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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lighter Jan 30. 2022

대기업 퇴사하고 고시원에 입성한 이유

ep7. 무스펙 취준생의 서울 고시원 입성기



오늘 설맞이 FLEX 좀 했다.

지난 추석에 이어 이번 설날에도

어머니께 명절 선물로 100만 원을 보내드렸다.

얼마 전 어머니 사업자금을 보태 드리기 위해 은행에서 빌렸던 3천만 원 빚모두 갚았다.

통장 잔고는 줄었지만 마음은 홀가분하다.

이걸로 취업하면 부모님께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어 드리자는 목표는 어느 정도 달성한 것 같다.

(그렇다. 이것은 겸손을 가장한 교묘한 지자랑이다.)


이 정도면 부모님 호강시켜드리는 정도까진 아니지만, 철없던 취준생 시절 엄카를 써대며 어머니 등골을 휘게 했던 때를 생각하면

가히 장족의 발전이 아닐 수 없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지금으로부터 딱 5년 전인

2017년 1월 29설날 일요일 밤.


나는 2평짜리 홍대 고시원 방에 누워 천장만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었다.


깔끔한 오피스룩을 차려입고 도쿄 도심에 위치한 일본 대기업 본사로 출근하던 게 불과 엊그제 같은데...

사람 일은 정말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나 보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1.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멀쩡히 다니던 일본 대기업을 그만두고

한국으로 돌아가 재취업을 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가족을 포함한 주변 모든 사람들이 뜯어말렸다.

한국에 갔다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일본 기업에 취업한 선배들이 한국 취업시장은 지옥이니까 괜히 가서 고생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그 말을 귀담아 들었어야 했다.  


대체 무슨 자신감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들과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

나라면 한국에서도 좋은 직장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생각이 내 망상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귀국 후 불과 6개월 만에 확실해졌다.

대기업 스무 군데에 자소서를 제출했는데

한 군데도 빠짐없이 입구 컷(서류 탈락)을 당한 것이다.


그렇게 2016년 하반기 대기업 취업에 실패한 후, 허송세월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한 해가 끝나가고 있었다.  

이대로 계속 부모님 등골만 빼먹으며 살 순 없다는 생각에  다시 정신 차리고 빡세게 취준 모드에 돌입하기로 결심했다.



#2. 두 가지 행운



어머니의 등골을 지켜드리겠다고 결심한 직후

내게 두 가지 큰 행운이 찾아왔다.


1. 첫 번째 행운 : 절묘한 타이밍에 뜬 채용공고


마음을 다잡고 매일 온갖 취업 커뮤니티드나들며 새로 뜬 채용공고가 있는지 확인하는 일을 반복하던 어느 날,

우연히 이전부터 관심 있었던 모 공공기관의 채용공고가 뜬 걸 발견했다.


그 회사는 해외 관련 업무를 주로 수행하는 공공기관으로, 지원자의 외국어 능력을 상당히 중시하는 곳이었다.

귀국 후 급하게 따놓은 어학 성적이 내 유일한 스펙이었기 때문에, 한국 회사 중에 그나마 내가 지원해볼 만한 몇 안 되는 곳 중 한 군데라고 생각했다.


그 회사는 매년 하반기 연 1회 신입사원 공개 채용을 진행하는데, 

이번에 이례적으로 2017년도 상반기 채용 공고를 한 차례 더 낸 것이다.

그것도 내가 두 달간의 방황을 끝내고 취준을 다시 시작한 그 타이밍에 말이다.

이것이 내게 찾아온 첫 번째 행운이다.

 


2. 두 번째 행운 : 블라인드 채용  


두 번째 행운은 2017년부터 공공기관과 공기업을 중심으로 '블라인드 채용'이 도입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블라인드 채용'은 학벌과 학점 등의 스펙을 일절 묻지 않고, 오로지 필기시험면접만으로 직원을 채용하는 제도다. 이번에 채용공고를 낸 그 회사도 블라인드 채용을 도입한 곳 중 하나였다.

