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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lighter Feb 20. 2022

홍대입구 3번 출구 앞에 사는 취준생

ep8. 어느 지방 취준생의 홍대 생활 적응기

운동화 끈 질끈 매고

집 앞에 있는 연트럴 파크

빨리 지나가며

동네 한 바퀴 돌고 있네

너는 나를 비춰 은은함으로

나는 위로받아 너란 달빛에

소리 없는 은은한 침묵 속에

내 근심 걱정은 반달로 줄었네

여기는

홍대입구 3번 출구

홍대입구 3번 출구

홍대입구 3번 출구

로 나와요


- 러브송 <홍대입구 3번 출구> 中 -





#1. 젊음과 낭만이 넘치는 홍대



2017년 1월 어느 추운 겨울날.


공기업 취준을 결심하고 부산 고향집을 떠나 서울로 상경한 내가 둥지를 튼 곳은 신림 고시촌도 노량진도 아닌 홍대입구 근처한 고시원이었다.


취준 하러 서울에 간다는 애가 무슨 홍대에서 자취를 하냐며 주변에서 의아해했다.


홍대를 선택한 이유는 딱 하나였다.

홍대는 내 서울 생활 로망의 총 집합체 같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일본 유학 시절,

방학을 맞아 서울 여행을 갔을 때

홍대의 화려한 밤거리와 버스킹 공연을 보고

예술과 낭만이 넘치는 홍대의 매력에 완전히 매료돼 버렸다.


내 서울생활 로망의 총 집합체였던 홍대 ♥


당시 나한테 있어서 홍대에서 산다는 건 한강뷰 아파트에 사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었다.(물론 지금은 어림도 없습니다만.^^)

그만큼 홍대는 내게 특별한 의미를 가진 곳이었다.



#2. 홍대 북극곰 축제  

 


두근두근 부푼 마음을 안고

홍대 고시원에 입성한 첫날의 설렘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2평 남짓 되는 방은 숨 막힐 정도로 좁았지만,

고3 수험생 시절이 새록새록 떠오르면서 그동안 시들했던 삶에 대한 열정이 다시 불타오르는 기분이었다.


앞으로의 포부를 다지며 비장한 마음으로 짐 정리를 마친 후 씻기 위해 샤워실로 향했다.

방 안에 샤워실이 없어서 공동 샤워실을 사용해야 했지만, 그 정도 불편함은 충분히 감수할 수 있었다. 왜냐면 난 홍대병 말기의 피 끓는 청춘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가지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샤워기를 온수 방향으로 틀고 10분을 넘게 기다려도 온수가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상경 첫날밤부터 한겨울에 냉수마찰이라니

신고식 한 번 거하게 치르는구나 싶었다.

추운 겨울에 찬물로 샤워를 하려니 죽을 맛인데 수압 약해서 씻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온몸이 오들오들 떨렸지만 이를 꽉 깨물고 추위를 참으며 간신히 샤워를 마쳤다.



내 고향 부산에는 '해운대 북극곰 축제'라는 유서 깊은 축제가 있다.

해운대 북극곰 축제는 한 겨울 영하의 차가운 날씨에 바닷물에 뛰어들어 인간 북극곰이 되어 보는 이색적인 축제로써, 영국 BBC가 선정한 세계 10대 이색 스포츠이자 명실상부한 부산을 대표하는 바다 축제다. 

유서 깊은 해운대 북극곰 축제 (출처: 북극곰 축제 공식 홈페이지)


이럴 줄 알았으면 상경하기 전에 해운대 북극곰 축제에 출전해서 인간 북극곰이 되어보는 예행연습을 미리 해둘 걸 그랬다.

인생은 유비무환이라더니 옛말 틀린 게 하나도 없다.


다음날 아침, 고시원 관리인에게 샤워실 온수가 나오지 않아서 혹시 보일러가 고장 난 게 아닌지 봐달라고 부탁드렸다.

관리인은 보일러가 고장 난 게 아니라

하루에 사용할 수 있는 온수의 양이 정해져 있어서 그런 거라고 말했다.

