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교육받고 자란 많은 젊은이들이 으레 그렇듯, 나도 좋은 대학·좋은 직장에 들어가기만 하면 인생이 술술 잘 풀릴 줄 알았다.
#1. 조직이 내 인생을 책임져 줄 거라는 환상
초중고 12년, 대학 4년, 직장 1년 총 17년간,
단 한 번도 조직에 소속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니까 어디라도 속해 있지 않으면사회에서의 존재 가치가 없어지는 줄 알았다.
그래서 내 꿈도 항상 어딘가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누군가 내게 소속이 어디냐고 물었을 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곳에 들어가고싶었다.
수험생 때는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게 목표였다.
대학생이 돼서는 뭔가 멋지고 쿨해보인다는 이유로 검도부에 들어갔다.
검도 훈련이 끝나면 바로 아르바이트일터로 향했다. 학기 중이나 방학을 가리지 않고 4년 내내카페, 초밥집, 대형 마트, 드럭 스토어, 이자카야 등에서알바를 하며 사회의 일원으로서 일찍이 경제활동에 참여한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3학년 말 취준 시즌이 되자 남들이 가고 싶어 하는안정적인 대기업에 들어가고 싶었다.
일본 대기업은 한국 기업과는 달리 지원자의 스펙을 거의 보지 않아서,
2점 대의 처참한 학점에도 불구하고 운 좋게 대기업에 입사할 수 있었다.
그렇게 휴학 없이 4년 만에 대학을 칼졸업하고 바로 회사에 취직했다.
모든 게 완벽했다.
새로운 보금자리에 가면 성공한 인생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설레는 맘을 안고 사회에 첫 발을 내딛었던 순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구름 위를 걸을 기세로힘차게 첫 발을 디뎠는데,
알고 보니 구름은 딴딴한고체가 아니라 수증기여서자이로드롭을 탄 듯 순식간에 땅바닥으로 내리 꽂히는 느낌이랄까.
학교 밖은 내가 알던 세상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A Whole New World)이었다.
짜릿한 자이로드롭 (출처: 롯데월드)
결론부터 말하면 첫 직장에서 딱 1년을 채우고 그만뒀다.
#2. 첫 직장 경험담
첫 직장생활은 일본 대기업 제조회사에서 시작했다.내가 배정된 부서는재무회계부서였다. 희망했던 부서는 아니었지만 솔직히 말하면 어디서 일하든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대기업' 입사에 성공했다는 사실이지 직무 따위 뭐가 중요하겠는가!
현장 경험을 중시하는 회사의 방침에 따라 입사3개월 만에 도쿄를 벗어나 자연이 아름다운 카마쿠라 시(鎌倉市)에 위치한 공장에서 근무하게 됐다.
한 때 매일 출근 도장을 찍었던 카마쿠라 공장 (출처: 구글맵)
내가 맡은 업무는 IT사업부의 판매관리비 예산 관리로, 연구개발 부서와 생산 부서가 사업 예산을 허투루 쓰지 않는지 관리·감독하는 일이었다. 업무의 90% 이상은 엑셀과 씨름하는 일이었고, 외부 사람을 만나서 미팅을 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나의 미션은 '회사의 경비 삭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회사 사람들에게도 사업비를 아껴 쓰라고 항상 잔소리를 해야 했다.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미움받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직무 따위 뭐가 중요하겠는가!'라고 생각했던 과거의 나를 찾아가 뒤통수를 세게 후려치고 싶었다.
이 일을 시작한 지 정확히 6개월 만에 마음속으로 퇴사를 결심했다.
우선 일이 적성에 너무 맞지 않았다.
하루 종일 엑셀만 들여다보는 것도 신물이 났지만, 그것보다 더 힘든 건 직원들에게 싫은 소리를 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성과를 내보겠다고 열심히 일하는 직원들을 북돋아주긴 커녕 해줄 수 있는 말이 고작 '사업비 아껴 쓰시고 쓸데없는 지출은 삼가 주세요.'라니.
나는 남에게 명령하거나 싫은 소리 하는 걸 극도로 꺼리는유리 멘탈ISFP다.
쿠키의 명작, 쿠크다스 심장을 보유한 ISFP
쿠키의 명작, 쿠크다스 심장을 보유한 찐따로서 남들에게 싫은 소리를 하는 것만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꾸역꾸역 하다 보니 회사에서 보내는 하루하루가 지옥으로 바뀌었다.
그동안 살면서 적성에 대해 깊이 고민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회사에 들어와서 적성에 맞지 않는 일로 고통을 받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두 번째로, 향후 직무가 바뀔 가능성이 희박했다.
한번 예산관리 부서에 배치되면 웬만하면 쭉 그 업무만 시키는 게 회사의 방침이었다. 직무를 바꾸기 위해 회사를 설득하느니 이직 준비를 해서 회사를 옮기는 게 더 빠를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그냥 다 때려치우고 한국에 돌아가고 싶었다.
당시 나는 이미 오랜 이방인 생활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은행이나 병원에서 내 이름 석자가 불렸을 때 아무도 쳐다보지 않고, 무례한 구약소(주민센터) 직원으로부터 '일본어 말할 줄 알아?'라는 말을 듣지 않아도 되는 모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답답한 일본 사회에서 벗어나 한국에서 내 적성에 맞는 일을 찾고 싶었다.
모든 요소를 고려해봤을 때 더 이상 회사에 남을 이유가 없었다. 회사에서 꾸역꾸역 버티며 내 몸과 정신을 갉아먹느니 하루빨리 새 보금자리를 찾는 게 더 낫겠다고 생각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당시 철없던 스물다섯의 나는 아무런 대책 없이 사표를 던지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3. 아무래도 백수가 제 천직인가 봅니다
생각 없이 회사 간판만 보고 취직했다가 큰 코를 다친 전적이 있기 때문에,
다음 직장을 구할 때는 적성을 고려해 신중히 결정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일단 내가 뭘 좋아하고 잘하는지 찾는 게 과제였다.
그런데 25년 평생 '나'라는 인간이 뭘 좋아하고 잘하는지 제대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보니 적성에 맞는 일을어떻게 찾아야 할 지 막막했다.
Step 1. 수험생활:좋은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존버
↓
Step2. 대학생활: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존버
↓
Step 3. 직장생활:그동안 존버해왔으니까 계속존버
마치 게임 퀘스트를 깨듯 전투적으로 살아왔다.
내 인생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면서 경주마처럼앞만 보고 달려오다 보니 정작 내가 누구인지 모르고 되는대로 살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적성에 맞는 일, 좋아하는 일'을 찾는다는 명분 하에인생에서 처음으로 소속이 없는 자유인으로 살아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