2점 초반대 학점에 자격증이라곤 검도 2단 하나밖에 없는 내게 이보다 큰 희소식이 없었다.

※ [참고] 블라인드 채용
정부가 2017년 7월 5일 ‘평등한 기회·공정한 과정을 위한 블라인드 채용 추진방안’을 발표하면서 7월부터 322개 공공기관 전체가 블라인드 채용 전면 시행에 들어간 데 이어 8월부터는 149개 지방 공기업에서도 블라인드 채용이 실시됐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3. 결단의 순간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다른 공기업과 마찬가지로 그 회사에도 전공 필기시험이 있었는데 채용 일정을 보니 시험을 준비하기엔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는 것이었다.


그 회사의 필기시험은 어렵기로 유명해서 그곳의 취업만을 목표로 하는 취업 전문 학원이 있을 정도였다.

준비기간은 아무리 짧아도 최소 6개월, 넉넉하게 1년 이상 잡는 게 좋다고 한다.

심지어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 재수, 삼수를 하는 취준생도 있을 정도이니 자칫 잘못하면 3년 이상 걸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행정고시나 외무고시를 준비했던 고시생이나 경제학 전공자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시험이라는 소문이 취준생들 사이에서 자자했다.


나도 일단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긴 했지만,

대학 때 검도부 활동과 알바몬 생활을 병행하느라 학교 수업을 제대로 듣지 않았기 때문에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경제학 전공지식이 거의 없었다. 만약 그곳에 지원한다면 처음부터 다시 경제학 공부를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필기시험 날짜는 2017년 2월 중순.

채용공고를 발견한 날로부터 약 두 달 남짓 남은 상황이었다.

머리에 든 게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필기시험을 쳐본 들 떨어질게 불 보듯 뻔했다.


나는 이길 확률이 희박하다고 판단한 게임에는 웬만하면 내 시간과 노력을 투입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겐 더 이상 남아 있는 선택지가 없었다.

대기업만큼은 아니더라도 '꽤 괜찮은' 월급을 주는 회사에 들어갈 수 있는 건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무모한 도전이라는 건 너무나 알고 있었지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승률이 제로에 가까운 취업 게임에 한 번 걸어보기로 결단했다.



#4. 서울 고시원 입성기



일단 한국어로 쓰인 경제학 전공책을 사긴 했지만 막상 공부하려니 뭐부터 야 할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전공지식이 거의 없는 상태인 데다 시험이 어떤 식으로 출제되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달만에 필기시험을 준비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게다가 의지력이 매우 약한 편인 내게 부산 고향 집은 시험공부에 최적화된 환경이 아니었다.

집에 있으니 몸과 마음이 편해서인지 공부를 하려고 책상에 앉으면 금세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왜 그렇게 침대와 소파만 보면 눕고 싶은 건지..

그런 나 자신이 너무 한심했지만 나도 나를 어쩔 수가 없었다.

(내 MBTI가 ISFP인걸 이때 알았더라면 조금 더 빨리 대처할 수 있었을 텐데...)


이대로 있다간 두 달 뒤에 시험장에서

답안지에 만화만 실컷 그리다가 나올 판이었다.


뭔가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우선 두 달 뒤에 있을 전공 필기시험에서

답안지뭐라도 적어내려면,

서울에 있는 공기업 취업대비 학원에서 단기간 빡세게 공부하는 게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원의 힘을 빌리긴 싫었지만 내겐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기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결심이 서자마자 지체 없이 행동에 옮겼다.

곧바로 서울에 있는 공기업 취업 대비 학원과 내가 머물 숙소를 찾기 시작했다.

오피스텔이나 원룸에 들어갈 형편도 아니었기 때문에 숙소는 고시원을 중심으로 알아봤다.

고3 시절 일본 유학 준비를 위해 반년 가까이 머물렀던 감옥 같은 고시원에 또 들어갈 생각을 하니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내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뫼비우스의 띠 같은 나태 지옥에서 탈출하려면 주변 환경을 완전히 바꾸는 수밖에 없었다.


