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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lighter Feb 02. 2021

일본 대학에서 인싸 되려다 실패한 썰

인싸 되려다 자발적 아싸가 된 슬픈(?) 사연


어릴 적에 논스톱 시리즈를 보고 자란 나는 캠퍼스 라이프에 대한 로망이 가득했다.

대학생이 되면 동아리에 들어가서 친구도 많이 사귀고 연애도 하며 청춘을 만끽하고 싶었다.

그렇다. 나는 소위 말하는 '인싸(인사이더)'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일본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내가 가입할 동아리찾아다녔다.

대학생활의 청춘을 그린 추억의 논스톱 시리즈


대학생 창업 동아리, 아카펠라 동아리, 환경 동아리, 애니메이션 동아리...

일본 대학에는 진짜 별의별 동아리가 다 있었다.

나는 적당히 자기개발도 하면서 일본인 친구들도 사귈 수 있고 풋풋한 연애도 기대할 수 있는(?) 인싸들이 모인 동아리에 들어가고 싶었다.

내가 상상했던 일본 대학생 동아리의 모습


1. 대학생 창업 동아리

대학생들이 창업을 한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나도 창업에 꽤 관심이 있었던 터라 호기심에 찾아가 봤다.

신입생 환영회에 갔더니 동아리 사람들이 신입생 포함 남자였다. 순간 내가 금녀의 구역에 들어왔나 싶어 당황했다.

창업 동아리 사람들은 인싸 중에서도 '핵인싸'들만 모아놓은 것 같았다.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머리를 깔끔하게 올리고 옷도 댄디하게 입고 있었다.

대화의 주제는 창업을 생각하는 사람들답게(?) 매우 건설적이었다.

밝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 좋긴 한데 왠지 모르게 부담스러웠다.  


일본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意識高い(의식이 높다)'고 표현한다.

https://www.enjoytokyo.jp/date/detail/1151/

 意識高い系(의식이 높은 사람) :

일이나 라이프 스타일 등에서 수준 높은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 어려운 외국어 등을 잘 쓴다. 또한 SNS를 자주 이용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어필한다.

 

意識高い系(의식이 높은 사람들)의 특징

SNS로 인맥 만드는 게 특기(페북 친구 1,000명 이상은 기본!)

자기개발욕구, 행동력이 강하고 정보에 매우 민감함

말할 때 굳이 어려운 외국어 단어를 사용함

바쁜 내 모습이 너무 좋아♡

시크한 재킷, 안에는 브이넥 티셔츠 필수

타이트한 데님 또는 복사뼈 보이는 바지

끝이 뾰족한 구두

Fun 하고 Cool하고 Sexy함


진짜 거짓말 안치고 창업 동아리에는 저런 사람들밖에 없었다.

자기가 Fun 하고 Cool하고 Sexy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만 모아 놓은 느낌이었다.

뭔가 나랑은 다른 종류의 사람들 같았다.

대단한 건 알겠는데 너무 부담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뒷걸음치면서 신입생 환영회를 빠져나왔던 기억이 난다.



2. 환경 보호 동아리

대학교 게시판에서 우연히 환경 보호 동아리 신입생 모집 포스터를 발견했다.

중학생 때부터 환경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한 번 가보기로 했다.

포스터에 적힌 강의실로 찾아가서 문을 연 순간,

딱 2명이 있었는데..

애니메이션 캐릭터처럼 보이는 작고 예쁘장한 여성분과

그 여자분의 팬처럼 보이는.. 조금 크고 거대한 남성분이 있었다.

당시 환경 동아리를 방문했을 때 있었던 예쁘장한 여성분과  남성분과 흡사한 이미지

순간 내가 환경 동아리가 아니라

애니 연구 동아리에 잘못 들어온 줄 알았다.


그런데 칠판에 '환경 동아리'라고 큰 글씨로 적혀 있어서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애니 캐릭터 같이 작고 귀여운 여성분께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동아리 활동에 대해 설명해주셨는데 사실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환경이고 나발이고 그냥 동아리의 암울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한시라도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 뿐이다.

창업 동아리 사람들과는 완전 극과 극이었다.

창업 동아리 사람들은 과도하게 밝아서 부담스러울 정도였다면

환경 동아리 사람들은 너무 어둡고 소심해서 나까지 우울해질 것 같았다.



3. 아카펠라 동아리

한국인 유학생 친구들을 따라서 우리 대학에서 가장 유명한 아카펠라 동아리 신입생 환영회에 갔다.

아카펠라 동아리 사람들은 창업 동아리 사람들처럼 너무 자의식 과잉도 아니고 환경 동아리 사람들처럼 너무 소심해 보이지도 않  적당한 인싸들이 모인 곳 같았다. 남녀 비율도 반반 정도로 이상적이었다. 신입생 환영회에서 선배들이 직접 아카펠라 공연을 선보인다고 해서 내심 기대를 하고 있었다.

나는 '아카펠라'라길래 스윗소로우 같은 하모니를 기대하고 는데,

 귀에 들리는 건 하모니가 아니라 불협화음이었다... 기대가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다. 내가 듣기에 노래를 잘 부른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들은 너무 좋았지만 도저히 이 곳에서 합을 맞춰 노래를 부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여기저기 돌아다녀봤지만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한 채

이대로 나의 인싸 되기 프로젝트는 실패로 끝나는 것 같았다..






어느 날 나랑 같은 맨션에 사는 친한 한국인 친구가 같이 검도부에 견학하러 가보지 않겠냐고 물었다. 뜬금없긴 했지만 검도가 흔한 운동은 아니다 보니 호기심이 생겨 따라가 보기로 했다.


