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딪혀봐야 알게 되는 것들
내가 되게 일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시기가 있었다. 입사하고 한 2년쯤 지났을 때였나, 대리-과장급 시절에. 진짜 열심히 하기도 했고, 업무량도 많았고, 결과도 좋았다. 야근은 물론 종종 밤샘도 해야 했지만 그건 그것대로 괜찮았던 것 같다. 일이 그만큼 잘 되는 게 또 재미있었고 보람찼으니까.
그렇게 얼마큼의 시간이 지나고 보니 개개인의 성과나 역량은 크게 인정해주지 않으면서 맡은 바를 빨리 끝냈다며 일만 더 얹어주기도 하고, 효율적인 시간 관리와 직원 관리를 못하는 상사가 못마땅했고, 프로젝트에 대한 디렉션을 제대로 해주지 않아 불만이었으며, 수도 없이 알려주고 가르치고 혼을 내도 기어이 같은 실수를 연발하며 성장하고자, 배우고자 하는 열의도 없는 후배가 답답하다고 느꼈다. 가장 크게는 내가 하고 있었던 다양하고도 많은 일에 견주면 연봉은 적은 느낌이어서 늘 불만스러웠다.
거기서 멈췄더라면 자만이 됐겠지만 그때 다행스럽게도 바로 곁에 바른말을 해주고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선배가 계셨다. 너무나도 젊은 나이에 이미 세상을 떠나셨지만, 그 선배가 옆에 없었더라면 아마 나는 더 기고만장했을 것 같다. 물론 대놓고 너 이렇게 하지 마, 그러셨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나이 차이도 많이 나는 까마득한 후배도 항상 어른으로 대해 주시고 인내하고 끝까지 모두를 인격적으로 대우해주신 진짜 어른이었다. 나는 그녀의 그런 면을 가장 크게 샀다.
그렇게 좋은 조언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속 깊은 곳은 여러 가지 불만과 짜증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나의 그 다소 오만했던 생각이 부서지게 된 가장 크고 확실한 계기는 역시 승진이 아니었을까 싶다.
처음에는 '오히려 좋아!' 마인드였다. 진심으로 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었다. 이번 기회에 좀 더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가자, 차츰 바꾸어 가야겠다는 도전 의식도 생겼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런 다짐과 열정은 현실의 벽 앞에 아주 빠르게 사라져 갔다.
항상 하던 일들이었는데도 내가 직접 처리해야 할 업무량 자체부터 많아졌다. 후배들 업무까지 세세히 봐가면서 하려니 소요되는 시간이 서너 배가 되었다. 매일매일 말 그대로 '폭풍 업무'가 휘몰아쳤다. 매달 실적 보고에, 직원 교육, 관리 업무까지 주어졌다. 실수나 잘못은 결국 나의 책임으로 이어지기에 멘탈도 매사 예민하고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어제와 똑같은 나인데 어느 날 갑자기 아예 다른 기준과 잣대로 평가를 받는 입장이 된 것. 단순하게 시키는 업무 또는 거기서 플러스 알파로 조금만 더 알아서 잘해도 크게 인정받을 수 있는 실무자의 입장에서 준비 과정 일절 없이 언제나 큰 숲을 보고 전체와 상세를 조율하며 일정에 맞춰 이끌어가야 하는 관리자가 된 것이다. 완전히 다른 스킬과 마인드셋을 필요로 하는데 어디에 물어볼 수도, 보고 배울 선배도, 힘들다고 붙들고 하소연 할 상대도 없었다.
모든 공을 쥐고 저글링 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내가 좀 안다고 착각했던 시각이야말로 지극히 주관적이고도 편협한 것이었다. 역시 사람은 본인이 직접 경험하고 부딪혀봐야 비로소 누군가의 입장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당연한 이치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실은 그래서 더 힘들었던 것 같다. 스스로 리더급에 대해 충족시킬 수 없을 만큼의 기대치만 잔뜩 높여놓은 셈이니까. 선배들의 전철을 밟고 싶지 않았다. 나는 ㅇㅇ선배의 ㅁㅁ한 행동을 반면교사 삼아 절대로 그러지 말아야지, 생각했지만 은연중에 내가 혹시나 그러고 있을까 봐 괜히 조심스러운 부분도 많았던 것 같다. 지나치게 자기 자신의 언행을 검열하느라 급급했던 대신 좀 더 나 자신을 믿고 밀고 나갔더라면 어땠을까 싶은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물론 그러기엔 내가 너무 번아웃 상태였기에 시도조차 할 수 없었지만.
요 며칠 옛날 사진을 뒤적대다 회사에서 일하다 찍은 화면의 스크린샷이나 일의 회고, 야근 중에 툭툭 찍어 남긴 회사 책상 풍경 같은 게 꽤나 남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말은 늘 하기 싫다고, 힘들다고, 죽겠다고, 그만두고 싶다고 하면서도 늘 그렇듯 진심이 되어서 맡은 일은 열심히 했나 보다.
아니, 사실은 일이 좋았고, 일을 하는 나 자신이 좋았으며, 맡은 일이 잘 되어가는 것을 보는 게 뿌듯했다. 또 그만큼 능력 있는 직원으로 인정받고 싶었던 것 같다. 물론 그 시절 일이란 내 삶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시간적으로도 참 회사와 일에 얽매여 살기도 했고….
이 정도 힘든 것은 힘든 것도 아니라며 당연한 거라 여기며 더 빨리, 더 많이, 더 잘하라고 스스로 볶아칠 줄만 알았지, 잘했다고 칭찬을 해준다거나 토닥일 줄 몰랐었던 것 같다. 이제는 그 시절의 나에게 꼭 한 마디 해주고 싶다. 참 수고 많았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