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직장 내 괴롭힘에 대처하는 자세

by 길 위의 앨리스


회사에서 잇달아 만나게 되었던 일들로 인해 나는 마음도 몸도 많이 피폐해진 상태였다.

하지만 나를 쓰러뜨린 건 트리거가 되는 어떤 사건이었다.






가뜩이나 번아웃에 힘겹던 차에 이상한 소문이 퍼졌다. 내가 익명으로 상사한테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고 고발했다는 것이다. 내가? 나는 몹시 당황스러웠다. 나는 문제가 있으면 아무리 높은 상사라도 당사자와 직접 대면해서 해결하는 편이다. 하지만 내게 왜 이런 꼬리표가 붙었는지 스스로 고민해 본 결과 몇 년 전 그 일 때문이었던 것 같다.


몇 년 전 우리회사는 공공기관에 불었던 성과연봉제의 바람에 흔들렸다. 기업평가 시 반영되는 부분 때문에 사측에서는 어떻게든 성과연봉제를 통과시키려 했고 노조와 대부분의 직원들은 반대했다. 팽팽한 줄다리기가 계속되고 있던 차에 담당 임원이 꾀를 냈다. 연봉제로 변환시키기 위해 필요한 노조의 동의 대신, 직원 전체 기습 투표에 붙여 진행시키겠다고 말이다. 나는 전날저녁 올라온 공지문을 보고 바로 실명으로 댓글을 달았다.


아침 출근길에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다. 나의 선배가 나의 공격적인 댓글을 보고 혹시 실수로 단거 아니냐며 지워줄까? 하는 전화였다. 나는 그런 댓글을 실수로 달지 않는다. 나는 보라고 단 댓글이니 그냥 두시라고 했다. 실세임원의 방침에 정면으로 반박한 막내직원을 곱게 보는 윗사람이 어디있겠는가. 옳은 말을 하면

더 꼴보기 싫어지는 게 세상 이치다. 그 일로 나는 댓글을 내렸으면 한다는 취지로 설득하는 윗사람들에게 불려다녔지만 끝까지 지우지 않았다. 틀렸으면 틀렸다고 댓글 다시라고 했다. 그 일로 나를 노조 간부로 착각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난 노조관계자도 아닌 그냥 평사원이었다. 그 때 그 반골분자 이미지가 굳어져 있던 차에, 하필 나의 진상 상사가 그 익명 신고의 가해자에 부합하는 인물이었던 거다.

뭐, 의심받을 수도 있지. 하지만 막상 당하면 기분 진짜 별로다. 그리고 그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나를 보면 피하거나 쑥덕거리거나 들으라는 투로 비아냥대는. 근데 거기다 대고 막상 가서 저 아니거든요. 하기에도 몹시 애매했다. 자기들끼리 얘기한거지 나한테 물어본 게 아니니까. 그냥 그들은 그게 나라고 특정짓고 도마위에 올려둔 채 난도질했다. 지금같아서는 사실 인격살인에 가담했던 직원들 모조리 다 기록해서 경찰서로 갔을텐데. 그 때는 내가 많이 쇠약해져 있던 터라 정말 힘들었다.

그런데 더 압권인 사건은 임원실에서 벌어졌다.

소속임원이 나를 호출했고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너 그분한테 개인적으로 감정있니?"

여기서 개인 감정이 왜나와? 내가 감정이 나빠서 사람을 음해했다는 건가?

내게는 그렇게 들렸다. 안그래도 끓어오르던 화가 머리뚜껑부터 폭발해 나왔다.

물론 거기서 임원은 다시 말을 덧붙였다. 임원회의에서 실명으로 나의 이름이 거론됐다며 자신은 내가 힘든지 안 힘든지만 말해줬음 좋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첫 마디부터 나를 어떻게 판단하고 이 자리에 불렀는지

명확했기 때문에 나는 그냥 사실이 아니라고만 말했다. 눈물이 흘렀다. 너무 화가 났고 억울했다.

정말 물리적으로만 안 맞았지 온 세상이 나에게 주먹질을 해대는 것 같았다. 도대체 나한테 왜들 이래?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걸 증명해 보일수도 없고 어찌해야 하나 싶었다.


더 이해할 수 없었던 건 회사의 대응 방식이었다. 회사는 익명신고 내용을 전직원에 공유했다. 내가 그 신고자였다면 나는 회사를 정말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직장 내 괴롭힘의 경우 신고자가 특정되지 않도록 유의해서 처리해야 한다. 누구인지 추측되거나 의심되지 않도록 처리할 의무가 있다. 소문대로면 피해자가 그럼 나라는 건데 피해자를 보호하진 못할 망정 임원실에 불러대면서 총알받이를 시키고, 신고내용을 공유해? 구멍가게도 아니고. 근데 진짜 내가 아니니 나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랐다. 지금에서야 돌이켜보면 이거야말로 직장 내 괴롭힘이다 싶다. 하지만 그땐 내가 모르는 뭔가가 벌어지고 있었고, 신고자가 진짜 누군지 판별하기 어려웠고,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당하고 있는데 진짜 신고자는 마음이 얼마나 불편했겠는가.


그리고 그날 회식이 있었고, 떠올리고 싶지 않다. 매우 불쾌했다.

왜 사람들이 악플로 자살하는지 알것 같았다. 악플 테러를 맨얼굴에 당한 기분이었다.


그 다음날부터 어지럼증이 시작되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데 세상이 왼쪽으로 시계바늘처럼 돌기 시작했다. 왜이러지. 피곤해서 그런가.