서울로 상경할 준비를 다 끝내 놓고,

2016년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부산에서 가족과 함께 보낸 후, 2017년 1월 첫째 주에 따뜻하고 아늑한 부산 집을 떠나 홍대에 있는 고시원에 입성했다.




#5. 다시 꺼내보는 5년 전의 일기



최근 예전에 써놓은 기록들을 뒤적이다가

딱 5년 전 이 맘 때쯤,

고시원에 도착해서 짐 정리를 마친 후 책상 앞에 걸터앉아 끄적였던 일기를 발견했다.


다시 보니 아주 가관이다.

술은 안 마셨지만 술보다 더한 푸른 밤★감성 한 사발 들이켰기 때문에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썼다는 점을 감안해주길 바란다.

글도 드럽게 못써서 보여주기 창피한 수준이지만,

당시 절실했던 내 심정이 잘 녹아있는 것 같아서

용기를 내어 공유해보고자 한다.

직장생활에 지쳐서 다 때려치우고 싶을 때 한 번씩 보면 좋을 것 같다.


아! 비위가 약하신 분들은 '뒤로 가기' 버튼을 눌러주시기 바란다.  




2017. 1. 6.(금) 23:30


2017년 새해가 밝은지도 6일이 지났다.


난 지금 홍대에 있는 고시원 방 안에 틀어박혀 있다.

어제 입주했다. 오랜만에 고시원 입성.

고3 때 이후이니까 6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후

또다시 고시원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어제 고시원에 도착했을 

생각보다 방이 너무 좁아서 놀랐다.

밤에 샤워를 하려는데 온수 수압이 심각하게 약해서 결국 제대로 씻지도 못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불편함에 서러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내가 여기서 왜 이러고 있나..

부산 고향 집을 놔두고 숨 막힐 정도로 좁고 답답한 곳에 제 발로 기어 오다니..

그동안 내가 정말 편하게 살아왔다는 걸 깨달았다.


편안함에 익숙해져서 잠시 잊고 있었다.

불편함, 좁음, 외로움, 구질구질함..

고3 때 고시원에 살면서 느꼈던 감정들.

그래도 그때는 원하는 대학에 붙겠다는 생각 하나로 버텼다.

외로웠지만 시간을 낭비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친구도 만들지 않고,

반년 가까이 매일 혼자 밥 먹으면서 공부했다.

고시원은 좁고 답답했지만 잘 견뎠다.


그때의 나는 26살이 된 지금의 나보다 훨씬 어른스럽고 인내력도 강했다.

2016년의 나는 절실함과 열정 따위 상실한 지 오래였다.

한마디로 나는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고 있었다.

아마 그래서 2016년 연말에 서울에 올라가겠다는 결단을 내린 걸지도 모른다.


일단 가장 큰 목표는 내가 목표로 정한 공기업에 취업하는 것이다.

단지 취업 학원에 다니기 위해서 상경을 결심한 것은 아니다.


내가 원하는 꿈,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독하게 버티는 열정,

그걸 되찾기 위해서 소중한 사람들과 편안한 안식처를 떠나길 결심했다.


아직 적응도 안되고 마음도 싱숭생숭하다.

사실 많이 우울하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까지다.


내일부터는 내가 세운 계획을 매일 착실히 실천해나갈 것이다.

아주 비현실적인 계획이지만 꼭 지킬 것이다.

6시 기상, 그리고 자기 전까지 하루 종일 공부.


쌩얼에 마스크 끼고 츄리닝 입고

도서관에서 거의 살 생각이다.

할 수 있다!!!!!


힘들어도 견디고 다시 한번 열심히 해보자.

앞으로 힘들고 어려운 일이 겠지만

그건 당연한 거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항상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선

치러야 할 기회비용이 있는 거다.


한 번 해보자!!!




2017년 1월 5일 홍대 고시원에서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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