직장 경험담



직장생활은 일본 대기업 제조회사에서 시작했다. 내가 배정된 부서는 재무회계부서였다. 희망했던 부서는 아니었지만 솔직히 말하면 어디서 일하든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대기업' 입사에 성공했다는 사실이지 직무 따위 뭐가 중요하겠는가!


현장 경험을 중시하는 회사의 방침에 따라 입사 3개월 만에 도쿄를 벗어나 자연이 아름다운 카마쿠라 시(鎌倉市)에 위치한 공장에서 근무하게 됐다.

한 때 매일 출근 도장을 찍었던 카마쿠라 공장 (출처: 구글맵)


내가 맡은 업무는 IT사업부의 판매관리비 예산 관리로, 연구개발 부서와 생산 부서가 사업 예산을 허투루 쓰지 않는지 관리·감독하는 일이었다. 업무의 90% 이상은 엑셀과 씨름하는 일이었고, 외부 사람을 만나서 미팅을 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나의 미션은 '회사의 경비 삭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회사 사람들에게도 사업비를 아껴 쓰라고 항상 잔소리를 해야 했다.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미움받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직무 따위 뭐가 중요하겠는가!'라고 생각했던 과거의 나를 찾아가 뒤통수를 세게 후려치고 싶었다.


이 일을 시작한 지 정확히 6개월 만에 마음속으로 퇴사를 결심했다. 


우선 일이 적성에 너무 맞지 않았다. 

하루 종일 엑셀만 들여다보는 것도 신물이 났지만, 그것보다 더 힘든 건 직원들에게 싫은 소리를 해야 한다는 이었다. 성과를 내보겠다고 열심히 일하는 직원들을 북돋아주긴 커녕 해줄 수 있는 말이 고작 '사업비 아껴 쓰시고 쓸데없는 지출은 삼가 주세요.'라니.

나는 남에게 명령하거나 싫은 소리 하는 걸 극도로 꺼리는 유리 멘탈 ISFP다.

쿠키의 명작, 쿠크다스 심장을 보유한 ISFP

쿠키의 명작, 쿠크다스 심장을 보유한 찐따로서 남들에게 싫은 소리를 하는 것만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꾸역꾸역 하다 보니 회사에서 보내는 하루하루가 지옥으로 바뀌었다.

그동안 살면서 적성에 대해 깊이 고민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회사에 들어와서 적성에 맞지 않는 일로 고통을 받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두 번째로, 향후 직무가 바뀔 가능성이 희박했다.

한번 예산관리 부서에 배치되면 웬만하면 쭉 그 업무만 시키는 게 회사의 방침이었다. 직무를 바꾸기 위해 회사를 설득하느니 이직 준비를 해서 회사를 옮기는 게 더 빠를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그냥 다 때려치우고 한국에 돌아가고 싶었다.

당시 나는 이미 오랜 이방인 생활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은행이나 병원에서 내 이름 석자가 불렸을 때 아무도 쳐다보지 않고, 무례한 구약소(주민센터) 직원으로부터 '일본어 말할 줄 알아?'라는 말을 듣지 않아도 되는 모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답답한 일본 사회에서 벗어나 한국에서 내 적성에 맞는 일을 찾고 싶었다.


모든 요소를 고려해봤을 때 더 이상 회사에 남을 이유가 없었다. 회사에서 꾸역꾸역 버티며 내 몸과 정신을 갉아먹느니 하루빨리 새 보금자리를 찾는 게 더 낫겠다고 생각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당시 철없던 스물다섯의 나는 아무런 대책 없이 사표를 던지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3. 아무래도 백수가 제 천직인가 봅니다



생각 없이 회사 간판만 보고 취직했다가 큰 코를 다친 전적이 있기 때문에,

다음 직장을 구할 때는 적성을 고려해 신중히 결정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일단 내가 뭘 좋아하고 잘하는지 찾는 게 과제였다.


그런데 25년 평생 '나'라는 인간이 뭘 좋아하고 잘하는지 제대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보니 적성에 맞는 일을 어떻게 찾아야 할 지 막막했다.


Step 1. 수험생활: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존버

  

Step 2. 대학생활: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존버

  

Step 3. 직장생활 : 그동안 존버해왔으니까 계속 존버


마치 게임 퀘스트를 깨듯 전투적으로 살아왔다.

내 인생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면서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려오다 보니 정작 내가 누구인지 모르고 되는대로 살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적성에 맞는 일, 좋아하는 일'을 찾는다는 명분 하에 인생에서 처음으로 소속이 없는 자유인으로 살아보기로 했다.


처음에는 평일에 학교나 회사에 가지 않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나 이렇게 한량처럼 아도 되는 건가..?'

알 수 없는 죄책감과 불안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그러나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나는 특히나 새로운 환경에 적응이 빠른 편이다.

걱정한 게 무안할 정도로 백수.. 아니 자유인 생활에 빠르게 적응해갔다.

그동안 못 놀았던 시간을 스스로에게 보상이라도 하듯 미친 듯이 놀기 시작했다.



