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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lighter Nov 05. 2021

대학생 때요?스펙 쌓기 대신 칼질 좀 했습니다

ep1. 어느 무스펙 취준생의 살벌한 과거



지금으로부터 5년 전인 2016년 봄.

다니던 일본 회사를 그만두고

귀국한 지 딱 3주 되던 날,

본격적으로 한국 취업시장의 문을 두드려보기 위해 인터넷 구직 사이트에 떠도는 이력서 양식을 다운로드해서 이력을 채워 넣어 보았다.  


귀국 직후 작성한 이력서


한 편의 시 같은 이력서


마치 한 편의 시처럼

깊은 여운을 남기는 이력서다.


한국 전통의 아름다움,

'여백의 미'가 돋보인다.



우리나라 취준생분들이 내 이력서를 본다면

저 인간이 제정신인가 싶으실 거다.


보시다시피 직무 경력 1년 빼고는 이력서에 쓸만한 스펙이 하나도 없다.(데헷) 

심지어 직무 경력 1년 중 4개월은 연수였기 때문에 실무 경험도 거의 없는 거나 다름없다.

그 흔한 토익 점수, 컴퓨터 자격증 하나 없이 정말 말 그대로 깨끗한 백지상태였다.


대학 4년 내내 펑펑 놀았냐고 물으면,

사실 조금 억울한 면도 있다.

나도 대학 시절 나름대로 치열하게 살았기 때문이다.

다만 한국의 대학생들과 조금 다른 방식으로 살았을 뿐이다.

내 경험이 정형화된 스펙이 아니어서

'이력서'라는 정해진 틀 안에 담을 수 없을 뿐이다.


그럼 대학생 때 스펙 안 쌓고 도대체 뭘 했냐고?


사실은...


스펙 쌓기 대신 칼질 좀 했다.


?????





#1. 스펙 쌓기 대신 칼질 좀 했습니다



대학시절 나는 검도 오타쿠였다.



대학교 1학년 봄, 우연히 캠퍼스 구석에 있는 검도장에 발을 들였다가

그 길로 검도의 세계에 완전히 빠져서 대학 4년을 검도부 활동에 전부 갈아 넣었다.

일본 대학 운동부는 아마추어라도 프로 운동선수처럼 빡세게 운동을 시킨다.

우리 대학 검도부는 학기 중에 일요일을 제외한 주 6회 매일 2시간씩 훈련했다.

남녀 구분 없이 같이 섞여서 똑같은 훈련 메뉴를 소화했다. 나는 실력을 빨리 늘리려고 일부러 남자 부원에게 대련 상대가 되어 달라고 부탁했었다.

우리 대학 검도부의 살벌한 훈련 스케줄


10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 대학 검도장은 냉난방 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더울 땐 더운 대로 추울 땐 추운 대로 사계절 내내 자연과 더불어 수련했다.

(이때부터 이미 ESG♠몸소 실천하고 있었다.)

한여름에는 두꺼운 도복이 흠뻑 젖을 정도로 땀이 비 오듯 쏟아졌고,

한겨울에는 차가운 마룻바닥 위에서 계속 발을 구르다 보니 발바닥이 다 까져서 가 철철 흐르기도 했다.

가끔 상대방의 죽도가 빗나가서 옆구리나 팔꿈치를 강타하면 시퍼렇게 이 들기도 했다.


방학 때도 일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검도 연습을 하러 갔다. 남들은 유럽여행이나 어학연수를 갈 때 나는 검도부 단체 합숙훈련에 참가해 하루에 4시간씩 검도 훈련을 했다.


2012년 8월 여름, 검도부 원정 합숙장소가 '후쿠시마'로 결정 났을 때도 군말 없이 참여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시는 그곳 맞다.) 후쿠시마를 합숙장소로 정하다니 이 인간들이 미쳤나 싶었지만, 합숙에서 빠지면 가을에 있을 검도대회에 출전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대회에 나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후쿠시마는 자연이 참 아름다운 곳이었다.. 거기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반딧 봤다.)


일본은 생활체육이 잘 발달되어 있는 편이라 일본 학생들은 어릴 때부터 운동을 꾸준히 해온 경우가 많다. 그래서 보통 검도 대회에 출전하는 선수들은 적어도 초등학교 때부터 검도를 꾸준히 해온 경험자들이 대부분이다. 그 덕분에 초심자였던 나는 검도부 생활 4년 내내 시합에 나가기만 하면 거의 99%의 확률로 깨졌다.


검도부 생활은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많이 힘들었다. 검도 초짜니까 애초에 공식 검도대회에 나갈 기회도 적었다. '초심자 & 외국인 & 여자'라는 완벽한 버뮤다 트라이앵글을 갖춘 덕분에 검도부에서 깍두기 역할을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럼에도 도중에 그만두지 않고 4년간 꿋꿋이 버텼다.


왜냐면... 난 검도에 제대로 미친 돌아이였기 때문이다. 그 모든 고통과 수치스러움을 넘어설 정도로 검도는 내게 너무 매력적이었다. 당시 머릿속이 온통 검도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검도를 잘하고 싶어서, 검도 대회에 출전하고 싶어서 별의별 짓을 다했다.

프로 검도선수의 시합 영상을 몇 번이고 돌려보고,

내 비루한 대련 영상과 비교하며 뭐가 부족한지 끊임없이 연구했다.

