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길 위의 앨리스 Jul 04. 2022

4. 내가 이렇게 뚝딱이었나

맞춤법을 열번도 넘게 틀리는 나, 사람 맞나요

 입사 후 몇일간의 교육을 마치고 드디어 부서로 갔다. 진짜 출근 1일차. 업무분장을 받았다.


회계업무 및 @@@ 프로젝트 담당이란다.

회계업무? 난 회계의 ㅎ자도 모르고, 회계때문에 필기시험 떨어지는 줄 알았던 사람이었다.


나의 사수분은 쿨하게 말씀하셨다. 별거 없고, 그냥 부서에 나오는 전표나 점심예약, 문구류 주문 및 결제, 회의비처리 등등을 하면 된다고 말이다.


뭔가...그전에 현장에서 하던 일이 생각이 나면서, 계약직이던 경리분이 생각이 났다.

그런 업무를 정규직으로 들어온 내가 하나요?

정말 부끄럽지만 처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업무는 간단해요. 일단 간단한 업무부터 시작을 하죠. 사수분이 말했다.

같은 부서의 동기는 행정업무를 맡았다. 주로 회사 내 회의자료들을 취합하는 업무였다.


안해본 업무인지라 인수인계를 받으면서 나는 1부터 10까지 다 적었다.

매뉴얼이 따로 있지는 않았어서, 그렇게 적은 것을 보며 더듬거리며 전표를 쳤다.

결제한 걸로 전표만 치는 게 아니라, 지출을 하기 전 품의라는 것도 해야했다.

품의는 어떠어떠한 사유로 무엇을, 어디에서 사겠습니다 라고 결재를 받는 것을 말한다.

공기업이라 그런가 품의를 하기위한 별도의 양식이 있었다.


@@@프로젝트는 진행이 잘 되지 않는 신규 프로젝트였다.

팀장님이 함께 하실 일이라 그냥 잘 따라다니면서 듣고 시키는 것을 하면 된다고 했다.


프로젝트 때문에 회의가 잡혀 출근 첫날부터 외부 출장을 가게 됐다.

내 첫 팀장님은 정말 지적이고 젠틀하시며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로 회의장의 모두를 집중하게 하는

분이셨다. 너무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는데.....들었는데, 사실은 너무 졸렸다.


일단 졸린 이유는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들어서다.

투심이 어떻고, 사업성이 어떻고 용적률이 어떻고 저떻고 얘기를 하는데 한 마디를 못알아듣겠는 거였다.

그런 외계어같은 얘기만 잔뜩 하는 자리에서 한시간 반을....나는 신입사원이라고 호기롭게 인사해놓고 졸았다. 중간엔 약간의 헤드벵......잉...도.....했다. 아........

정말 지금 생각하면 땅을 파고 코박고 죽고 싶다. 오합지졸이 따로 없다.


회의자리에서는 그럴수도 있다고 치자.

나는 공문서 하나 전표 하나를 치는데도 오타를 백만번쯤 냈다.

아니, 백만번은 너무 심했고 한 열번쯤? 낸 적도 있다.

나중에 부서장이 화를 내셨고 사수는 나의 전표며 공문이며 모두 1부터 10까지 검사받고 결재를 올리라는

특명까지 내렸다. 아, 그보다 더 웃긴거. 하도 긴장을 해서 전화를 대신 받았는데 다른 부서 팀장님 이름이 아무리 해도 잘 안들렸다. 분명 팀장님이 또박또박 말을 해주는데도 안 들렸다. 김!개!똥! 이라고 뻥안치고 다섯번은 말씀해주셨다. 아......정말.....할 말이 없다. 내가 그랬었다. 나는 후배 갈굴 자격이 없는 인간이다.


지금 쓰면서 생각해도 나는 완전 구제불능이었다.

물론 나의 그런 시절이 있었기에, 후배들이 들어오면 나는 무한한 관용적 마인드로 바라보게 된다.

어지간하면 나보단 더 낫기에. ㅋ

분명 취업 필기 준비를 할때 회계학에서 대변 차변 어쩌구를 배웠지만...아니 똥도 아니고 대변은 뭐고 차변은 뭔지. 모르겠었고.

그리고 회계시스템이 너무 오래된 구식이라 수기로 일일이 쳐야만 하는 것도 매우 비효율적이었다.

