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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 위의 앨리스 Jul 08. 2022

5. 복사도 커피도 왜 셀프가 안되나요?

가르쳐야 할 건 따로 있는데


 수습기간 3개월.

물론 공공기관은 3개월 간 엄청 큰 사고를 치지 않는 이상 공채 직원으로 뽑은 사람을 수습에서 정규직으로 전환해준다.

하지만 어쨌든 안정적 신분은 아니었고, 나에게는 부서 내 직원들의 평가가 중요한 시기였다.


앞서 말한 대로 나는 3개월 동안 버벅대고 있었다.

회사에서는 그런 우리 수습사원들을 위해 멘토멘티 제도를 운영하고 있었다.

신입 1명당 1명의 멘토를 지정해주고, 그들은 일부 지원금을 받으며 함께 밥도 사고 애로도 듣고 회사생활에 대해서도 가이드를 주는 그런 일을 한다.


나에게 지정된 멘토는 40대 초중반의 과장급 남자분이었다.

20대 중반의 사원인 내게는 나이도 그렇고 매우 차이가 나는 상사이기는 했다.

그분은 내게 딱히 시킬 것이 없어 그랬는지 주로 이런 것을 시켰다.


 - 사내메일로 보낸 파일 출력하기

 - 출력해놓은 문복사하기

 - 출력한 보고서 스테이플러로 찍어서 정리하기

 - 보고서에 띠지 붙여서 결재판에 넣어 드리기

 - 필요한 문구류, 간식, 커피, 차 주문해드리기


 띠지란, 보고서에 스테이플러를 - 또는 / 모양으로 찍힌 것을 감추기 위해 삼각형으로 생긴 스티커를 그 위에 붙이는 것이었다. 오래된 공무원 문화 중 하나다. 보통 부서장급 이상에 보고하거나, 외부의 의원, 고위공무원 보고용 자료에는 띠지를 붙여야 한다.

 요즘은 없어진 문화이지만, 내가 입사할 때만 해도 있는 문화였다.

 수습직원이니 이런 것도 하나의 교육이라고 할수는 있겠다.


 사실 당시에는 분위기나 팀내 돌아가는 업무의 흐름, 기본내용을 파악하는 중이어서 이런 기초 중에 기초도 배우는 입장에서는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자괴감이 들기도 한 것이 사실이다. 다시 생각해보면, 프로젝트 단위 업무의 내용을 파악하면서 저런 것들은 자연스레 누구라도 터득할 일들이란 생각이 들어서다. 나의 선배들은 프로젝트의 성격이 어떤지, 관련법령이 뭐가 있는지, 구조가 어떤지, 상황이 어떤지는 조금도 가르쳐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어느 날인가 부장님이 나를 불러 냉장고에 다같이 마실 냉커피를 타놓으라고 시키셨다. 미리 타 놓으면 선배들이 매번 커피를 타서, 얼음을 넣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아마도 지금 세대 친구들이라면 "내가왜?" 라고 하거나,  사내 갑질 신고를 했을 수도 있겠다. 대놓고 그건 알아서 타 드시라고 할 친구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 때의 나는 그런 말은 할 수 없었다. 네, 라고 하고는 실제로 커피를 타 놓을 플라스틱 통도 주문했다. 내 주업무인 서무업무 중에 업무분장에 기술되지 않은 저런 잡다한 업무도 막내의 몫이었기 때문에 내 업무가 절대 아니라고 말하기도 애매했다. 그냥 꼭 저 일을 해야한다는 의무는 나한테 없지 않나 하는 생각 정도를 했고 바쁘지 않을 때 타 두어야겠다는 생각도 분명 했다. 그런데 다른 일들로 바빠서 조금 미뤄두고 있었던 터에, 그 부장님께서 버럭 화를 냈다. 내가 시킨 지가 얼만데 아직도 안 타놨냐고 말이다.


 솔직히 속으로 짜증이 좀 났다. 내가 본인들의 개인 비서는 아니지 않은가. 내 업무적 능력이 아직은 이용해먹을 정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내가 그렇다고 개인들이 휴게시간에 마실 커피를 타 놔야만 하는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할 수 없이 설거지통만한 바가지에 냉커피를 타기 시작했다. 가루를 넣고, 넣고, 또 넣고...눈물이 찔끔 날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바보같지만 그땐 찍소리 할 군번이 아니었다. 나는 회사 내 계급 피라미드의 최말단에 위치한 수습사원이었고 그들이 나를 최저점을 주지는 않을지라도 혹시라도 누군가의 눈밖에 나면 0.1퍼센트의 가능성이라도 내 직장이 날아갈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락앤락 물통에 커피를 가득 타서 냉장고에 넣어두고 그 부장에게 다 탔다고 말해주었다.  퉁퉁한 몸의 부장은 그래, 잘했다. 하며 만족스런 얼굴로 얼굴만한 큰 잔에 커피를 따라 벌컥벌컥 마셨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그 커피는 그 부장만 마셨다. 부서 내 어느 누구도 그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내 커피 수발은 그것이 마지막이 되었다.