검도장은 학교 동쪽 캠퍼스 맨 구석에 위치해 있었다.

학교 동쪽 캠퍼스 구석에 위치한 검도장


검도장으로 가는 길 (건물로 바로 들어가면 검도장 후문과 연결된다)


검도장 문을 열기도 전에 엄청난 소리가 들려와 순간 멈칫했다.

고함소리 비슷한 찢어지는 기합소리에 깜짝 놀라서 문을 열까 말까 몇 번을 고민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들어가 보지도 않고 돌아가기엔 아쉬워서 눈을 질끈 감고 들어가 보기로 했다.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검은색 도복을 입은 사람들이 이상한 기합소리와 함께 죽도를 내려치면서 열심히 검도 연습을 하고 있었다. 검도하는 모습을 본 건 이때가 태어나서 처음이었는데, 충격적이면서도 신선했다.


우리가 견학 온 걸 눈치챈 검도부원 한 명이 호면을 벗고 우리 쪽으로 다가와 의자를 내어주며 편하게 구경하라고 말해주었다. 우렁찬 기합소리를 내며 단체로 죽도를 휘두르는 모습이 처음엔 무섭게만 느껴졌는데  계속 보다 보니 멋있어 보였다.


 한가로운 오후 시간, 대학 캠퍼스 구석에 위치한 도장에서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 땀을 흘리며 같이 수련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검도 연습을 하고 있는 부원들의 모습 (장소 : 우리 대학 캠퍼스 구석에 위치한 검도장)


훈련이 끝나고, 좀 전에 우리에게 의자를 내어주었던 여자 검도부원이 우리 쪽으로 와서 검도부 활동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검도부 활동 내용

주 6회 매일 2시간씩 방과 후 연습 필수 참가  

학교 수업과 검도부 이벤트(합숙훈련, 대회 등)가 겹치면 검도부 활동 우선시하기

연간 4회 단체 합숙 훈련 필수 참가

방학 때도 2주 이상 귀성하는 건 가급적 삼가기

 

여기까지 들었을 땐 솔직히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젊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고생을 너무 과소비하는 거 아닌가? 그렇게 청춘을 갈아 넣어서 얻는 게 도대체 뭔지 궁금해질 때쯤, 그 검도부원이 검도부 활동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메리트가 뭔지 설명해주었다.


검도부 활동의 메리트

운동부 중에서는 흔치 않게 여자도 플레이어로서 활약 가능

검도 초심자라도 열심히 하면 공식 검도대회 출전 기회 부여

검도부 OB 커뮤니티를 통해 취업 준비 시 선배한테 도움받을 수 있음

대학 4년 간 충만하게 청춘을 보낼 수 있음


검도부 활동이 만만치는 않지만 운동부 중에서는 흔치 않게 여자도 플레이어로서 활약할 수 있다고 했다. 현재 검도부에는 여자 선수가 부족해서 검도 경험이 없는 초심자라도 열심히만 하면 검도대회에 출전할 수 있다 것이다.

그러고보니 검도부에는 다른 운동부와 달리 매니저가 따로 없었다. (일본 대학의 대부분의 운동부에는 선수들을 서포트하는 매니저가 있다.) 남한테 뒤치다꺼리 시키지 않고 자기 관리(부상 관리, 빨래, 장비 체크 등)는 자기가 알아서 하는 점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검도부에서는 남녀 모두 선수로 활약할 수 있고, 심지어 남녀 구별 없이 똑같은 연습 메뉴로 훈련한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게다가 선후배 검도부원 간의 커뮤니티끈끈해서 취업 준비할 때 졸업한 검도부 선배들의 도움까지 받을 수 있다 하니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마음은 검도부 쪽으로 기울고 있었지만 그래도 섣불리 결정할 수는 없어서 며칠 후 다른 친구들을 데리고 다시 검도장에 견학하러 갔다.


 가만히 앉아서 훈련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데 그날따라 도복을 입고 수련하는 검도부원들이 유난히 더 멋있어 보였다. 문득 여기에서 내 대학 4년을 보내도 좋겠다는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죽도를 손에 쥐어본 적도 없고 검도의 '검'자도 모르지만 운동 활동이 아무리 힘들다 해도 나라고 못할 건 뭔가 싶었다.


그리고 다음날 바로 검도부에 가입했다.


아싸 of 아싸, 검도부에 들어가다


검도부는 우리 대학 동아리 중에서도 가장 폐쇄적이고 청춘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곳이었다.

캠퍼스 맨 구석에 자리 잡은 검도부는 여타 화려한 동아리에 비해 인기도 없고 존재감 없이 음지에서 조용히 활동하는 '아싸'(아웃사이더) 운동부였다.

50명 남짓 되는 부원 중 대다수가 남자인 데다 검은색 도복까지 입고 있으니 분위기가 더 어둡고 칙칙했다.

 

한 때 인싸를 꿈꿨던 나는 인싸들이 모인 화려한 동아리에 갔을 때

왠지 모르게 불편함을 느꼈다.

그런데 검도부에 온 순간, 이유는 모르겠지만 마음이 편안해졌다.

심지어 검도부에는 중국인 부원 한 명을 제외하곤 일본인밖에 없었고

내가 유일한 한국인이었는데도 말이다.

그 사람들이 나를 반기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냥 여기가 내가 있어야 할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인싸보단 아싸가 편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검도부가 아싸 중의 아싸 운동부라면

외국인 유학생인 나는 검도부 안에서도 그야말로 '핵아'였다.


그렇게 나는 자발적인(주륵..) 아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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