스트레스 때문인가. 나는 차를 얼른 탔다. 시계를 보니 아직 출근 시간은 넉넉히 남아있었다. 심호흡을 하면서 출발하지 않고 기다렸다. 도저히 운전할 자신이 없었다. 30분이 지나자 조금 진정이 되었다. 출근을 했고,

가슴답답한 뭔가를 느꼈지만 언제나 그랬듯 그냥 일을 하고 퇴근을 했다.


가슴속에 불이 붙은 느낌 아는가. 문자 그대로 열불이 터졌다.


안그래도 힘들어 죽겠는데 갑자기 얼굴도 안 보이는 누가 와서 뺨을 세게 후려갈긴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잠이 안 왔다. 대체 뭐가 문제지? 부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생각을 계속해서 하고 있으면 그 끝엔 정말 안좋은 생각이 들었다. 안되겠다 싶어서 집 주변 정신과를 찾아봤다. 생각보다 예약이 꽉 차 있었고 빠른 시일 내에 진료를 받기가 어려웠다. 며칠을 좀 기다려서 예약일이 됐다.


처음 가보는 정신과인지라 좀 어색했다. 고요한 병원 안에는 커다란 모니터가 있었고 클래식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프런트에 아무도 없었다. 나는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불안해서 아무도 없는 대기실을 계속 왔다갔다 거리고 있었다. 한 10분쯤? 지나니 접수원이 자리에 왔다. 차분히 필요한 검사지를 내주고 설명을 해줬다.


검사지에는 요즘 느끼는 기분이나 신체증상 등에 대해서 계량척도로 적게 되어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30분

동안 작성하고, 팔목과 발목 등에 집게를 집어서 하는 검사를 마치고 기다렸다. 1시간만에 나는 비로소 의사를 만날 수 있었다.


의사선생님은 젊은 여자분이셨다. 서류를 살펴보더니 증상과 스트레스 받은 일들을 물어보셨다.

나는 하나씩 설명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좀 산만하게 이것저것 말했던 것 같다. 의사선생님은 차분하게 들어주면서 기록지에 기록을 했고, 몇마디를 덧붙였다.


"그런데요, 앨리스님은 뭘 잘못한 거죠?"


"그러게요. 저 뭘 잘못한 걸까요? 저한테 성격적인 문제가 있나요? 저 왜 힘들죠?"


"문제는 그 사람들한테 있어요. 정신과는 그런 인간들이 와야하는데 꼭 피해자가 온다니까요.

나쁜 사람들이예요. 그리고 당당하게 얘기하세요. 누군데요? 제 얘기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저한테 그러지 말고 저 상사한테 직접 물어보세요! 니 짓이냐고. 아니죠? 그럼 답 나왔네! 그렇게요."


조용하고 차분해 보이던 작은 체구에서 카리스마가 뿜어져 나왔다.


"앨리스님 회사는 특성 상 직분위기 자체가 심심 가능성이 높아보여요. 특히 코로나 때문에 갑갑하기도 하죠. 그럴 때 물고 뜯을 게 필요한데 앨리스님이 딱 걸린 거예요. 물고 뜯기 좋은 주제죠. 그리고 실제로 답도 없잖아요? 그리고, 가해자로 지목된 상사도 곤란했을 거예요. 또 누가 신고한지 모르니까 앨리스님 부서의 다른 사람들도 의심받기 쉬운 상황이잖아요? 사람들은 곤란하면 공격하기 쉬운 대상을 타깃으로 삼아 자신을 방어하죠. 그게 딱 앨리스님이예요."


정확한 워딩은 솔직히 오래되어 기억이 잘 안나지만 이런 얘기가 오고갔다. 한마디로 나는 호구였다.

화가 더 났다. 하지만 반박할 수 없었다. 왠지 시원하기도 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앨리스님은 잘못한 게 없단 거예요."


그렇다. 내가 도대체 잘못한 게 뭔가. 적어도 이 사건에 있어서 내가 잘못한 건 없었다. 그런데 나는 왜 나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고 있었던 거지? 내 성격이 이상한가? 내가 사람들한테 미움받은 짓을 했었나? 이러고 있었다.




괴롭히는 것을 정당화하는 이유는 없다. 그리고 백번 양보해서 내게도 뭔가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어른의 세계에선 어른답게 소통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십수년간 사회생활을 했던 결과 사회인의 세계라고 해서 아이들의 세계와 다를 바가 없다. 내 업무태도나 조직 내에서의 인간관계, 업무수행능력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에 대해서 지적받을 수 있고 나는 개선할 의무가 있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서로 살아남기 위해 조직에서 벌이는 눈치게임, 정치놀음에서 희생양이 된 거라면 그 책임은 조직과 조직원에 있지 내게 있지 않다. 이 사실을 정확히 인지하기까지 반년정도의 정신과 진료가 필요했다. 말로는 하는데 마음으로 받아들이기까지, 안정되기까지 오래 걸렸다.

회사? 조직? 애들 놀음이랑 다를 바가 별로 없다. 여기서 옳고 그름은 그다지 크게 중요하지도 잘 작동하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괴롭힘의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보다 중요한 건 따로있다. 상처를 받았다면 상처를 치유하는 것. 치유하기 위해 필요한 게 무엇이 되더라도 당당하게 할 것. 필요하다면 벗어나라. 내가 죽는 것보단 백번 낫다. 휴직을 할 수 있다면 그것도 활용해라. 최소한 회복될 때까지는 실직없이 나를 돌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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