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oonlighter Feb 15. 2021

검도 쌩초보 외국인 유학생의 일본 대학 검도부 입문기

시작부터 험난한 일본 대학 검도부 생활



일본 대학에 입학하고 한 달이 지난 후,

신입생 환영 시즌이 한참 지난 5월 중순에서야 마음에 드는 동아리를 찾았는데, 하필 그게 주변에서 뜯어말리던 운동부였다. (당시 일본 대학에선 운동부에 들어가는 순간 대학 4년을 운동부에 오롯이 바쳐야 했다.)

나는 그중에서도 가장 폐쇄적이고 청춘의 느낌과는 거리가 먼 검도부에 들어갔다. 캠퍼스 맨 구석에 자리 잡은 검도부는 학교에서 존재감 없이 조용히 음지에서 활동하는 운동부였다. 럭비부, 농구부 등 여타 화려한 운동부에 비해 인기도 없고 관심도 못 받던 이른바 '아싸' 운동부였다. 50명 남짓 되는 부원 중 대다수가 남자인 데다 검은색 도복까지 입고 있으니 분위기가 더 어둡고 칙칙했다.

게다가 한 학년 위에 중국인 부원 한 명을 제외하곤 전원 다 해외 거주 경험이 없는 토종 일본인들이었고, 내가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검도부가 운동부의 '아싸'라면 나는 검도부 안에서도 아싸 중에 '핵 아싸'였다.


부원들은 내가 뒤늦게 불쑥 찾아와서 검도부에 가입하겠다고 하자 적잖이 당황한 듯했다. 입부(入部)를 대놓고 거절하진 않았지만 이전에 들어왔던 외국인 유학생들이 도중에 다 그만두고 나가서 그런지 나를 썩 반기지 않는 눈치였다. 게다가 죽도를 잡아본 적도 없는 검도 쌩초보라니. 검도부 입장에서 보면 전력(戰力)이 아닌 짐이 늘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 나는 짐이었다.


외국인 유학생, 검도 초심자. 어느 하나 반길만 한 요소가 없었다.
당시 난 검도부에 눈치 없이 들어온 불청객에 불과했다.  


대학 캠퍼스 맨 구석에 위치한 검도장


검도부원이 되기로 결심한 이상 검도부의 스케줄에 따라 한 해를 보내야 했다.

기본적으로 학기 중 훈련 일정은 일요일을 제외한 주 6회 매일 약 2시간 훈련. 평일에는 방과 후, 토요일에는 오전 시간에 훈련을 했다.

학교 수업 시간표도 훈련 일정과 겹치지 않도록 짜야했고, 정말 불가피한 사유가 없는 이상 주 6회 연습에 반드시 참가해야 했다. 

몸이 아파 앓아눕거나 누가 돌아가신 게 아니라면 어떤 것도 연습에 빠질 만한 사유가 될 수 없었다. 대략적인 검도부의 연간 훈련 스케줄과 연습 메뉴는 아래와 같다.



< 연 습 메 뉴 >


1. 체조 및 스트레칭 (몸 풀기)

2학년 주장이 앞에 나와서 구호를 외치는 순서에 따라 전원 몸풀기 체조와 스트레칭을 한다. 체조가 끝나면 빛의 속도로 호구를 착용하고 훈련에 임할 준비를 해야 한다. 호구 착용이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선배에게 혼났다.


2. 연격/되받아치기 (切り返し)

바른 자세로 진퇴하며 죽도를 상대방의 머리 좌우에서 비스듬히 교대로 내려치는 기술이다.

본 훈련에 들어가기 전에 몸풀기로 연격을 몇 차례 반복한다. 허리를 곧게 펴고 몸의 중심을 지키면서 타격을 하는 게 중요하다.


3. 기본기 및 응용기술 연습

머리 치기(メン), 손목 치기(小手), 허리 치기(胴) 등의 기본기 연습을 몇 차례 반복한 다음, 기본기를 응용하여 실전에서 활용할 수 있는 응용 기술을 연습한다.


4. 地稽古(지게이코) : 상호 연습

승부를 겨루지 않고 상대방과 자유롭게 연습하는 대련이다. 그동안 배웠던 기술을 실제로 연습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상대방도 나처럼 움직이며 공격과 방어를 하기 때문에 배운 기술을 써먹으려면 상대방의 틈을 파고들어야 한다. 남녀 따로 구분 없이 연습하기 때문에 남자가 대련 상대가 되는 일도 흔하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상대를 바꿔가며 사범이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무한 반복. 보통 후배가 선배한테 상호 연습을 부탁한다.


5. 지옥의 掛かり稽古(카카리게이코)

한국말로 하면..무한공격연습(?)

