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사람에게 받은 짧은 답장
세상을 향해 내미는 따뜻한 손 같은 글을 쓰고 싶다
"좋은 시나리오가 갖출 것은 무엇이라 생각하세요?"
"공감이라는 미덕이요."
그 짧은 답변에 마음이 활짝 웃었다.
실로 오랜만에 누군가에게 편지를 썼고 놀랍게도 몇시간만에 답장을 받았다.
몇가지의 질문에 대한 매우 짧은 답변이었으나 이상하게도 그 답변들은 하나같이 마음을 때렸다.
답을 준 사람의 적지않은 내공이 느껴졌고 기대하지 않았기에 감흥이 컸다.
글을 쓰고싶다는 마음을 가지고 본격적으로 혼자 쓰기 시작한 지 약 4개월 만이다.
처음에는 내가 힘들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을 쓰다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타인도, 나 자신도 조금은 이해가 되고 공감되는 부분이 생겨났다. 아, 상대방은 이런 감정(생각) 일 수도 있겠구나. 상대방의 입장에서도 써봤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다니는 회사의 면접에서 어떤 임원이 질문했다. "상사가 만약에 부당한 지시를 내린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답은 정해져 있었다. 부당함을 어필하고 그래도 시키면 절차에 따라 처리하지 않는 방법을 택한다는
요지의 답변이겠지. 나는 그때 그런 정석의 답변 따위는 훈련되지 않았고 그대로 답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 내가 한 답변은 "제가 모르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다시한번 여쭙겠습니다." 였다.
그리고 훗날 내 답변에 대한 면접점수를 보게 되었는데 그 부분이 가장 낮게 매겨져 있었다.
일의 영역에서 그런 태도는 올바르지 않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삶의 영역에서는 어떨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고 알게되면 이해 안될 일도 없는 것이 세상사라고도 했다. 그래서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나이를 먹게 되면 조금 더 포용력도 생기고 불끈 하게 되는 일도 줄어든다고. 실제 일을 하면서 부딪히는 조직에서의 일상은 사실 부당함을 반항하기도 어렵고 절차대로 처리해도
손가락질 받기 십상이다. 그렇다고 부당한 일을 다 해서도 안 되겠지만 말이다. 인간적인 이해와 부당함을 바로잡는 그 중간선 어딘가를 잘 타며 처세해야만 한다. 그런 건 누가 알려주지도 않는다. 정답이 없다.
그런 세상을 여러 사람이 살고 있다. 그 중에, 드라마나 영화를 안 보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들이 왜 드라마나 영화를 볼까. 위로받으려고. 공감하려고 본다. 인간들은 외롭다. 다양하게 생겨먹어서 이해받지 못해 고독하다. 누군가 옆에 있다 해도 마찬가지다. 그저 방구석에 처박혀 혼자 글을 쓴다면 작자의 자기만족으로만 끝나면 될 일이지만, 누군가에게 읽히거나 작품으로 만들어지길 원한다면 "읽고싶은" 글이어야 한다. 그 당연하고도 기본적인 것을 잊고있었다.
나에게 답을 준 이는 업계에서 오래 일한 아주 유명한 베테랑이다. 그가 유명하기 때문에 저 말에 꽂힌 것이 아니다. 저 말이 안갯속에 있는 나의 손을 꼭 잡아준 것 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좋은 글이란 저런 느낌일 것이다. 쓴 이가 읽는 이의 손을 꼭 잡은 것같은 그런 느낌. 내가 그림을 좋아하기 시작한 것도 그림이 주는 그런 느낌 때문이었다. 뭐라 콕 집어 말할 수 없었던 내 맘속에 박혀있던 가시를 쑥 빼주는 그런 느낌.
그러면서도 그는 공감이요, 라고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그저 "미덕"이라고 말했다. 꼭 공감을 자아내지 않더라도 좋은 글은 있을 수 있다는 여백을 남겨둔 저 단어가 참 단정하면서도 유연하게 느껴졌다.
그러면서 한 드라마 작가님의 작품이 떠올랐다. "또 오해영" "나의 해방일지" "나의 아저씨"를 쓴 그분, 박해영 작가님이다. 그분의 작품이 좋은 건 하나같이 평범한(때론 보잘것 없이 찌질한 우리들을 닮은) 주인공들이 일상을 영위하며 겪거나 꿈꿨던 작은 특별함을 그리기 때문이다. 그 작은 특별함은 판타지적 요소를 지니긴 하되 보통의 인간이라면 막연히 바랬던, 한번도 끄집어내본적 없는 그 어떤 것들이다. 보잘것 없는 나 자신이지만 누구에게나 자신은 "애틋" 하고, 사랑받길 원하지만 그보다 더 강력하게 "추앙"받아보는 삶이길 한번쯤은 바란다. 우리들이 입밖으로는 꺼내지 못할 말들을 작가는 우리처럼 평범한 주인공의 입을 빌어 그렇게 말한다. 평범함 속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그런 작가님이라고 나는 생각했고 그분의 작품을 다시 볼 생각이다.
나는 어떤 사람이길 바라는지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오랫동안 고민했다. 나는 이기적이다. 나는 개인주의자다. 나는 어설프게 착하며 또 착하지 않다. 누군가에겐 상처를 입으면서 또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며 살았다. 하지만 세상에 조금은 쓸모가 있는 존재가 되길 원한다. 그 쓸모란 누군가를 위로하고 공감하며 누군가의 삶에 크고 작은 좋은 변화를 일으키는 촉매제 같은 역할이다. 그런 역할을 하는 나만의 방법은 좋은 글을 쓰는 것이다.
내게 답장을 준 이에게 조금 더 성장하면 꼭 어떤 방식으로든 이 고마움을 갚고 싶다. 그야말로 공감의 미덕을 아주 짧은 글로 내게 직접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아주 오랜만에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보게 되었다. 잃었던인류애를 조금은 회복한 기분이 든다. 아무 이해득실도 없는 내게 그가 내민 손처럼, 나도 언젠간 글로서 상처받은 구석이 조금씩은 있을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