다른 입주자들이 온수를 다 써버리면

온수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으니 아침 일찍 씻는 걸 추천한다며 너스레를 떠셨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온수로 샤워할 수 있다'는 기적의 논리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당시 고시원 생태계에서는 이미 '미라클 모닝'이 대세였던 모양이다.

아침잠이 많았던 나는 굳이 이른 아침부터 '미라클'을 경험하고 싶진 않았기 때문에 바로 다른 고시원을 알아보기로 다.


다음날, 홍대입구역 근처에 있는 고시원 몇 군데에 전화를 돌리다가 운 좋게 작은 개인 샤워실이 딸린 월세 36만 원짜리 방을 구할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자리 잡은 곳은 홍대입구 3번 출구 앞 연트럴 파크 근처에 있는 고시원이다.

앞으로 매일 다닐 도서관에서 도보로 약 10분 정도 소요되는 곳으로 위치도 좋았고,

무엇보다 주인아주머니가 굉장히 친절하시고 좋은 분인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홍대입구 3번 출구 앞 연트럴 파크


#3. 로봇 생활 계획표



이제 보금자리도 정해졌으니 서울에 있는 동안 한 시라도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기 위해 야심 차게 생활 계획표를 세웠다.


초딩 때 방학생활계획표를 떠올리게 하는 유치 찬란한 계획표
< 취준 생활 계획표>

- (6:00~8:00) 아침 운동 후 아침밥 챙겨 먹고 도서관 가기
- (8:00~10:20) 경제신문 읽고 중요 기사 스크랩해두기
- (10:30~23:00) 공기업 전공 필기시험 공부
- (23:00~00:30) 귀가 후 씻고 공부 좀 하다가 취침


밥 먹는 시간과 잠자는 시간 빼고는 모조리 공부 시간에 다 때려 넣는 패기 넘치는 모습..

지가 무슨 알파고라도 되는 줄 알았나 보다.


처음에는 6시 기상을 목표로 했지만,

점점 기상 시간이 7시, 8시, 9시로 늦춰졌다.

아침에 눈을 뜨면 바로 일어나지 않고 침대에서 미적대다 보니 결국 도서관에 가는 시간은 9시 반~10시가 되기 일쑤였다.

아침운동은커녕 세수만 대충 하고 집을 나서기에 급급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취준 기간 동안 계획대로 실천한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



#4. 도서관 라이프



• 도서관 루틴


내가 다녔던 도서관은 '마포 평생학습관'이라는 곳으로 규모가 꽤 큰 도서관이었다. 열람실이 크고 좌석수도 많아서 자리를 선점하느라 스트레스받지 않아도 돼서 좋았다.

젊음과 낭만이 넘치는 홍대 거리 한복판에 위치한 마포 평생학습관


오전 10시쯤 도서관에 도착해서 자료실에 비치되어 있는 경제신문을 읽다 보면 어느덧 점심시간이 가까워졌다.


점심은 주로 도서관 지하에 있는 식당에서 사 먹었다.

도서관 식당 메뉴가 별로이거나 질릴 때는 가끔 밖에서 사 먹기도 했다. 하지만 그지 같은 몰골로 홍대 거리를 활보하다가 불량 청소년들에게 삥 뜯길까 무서워 도서관 반경 50m를 벗어나지 않았다.


간단히 점심을 해결한 후 양치질을 하고 나 오후 1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오전에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벌써 하루의 반이 날아가다니...

'이제 진짜 본격적으로 공부에 집중해야지!' 

굳게 마음먹고 열람심 좌석에 앉으면

어김없이 그분(식곤증)이 찾아오셨다.

그분은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찾아와 나를 고뇌와 번민에 빠뜨리곤 했다.

안타깝게도 항상 지는 건 내쪽이었다.


점심을 먹 직후 책상에 철퍼덕 엎드려  보니 일어나면 항상 배가 땡겼다.

그렇게 1시간 가까이를 퍼질러 자다가

오후 2~3시가 돼서야 정신을 차리고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역시 인생은 계획대로 되는 법이 없다.