남들이 수업 노트 필기를 할 때 나는 팬픽 쓰듯 검도 노트를 작성했다.

대련에서 왜 졌는지 끊임없이 분석하고 상대편 선수에게 배울 점을 노트에 정리했다.

루틴 훈련이 끝나면 선배를 찾아가서 오늘은 어떤 점이 부족했는지 물어보고,

검도 노트에 개선점을 메모한 후 다음 연습 때 반영하려고 노력했다.


허튼짓처럼 보일 정도로 미련하게 4년 내내 검도 덕질을 한 결과,

대학 4학년 졸업 전 마지막 검도 대회에서 운 좋게 선수로 출전하게 됐다.

그날따라 검도의 신이 강림하셨는지 평소의 허접한 나답지 않게

시합 시작 1분 만에 상대편 선수의 머리 2점을 연달아 획득해 통쾌한 승리를 거뒀다.

검도부 생활 4년 만에 거의 처음으로 거둔 승리 다운 승리였다.


맨날 시합에서 져도 포기를 모르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니까 불쌍해 보여서

졸업 전 마지막으로 한 번이라도 이겨보라고 하늘에서 도운 게 분명하다.


4년간 검도 한 우물만 팠던 나는

99번 지다가 마지막에 딱 1번 멋있게 이기고

여한없이 검도부를 졸업할 수 있었다.  



#2. 검도 덕질을 통해 배운 것



남들이 봤을 때는 취업에 하나도 도움 안 되는 쓸데없는 짓에

왜 시간낭비를 하는지 의아해할 수 있겠지만,

덕질에는 애초에 합리적인 이유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좋으니까 하는 거다.


나는 검도 덕후였다.

검도가 좋았고, 검도부 사람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좋았다.

검도부에서 보낸 4년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걸 얻었다.



《 4년간의 검도 덕질을 통해 얻은 10가지


1. 튼실한 하체와 팔근육

2.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맷집은 덤)

3. 사람은 생각보다 쉽게 죽지 않는다는 깨달음

4. 스스로의 체력·정신적 한계를 극복하는 경험

5. 무언가에 미친 듯이 몰두해본 경험

6. 일본의 조직문화에 대한 이해

7. 예의범절과 배려심

8. 사회성 및 사교 능력

9. 팀워크 정신(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동료들과 협력하는 경험)

10. 소중한 인맥(몇 안 되는 소중한 친구들)



모든 게 다 돈 주고도 못 살 소중한 것들이다.

 

실제로 일본 기업에서는 검도부 활동 경험을 높게 사줘서 웬만한 대기업 서류 전형은 거의 통과했었다.

미쓰비시 UFJ은행, 도쿄해상화재보험, 후지필름, 기린맥주, 스미토모은행 등 10군데 조금 넘게 서류를 넣어 90% 이상 서류에서 통과했다. 몇몇 군데는 최종면접까지 갔고 그중에 대기업 제조회사에 입사했다. 

훗날 직장생활을 할 때도 검도부 활동 경험 다방면에서 많은 도움이 됐다.



그런데 말입니다.. (출처: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씁... 그런데 말입니다..


이 소중한 경험을 한국 기업이 요구하는 이력서에 담는 순간,


아무 쓰잘데기 없는 경험이 되어 버린다.

너무 보잘것없어 보여서 눈물이 핑 돌 정도다.




#3. 냉정한 한국 취업시장의 벽



우리나라의 기업 채용 담당자들이 '주요 활동 및 사회경험' 란에 '검도부 활동'이라고 딸랑 한 줄 기재되어 있는 걸 보면 무슨 생각이 들까?


'오호, 이 지원자는 대학생 때 값진 경험을 했구먼.'이라고 생각할까?

'지금 이 사람이 장난치나.. 직무 관련된 경험을 적으라니까 뭐 이딴 걸 경험이랍시고 적었나'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내 4년간의 피·땀·눈물이 깃든 덕질 경험은 인턴 경험이나 수상 경력처럼 눈에 보이는 스펙이 아니어서 이력서에 담는 순간,

그 힘을 완전히 잃어버린다.  


실제로 귀국 후 한국에서 취업 준비를 할 때 검도부 활동 경험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력서에 미처 담지 못한 경험을 자소서에 꾹꾹 눌러 담아 봤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한국 유수의 대기업에 제출한 내 이력서와 자소서는 한 장도 빠짐없이 모두 휴지으로 직행했다.

대기업 인사 담당자 손에 들어가기도 전에 인공지능 채용 봇이 내 서류를 기본 스펙 불충족의 이유로 자동 필터링한 게 아닌가 합리적인 의심이 들 정도였다.


휴지통으로 직행한 내 덕질의 역사



나 지금.. 완전 X 된 건가..?




대학생 때 스펙 쌓기 대신 검도 덕질한 것을

처음으로 후회한 순간이었다.

한국 취업시장은 일본과는 상황이 완전 다르다는 걸 뼈에 사무치게 절감했다.



앞으로 어떡하지?

나 한국에서 백수 탈출할 수 있을까...?





To be continued...



※ 다음 이야기  놀면 뭐하냐고? 백수도 24시간이 모자라

※ 지난 이야기 ▶ 프롤로그. 무스펙 백수가 되어 돌아온 그 여자의 사정


※ 일본 대학의 동아리 문화가 궁금하다면 ▶ 일본 대학의 독특한 동아리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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