혼자서 계획 없는 경주 여행도 훌쩍 떠나보고,

2016년 나 홀로 경주 여행


태어나서 처음으로 락밴드 콘서트 스탠딩석에서 라이브 공연도 보고, 

좋아하는 가수 콘서트 현장

한국에 놀러 온 일본 친구들과 서울 여행도 가고(한강 치맥은 필수!),

(왼쪽) 북촌 한옥마을 (오른쪽) 한강 치맥

고등학교 절친이랑 맛있는 맥주 도장깨기도 하러 다니고, (스몰비어 집부터 수제 맥주집, 세계맥주펍, 맥주 페스티벌까지!)


남들이 출근하는 평일 낮 시간에 전시회를 보러 가기도 했다.



시간적 자유가 주는 만족감은 상상을 초월했다.


하루를 온전히 내가 원하는 대로 채워나갈 수 있다는 사실이 눈물 나게 감격스러웠다.

매일매일이 꿈꾸는 것 같이 행복했다.


아무래도 나는...

놀고먹는 게 천직인가 보다.



표준국어대사전

놀고-먹다

발음 :  [ 놀ː고먹따 ]


< 동사 > 직업이나 하는 일 없이 놀면서 지내다

<유의어> 무위도식하다, 놀다

예문 : 놀고먹는 사람이 뭐가 그리 바쁜지 얼굴 보기가 힘들다.



국어사전 형님이 꼰대라서 잘 모르시나 본데, 사실 백수가 더 바쁘다.

세상엔 놀거리와 먹을거리가 너~~~~ 무 많기 때문에 24시간도 부족하다.


백수도 24시간이 모자라♪



#4. 냉정한 현실



매일 구름 위를 걷듯 행복한 백수 생활을 만끽했다.

이대로 영원히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자유인으로 살고 싶었다.


다만 딱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다.

바로 '돈(Money)'문제다.

여행을 가고, 맛있는 걸 사 먹고, 취미 활동을 하고, 친구들과 노는 데는 이 필요했다.

내가 누리는 행복의 크기에 비례해서

통장 잔고도 빠른 속도로 줄어들었다.

1년간 직장생활로 모았던 저축과 퇴직금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 있었다.


점점 줄어드는 통장 잔고를 메꾸기 위해

부랴부랴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전직 알바몬의 경력을 살려서

집 근처 파리바게트 빵집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당시 최저 시급은 약 6,000원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나가는 돈에 비해 벌어들이는 돈이 턱없이 부족해

급한 마음에 박람회장 단기 알바까지 뛰었다.

한여름에 인형탈 알바를 하기도 했다.

내 시간을 팔아 아르바이트비를 벌면서

그동안 일상에서 만끽하던 자유가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맨 왼쪽에 앙증맞은 포즈를 취하고 있는 파란색 친구가 필자다.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하며 용돈벌이를 했지만 그럼에도 돈이 줄어드는 걸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백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숨만 쉬어도 돈이 줄줄 새어나간다는 사실 그제야 깨달았다.


결국 5월 봄에 귀국한 후 가을을 맞이하기도 전에 1년간 직장생활을 하며 모았던 돈을 모두 탕진해버렸다.(탕진 잼..ㅠ)


태어나서 처음 누리는 무한의 자유에 취해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가

하루아침에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되어버렸다.


회사에서 내 시간을 팔아 번 으로

달콤한 자유를 샀었는데,

이제는 거꾸로  때문에 자유를 잃을 위기에 처하게 됐다.




'자유인 생활을 정말로 종료하시겠습니까?'

라는 질문에

마음속으로는 백 번이고 천 번이고 Cancel(취소) 버튼을 누르고 싶었지만,

눈물을 머금고 조용히 OK(종료) 버튼을 눌렀다..


좋아하는 일이라든지 적성에 맞는 일이라든지

이제 그런 것들을 따지며 여유를 부리고 앉아있을 처지가 아니었다.

우선 먹고사는 데 지장 없을 만큼의 충분한 월급을 주는 회사에 취직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결국 내 적성이 뭔지, 내가 뭘 좋아하고 잘하는지

찾지 못한 채 또다시 취업시장에 뛰어들었다.


일본에서는 대기업 서류전형에서 떨어진 적이 거의 없었고, 짧긴 하지만 회사에 다녀본 경험도 있으니

한국 기업에 지원하면 최소한 서류전형은 통과할 거라고 생각했다.


택도 없는 착각이었다.


이곳은 좁디좁은 땅에 전 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인재들이 모여있는

'대한민국 (Republic of Korea)'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2020년 공공기관 채용 박람회 현장 (출처: 뉴스웨이)


도 없고 도 없고 스펙도 없는

3無관왕 백수가 과연 살벌한 한국 취업 시장을 뚫을 수 있을까.




To be continued...



※ 다음 이야기 ▶ "취업 게임에 참가하시겠습니까?"

※ 지난 이야기 ▶ 대학생 때요? 스펙 쌓기 대신 칼질 좀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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