마포 평생학습관 열람실


열람실 안은 인구밀도가 높아 산소가 부족한 탓인지 공기가 항상 탁하고 답답했다.

그래도 하루 종일 자리에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자극을 받아 더 열심히 공부를 하게 됐다.


오후 2~3시부터 저녁시간 전까지 3~4시간 정도 집중해서 공부하고, 저녁밥을 먹고 좀 쉬다가 저녁 7시 반~8시부터 또 본격적으로 집중해서 10시까지 2~3시간 정도 공부를 했다.


하루 중에 도서관에 있는 시간은 12시간 정도였지만, 실질적으로 온전히 공부한 시간은 길어 봐야 5~6시간이었다.

생산성 측면에서 인간은 로봇을 이길 수 없다는 걸 절절히 깨닫는 순간이었다.

난 알파고가 되기엔 너무나 인간미 넘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고시원으로 돌아가는 길


밤 10시쯤 공부를 마무리하고 도서관을 나오면, 

홍대 밤거리는 예쁘고 멋지게 차려입은 청춘 남녀들로 항상 붐볐다.

후줄근한 옷차림에 무거운 책이 가득 든 싸구려 백팩을 메고, 한껏 꾸민 사람들 사이를 지나서 고시원에 돌아가는 나 자신이 얼마나 초라하고 비참하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서울의 겨울은 부산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추웠기 때문에,

나는 매일 검은색 롱 패딩 안에 후줄근한 기모 맨투맨 티와 두꺼운 츄리닝 바지를 입고 다녔다.

차림새가 추레해서 만만해 보였는지

(홍대를 대표하는 호구상.. 줄여서 홍구상..)

홍대 길바닥상주하고 있는 도쟁이들이 자석처럼 들러붙었다.

귀갓길에 거짓말 안치고 거의 매일 같이

도쟁이들한테 잡혀서 길거리 포교를 당했다.

도쟁이들이 다른 건 잘 볼 줄 몰라도 호구상 하나는 귀신같이 알아보는 것 같았다.

눈이 마주치면 거의 무조건 말을 걸었기 때문에

항상 땅을 보면서 종종걸음으로 밤거리를 뚫고 귀가했던 슬픈 기억이 난다.. 주르륵..



#5. 오아시스



온종일 도서관 열람실에 처박혀 있으면 종종 숨이 막혀올 때가 있었다.

추레한 모습으로 열람실 좁은 칸막이 책상 앞에 앉아 하루 종일 책만 들여다보는 생활을,

도시관-고시원-도서관-고시원 루트를 쳇바퀴 돌듯 반복하는 이 생활을

언제까지 계속해야 하는 건지

끝이 있기는 한 건지

공부를 하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 때면

한없이 우울해지고 아무것도 하기 싫어졌다.


서울에 아는 사람 하나 없으니 누굴 만나 하소연할 수도 없었다.

가족과 친구들한테는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연락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혼자서 끙끙대다가 심적으로 너무 힘들고 외로울 때는 공부하던 책을 접고 도서관 근처 카페에 갔다.


제일 싼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켜놓고

카페에 앉아 즐겁게 대화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외로움을 달랬다. 

따뜻하고 여유로운 카페 분위기를 즐기다 보면, 잠시나마 마음이 힐링되는 기분이 들었다.


가끔 뭘 해도 집중이 되지 않는 무기력한 날에는 홍대입구 3번 출구 앞 연트럴 파크에 가서 무작정 걸었다. 철길을 따라 계속 걷다 보면 심란했던 마음이 잠잠해지고 머리가 맑아지곤 했다.  


돈도 없어서 도서관이나 고시원 이외에 어디에도 가지도 못하던 그때,

카페와 연트럴 파크는 내 유일한 오아시스였다.


사진 출처: 러브송 <홍대입구 3번 출구> MV
사진 출처: 러브송 <홍대입구 3번 출구> MV





서울 생활은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 그런지

좁은 고시원 방도

답답한 열람실도

가끔씩 밀려오는 외로움도

곧 적응되기 시작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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