카카리게이코( 掛かり稽古)는 상대편은 받아주는 역할만 하고 한쪽만 일방적으로 공격가하는 연습으로, 체력적으로 가장 힘든 훈련이다.

공격을 가하는 쪽은 사범이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멈추지 않고 쉼 없이 타격을 가해야 하므로,

계속하다 보면 호흡 곤란이 오고 숨이 넘어갈 정도로 힘들다.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다.

힘들다고 공격을 멈추고 주저 아버리면 선배한테 혼나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 도장 전체 분위기가 갑분싸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절대 쉴 수 없다.

'못하겠어요ㅠㅠ'라고 말한다고 봐주는 분위기가 절대 아니므로 죽을 것 같아도 참고 버텨야 한다.


6. 연격/되받아치기 (切り返し) 반복

모든 훈련의 시작과 끝은 연격으로 마무리한다.


7. 묵상 (黙想)

마지막으로 북소리에 맞춰 묵상을 하고 서로 인사한다.


8. 상호 연습했던 선배한테 조언 듣기

연습 상대였던 선배한테 찾아가서 부족했던 점, 개선점 등 포함하여 조언을 듣고 나서 마지막으로 인사하고 끝!




연습 메뉴는 주기적으로 조금씩 바뀌지만 큰 틀을 벗어나진 않는다. 기본적으로 모든 부원들은 이 어마어마한 연습 메뉴에 따라 매일 훈련을 해야 했다. (역시 이 사람들은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하다..)

이렇게 힘든 훈련을 매일 같이 하는 목적은 단 하나, 검도 대회에 출전해서 좋은 성과를 얻어 대학의 위상을 드높이는 것이다. 비단 검도부뿐만 아니라 학교 이름을 걸고 활동하는 모든 운동부의 목표이기도 했다.


아직 호면을 쓰지 못하는 나 같은 초보자는 도장 구석에서 2학년 선배의 지도에 따라 호면을 안 쓰고도 할 수 있는 기본 훈련을 무한 반복했다.


보통 검도를 잘하려면 죽도를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휘두르냐가 중요할 것 같지만 사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발의 움직임(足さばき), 즉 하체에 달려 있다. 타격을 할 때도 상체를 뻗어서 죽도를 내려치는 게 아니라, 하체를 먼저 재빨리 움직여 상대방의 틈을 파고든 후 타격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겹도록 발 움직이는 법, 발구르기, 빠르게 하체 움직이기 등 주야장천 하체 단련을 했다.

지겨운 하체 연습을 반복하며 먼발치에서 다른 부원들이 호면을 착용하고 훈련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때는 아직 내가 정식 연습 메뉴를 경험하기 전이었으니 그저 호면을 쓰고 연습하는 사람들이 너무 부러울 뿐이었다. 하루빨리 그 대열에 합류해서 같이 연습하고 싶었다.

일본 꼬맹이들이 하는 이 하체 단련 연습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





한 가지 다행인 건 내가 유일한 초심자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운 좋게도 나랑 같은 해에 들어온 여자 동기가 무려 5명이나 있었고 5명 모두 나처럼 검도 경험이 전무한 초심자였다. 내가 한 달 정도 늦게 들어와서 다른 친구들보다 진도가 늦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나와 비슷한 초보자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안심이 되었다.


내 위에 여자 선배는 각 학년에 1-2명씩, 2,3, 4학년 통틀어서 단 4명뿐이었다. 전체 부원이 50명이 넘는 걸 감안하면 여자 부원 수는 전체 인원의 10%에도 미치지 못했다. 보통 검도 대회 단체전에 출전하려면 적어도 5명은 있어야 하는데, 그동안 여자 부원들은 인원이 부족해서 대회에 출전할 기회조차 없었던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대학교 이름을 걸고 활동하는 모든 운동부는 공식 대회에 나가서 좋은 결과를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이기 때문에 대회에 못 나간다는 건 운동부 존속에 치명적이었다. 그런데 여자 부원이 나 포함 무려 6명이나 제 발로 검도부에 들어오는 바람에(?) 드디어 여자부도 단체전에 출전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 문제는 그 6명이 검도를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초심자라는 사실과, 보통 검도 대회에 출전하는 선수들은 적어도 초등학교 때부터 검도를 꾸준히 해온 경험자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즉, 우리는 애초에 게임이 안 되는 승부를 앞으로 4년간 계속해나가야 했다.


나를 포함한 여자 동기들은 아직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매일 반복되는 훈련에  열심히 적응해 나가고 있었다. 그때 우리는 10kg나 되는 무거운 호구를 감당하기도 벅차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일본 대학에서 인싸 되려다 실패한 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