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흐마니노프를 듣지 않게 되었다
지금 내 계절은 겨울을 지나
공황장애와 우울증이 한창일 시절, 나는 없는 힘을 쥐어짜며 죽은 듯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보통의 나는 신나는 음악을 틀어놓고 출근길을 달렸다. 텐션을 끌어올려야 회사에서 일을 할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시절의 나는 달랐다. 장송곡 같은 클래식을 틀거나 아무 음악도 틀지 않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를 잠식한 불안이 언제 튀어나와 정신을 할퀼지 두려웠기 때문이다.
계절마다, 혹은 계절을 떠올리고 싶을 때마다 듣는 곡이 따로 있다. 나의 겨울 노래는 라흐마니노프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라흐마니노프의 곡은 피아노협주곡 제2번 C단조 1악장.
휴직을 하기 직전 나는 이 라흐마니노프의 곡을 들으며 출근을 했었다.
사실 제일 많이 알려진 것도 1악장인데 그도 그럴 것이 1악장은 시작부터 격한 도입부로 임팩트가 있고 유명한 일본 드라마 노다메칸타빌레의 삽입곡으로도 쓰였다.
이 곡을 듣고 있으면 겨울 폭풍우가 떠오르는데, 인간의 희노애락을 스케일있게 담아둔것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작곡가가 나 러시아인이야~라는 티를 팍팍 내는 대륙의 광대한 느낌.
라흐마니노프는 생애 총 4개의 피아노 협주곡을 남겼다, 첫번째 피아노협주곡은 완전 혹평을 듣고 망하다시피 했고 정신적으로 완전 멘붕상태일 때 "달"이라는 최면의 대가이자 귀인을 만나 몇년간을 정신적으로 치유의 기간을 거쳐 만든 곡이 바로 이 곡이다.아마 4개의 피아노협주곡 중 가장 대중적으로 유명할것이다.
내가 이번에 처음 안건 2악장과 3악장을 먼저 쓰고, 1악장을 가장 마지막에 작곡했다는 건데, 확실히 자신감이 붙고 나서 써내려간 거라 그런지 아주 첫 소절부터 엄청난 자신감 뿜뿜이다.
이 곡은 업과 다운이 매우 격한데 멜로디의 흐름과 전개가 거침이 없으면서도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라흐마니노프의 그러한 스토리가 알려져서인지 몰라도, 마치 이렇게 들린다.
내 인생에 죽을것 같은 폭풍우가 몰아쳤지. 끝도없이 땅을 파고 좌절했어. 아. 난 이대로 끝인건가? 그럴 때 내 인생에 달이 나타났어. 그는 말했지. 당신은 할수 있어. 당신은 일어날것이고, 당신의 음악적인 재능은 아름답고 거대한 명작을 쓰게 해줄 거야. 당신은 할수 있어. 라고. 아. 그의 속삭임을 들으면 내게도 희망이 열리는것만 같아. 그래. 가보자. 가는거야. 그렇게. 가보자고!
실제 이 2번 곡은 정신과 의사였던 달에게 헌정되었고, 라흐마니노프의 이 곡은 훗날 많은 뮤지션들에게 차용되기도 한다. 브리짓존스의 일기라는 영화의 주인공이 영화 초입에서 부르던 유명한 그곡 All by myself라는 셀린디온의 곡도 바로 이 곡의 멜로디를 따왔다.
외로움에 쩔은 우리 브리짓 언니가 소파에서 처연하고 엄숙한 표정으로 읖조리던 그 멜로디말이다.
아마 굳이 이 영화나 셀린디온의 노래를 모르더라도, 이 모데라토 중반부를 듣다보면 그 멜로디가 매우 익숙해서, 아....그거구나. 싶을 것이다.
이 곡을 들으며 나는 겨울을 떠올린다. 바람이 거세고 매섭다. 그 견디기 힘든 매서움에 이를 악 물어야 하는 고통이 느껴진다. 이 곡을 쓸 때 라흐마니노프도 실패와 세간의 비평으로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래서 이 곡을 들을 때 우울해지느냐 묻는다면 절대 아니다. 그 극심한 우울과 공황으로 인해 죽고싶을 때 이곡을 들었던 것은 살고자 하는 의지를 다지기 위해서였다. 이 노랠 듣고있으면 그 고통속에서 우뚝 선 큰 사람이 떠오른다. 사람의 의지. 굳은 그 존재감. 그런 묵직함이 전해져서 좋았다. 아마도 라흐마니노프도 그런 의지를 보여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살면서 수십번의 계절을 겪고 변화를 지나왔지만 내 인생에도 고유한 계절은 계속해서 지나간다. 지금까지 내 계절은 길고 긴 겨울이었다. 춥고, 외롭고, 무섭고 힘든. 그 시련을 버티며 봄을 기다린다. 3년만에 2번째 협주곡으로 생애의 봄날을 기어코 맞이했던 라흐마니노프처럼, 나도 언젠간 그 계절을 지나갈 수 있을 것 같다.
칼릴 지브란이 쓴 "시간에 대하여" 에서 그는 인간에게 시간이 갖는 의미를 알려준다.
그대 자신의 생각을 변하게 만드는 것 이외에
시간이 계절의 한 모습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봄은 그대의 가슴 속에서만 깨어나는 것이고
여름은 스스로의 풍요로움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가을은 아직 성숙하지 않은 그대에게
자장가를 불러주고 있으며
겨울은 모든 계절에 잉태한 잠의 휴식일 것입니다
휴직을 한 후로 라흐마니노프를 듣는 횟수는 조금씩 조금씩 줄어들었다. 나는 이제 라흐마니노프를 듣지 않는다. 그만큼 나도 음악으로 억지로 에너지를 끌어올리지 않아도 될 만큼 나아진 것 아닐까. 잠과 침묵의 휴식기를 지나고 있는 지금, 내 마음속의 계절이 이제 봄으로 그 시곗바늘을 옮기고 있다고 믿어도 될까. 반백수의 삶이지만, 또 누군가에겐 되게 하찮은 변화로 보일 수 있지만 내게는 의미있고 많은 변화들이 있었다.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변화 속에서 흙이 새 싹을 틔우듯, 나는 언 땅에도 봄이 마침내는 오게 될 것임을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