공기업 시스템의 최대 단점. 발전속도가 사기업에 비하면 엄청 느리다.

수기로 대변 차변을 맞춰가며 쳐야만 하는 전표에다 결재를 할때마다 시스템 화면을 다시 띄우고 처리해야 하는 이상한 시스템. 아무튼 익숙해지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 치더라도,


나는 내가 이렇게도 멍청이었나 싶도록 실수를 연발했다.

전표에 숫자를 맞춰놓으면 증빙자료에 오타가 나 있고, 오타를 고쳐놓으면 품의서에 맞춤법이 틀려있었다. 와. 나 회사는 어떻게 들어온거지? 란 생각이 절로 들게 말이다.

언젠가는 자금팀장님이 전화를 했다. 띄어쓰기 틀렸다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넘어갈수도 있는 일들인데도 불구하고 공공기관 특성 상 윗분들이 그런데 아주 예민하다. 휴먼명조체. 그리고 글자포인트는 13. 이런 형식이 매우 중요했다.

그런거부터 일일이 다 지적을 받다보니 가뜩이나 소심한 나는 잔뜩 주눅이 들어있었고 회사에 다녀오면 어깨가 아팠다. 너무 창피한 고백이지만 그땐 내가 정말 세상 하나 쓸모없는 인간인 줄 알았다. 그 악순환은 점점더 심해졌다. 하루하루가 도전인데, 어쩌다 이런 별것도 아닌 것 같은 일들이 도전이 되었을꼬 싶어 내가 너무 한심해졌다.


 그런 진한 흑역사 덕분에 나는 후배들이 모르겠어요 라고 솔직히 말하는 걸 보면 너무 멋져보인다.  

나는 그런 용기조차도 없었으니까. 모르겠어요 라는 말도 못한 채 애매하게 어디서 이걸 몰래 찾아서 알았던 것처럼 하지? 하는 웃기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얼레벌레 눈치만 보다 계속 틀리면 더 어색해지고 또 틀리고....정말 사람이 맞습니까? 라고 누가 물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나는 어쩌다 굴러들어온 고문병사라고 하더라도.그렇게 높은 경쟁률을 뚫고 들어온 내 동기들 어땠을까? 정답은. 나보다 심하진 않겠지만 엇비슷했다. ㅋ


그 이유가 뭘까. 곰곰히 생각해봤다. 일단 분위기 자체가 너무 경직됐었다. 사람이 좋고 나쁘고가 아니라, 조직의 문화라는 게 그랬다. 형식 엄청 따지고. 보수적이고. 입사 첫날 청바지는 절대 입지 말라는 상사도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건데 그분이 엄청 꼰대신거고 젊은 분들은 청바지 입고 다니셨다) 지금은 그런 문화는 많이 사라졌지만.


그리고 회사조직을 겪어본 경험이 적다는 게 큰 부분을 차지했다. 어떤 사람은 겪어보지 않았어도 눈치껏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나란 인간은 부딪혀봐야 깨닫고 일을 하는 스타일이다. 게다가 소심해서 실수를 굉장히 두려워했다. 실수하면 큰일나는줄 알고 문서를 보고 또 봤다. 그런데 웃긴건 그러니까 더 틀렸다. 어떻게 보면 신입사원은 실수를 많이 할수밖에 없는 존재다. 몰랐으니까. 모르니까. 배워야할 것이 천지다. 신입에게 큰 업무를 맡기지 않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작은 것부터 시작해서 하나씩 하나씩 배워나가며 밥값을 할 수 있는 실무자급으로 키우는 것이다.



덧붙임.

어찌됐든 나의 뚝딱이 시절은. 정말 생각만해도 아찔하다. 그런 측면에서 나의 사수님 그리고 무한한 실수에도 눈을 감아주신 상사분들 진짜 존경스럽다. 그 분들이 있었기에 나도 후배들에게 그분들만큼 후배의 실수나 어려움에 인내심을 갖고 잘 기다려주는 선배가 되고자 노력하게 된다. 혹시 나같이 뚝딱거리는 신입1이 이 글을 보고 계시다면, 당신보다 저는 더했지만 그래도 안 자르고 아직은 일하게 둡디다. 뚝딱이는 거 이상한 거 아니니까 조금만 마음을 편히 먹고 그 기간을 잘 버텨보시길.

매거진의 이전글 3. 사원증은 걸었는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