 이런 치욕적인 대접이 당연한 곳이 조직인 줄 알았다. 라떼는 그랬다.

그런데 이보다 더 치욕적인 일이 있었다.


나의 그 멘토님은 가끔 부적절한 말로 사람을 놀래키는 재주가 있었다. 사람 젠틀하고 술담배 안하는 FM이라고 알려져 있던 그 분께서는 그렇게 내 외모에 관심이 많으셨다. 일을 따로 가르쳐준 건 하나도 없었고, 복사와 스테이플러질만 열심히 시키셨다. 다행인 건 커피좀 타오라는 심부름은 안 시켰다는 점? 처음엔 무관심해서 말도 잘 안 걸던 그분께서는 어느날부턴가 내 얼굴 평가를 수시로 하셨다.  앨리스씨는 코가 참 예뻐. 성형수술해도 코는 고치지 마. 뭐 이정도는 애교다. 웃을때 코에 잡히는 주름이 섹스어필한다며 좀 선을 넘는 말을 한마디씩 붙이는데 썩 기분이 좋진 않았지만 나는 웃었다. 바보같이 왜 웃었는지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를 만나면 정말 세게 등짝스매싱을 해주고 싶을 지경이다. 어느 날은 다리가 예쁘다며 치마가 잘 어울린다고, 어느 날은 피곤하니까 좀 웃어보라는 개소리를 시전하셨다. 음...이런 멘토에겐 뭘 배워야 하는 걸까? 개드립?


 솔직히 무시를 안 할라고 해도 예전 지자체 출신으로 내려온 남자 상사들에게 좀 지저분한 면이 많았다. 이를테면 팀내 회의에서 막내 여직원이라는 이유로 너는 빠져. 또는 커피좀 타오고 전화받고 있어라 하는. 그런 식의 수준이었다. 지금같으면 이건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감이지만 그때는 좀 어우. 올드해. 이러고 말았지 거기다 팀장에게 토달 막내사원도 직원들도 없었다. 다행히 나의 첫 팀장님은 절대 그런 분이 아니셨지만 동기들 중에 그런 식의 팀장에게 당한 여자동기들이 많았다. 그게 바로 회사의 "수준" 이다. 안타깝지만 회사의 수준은 "윗물"의 문화와 정신상태가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우리 회사는 그때 매우 낙후된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무릇 직장의 상사 또는 선배란 업무적으로 관계가 되어있는 사이다. 신입이나 후배가 들어왔다면 복사하는 법이든 보고서 작성하는 법이든 가르칠 수도 있다. 그런 관계라 하더라도 넘지말아야 할 선은 분명히 있다.

내가 직장 내 직위가 그들보다 낮은 것이지 사람 대 사람으로 내가 모자란 사이가 아니다. 내가 막내일 때는 오히려 그들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연차가 차고 내가 그때 그들의 직급이 되자 그들을 이해할 수 없어졌다. 내가 그 과장보다 연차도 직급도 높은 입장에서 보니 그 행동은 가르친 게 아니라 사람을 우습게 보고 한 행동이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도제식으로 가르치는 일에도 예의는 필요하다. 더구나 우리 회사는 그런 특수기술을 가르치는 회사가 아니다. 사무직인 나같은 직원에게 회사가 요구하는 것은 폭넓은 이해를 통한 제네럴리스트가 되는 것이다. 제너럴하다는 말은 전문영역을 깊고 좁게 파는 것보다 좀더 넓은 분야에서의 빠른 적응력과 전반의 업무이해력이 높다는 뜻이지 비업무적 영역을 마스터한다는 뜻은 아닐것이다.

나는 신입들에게 최소한 내 고유의 잡무를 시키지 않는다. 내게 가르침을 주었던 선배들은 자신의 몫을 온전히 해 내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나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들은 만큼 본인에게도 타인에게도 기본적으로 갖고있는 기대치랄까? 능력에 대한 신뢰도가 높기 때문에 나온 행동일거라고 나는 해석했다.


 커피를 타고, 복사를 하는 일은 지금은 인턴에게도 시키지 않는다. 그만큼 직장문화가 많이 올라왔다고는 생각한다. 뭐.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식으로 복사도 기본이다 하는 잡소리 하는 인간들. 그냥 그런건 중학생한테도 옆에서 한번만 말해주면 다 안다. 어리다고, 신입이라고 사람 개무시 좀 하지 말자. 복사도, 커피도. 제발 니가 마실 건 발로라도 타서 드세요. 아. 그때도 그런 말은 좀 하고 싶었다. 정말 가르쳐야 할 업무는 혼자 문서함 열고 보고, 통화하는 거 엿듣고, 보고하는 말 회의자료 보면서 내가 스스로 익혔다. 쓰면서 느끼는 건데 정말 지금 생각해도 참 개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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