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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에서 무전유죄를 외치는 조선시대 직장인

by 재밋

전시나 박물관에 가서 작품을 보면서 사람 사는 거 다 똑같다고 느낄 때가 있다. 몇백 년 전 사람이든, 다른 나라 사람이든 생각과 행동이 나와 내 주변 사람과 비슷하다는 걸 알았을 때 드는 묘한 안정감. 그걸 느끼는 순간이 재밌다.


얼마 전 국립중앙박물관에 다녀왔다. 그동안 여러 번 봤던 도자기 전시 공간이었는데, 이번에 도자기 사이에 있는 짧은 시가 처음으로 눈에 들어왔다.


이하곤이라는 조선시대 문인이 경기도 광주의 그릇을 만드는 분원에 20여 일 머물면서, 무료한 중에 두보의 시를 본뜨고 우리말을 섞어 장난삼아 지은 시였다.



<분원에 20여 일 머물면서, 무료한 중에 두보의 시를 본뜨고 우리말을 섞어 장난삼아 지은 일곱 수 중 세번째>, 《두타초》 이하곤, 국립중앙박물관



도공의 그릇 만드는 일이 얼마나 고된지 그대로 전해지고, 하루 종일 열심히 그릇을 만들어도 퇴짜 맞는 그릇을 보며 한숨부터 나오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분원에 20여 일 머물면서, 무료한 중에 두보의 시를 본뜨고 우리말을 섞어 장난삼아 지은 일곱 수 중 다섯 번째>, 《두타초》, 이하곤, 국립중앙박물관



그릇이 얼마나 정밀하고 색과 모양이 잘 나왔는지 검토할 필요 없이 도공으로서 정체성은 다 무너지고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지'란 생각과 함께 영혼 없이 수많은 뇌물용 그릇을 만드는 도공의 모습이 그려졌다.


시 몇 줄 읽고 장면이 뚜렷하게 그려지는 건 그만큼 시를 잘 지어서 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비슷한 경험을 보고, 듣고, 직접 해봤기 때문일 것이다.


디자이너로 일할 때 뇌물을 위한 작업은 아니었지만, 컨펌을 위해 기본적으로 여러 개의 시안을 작업해 여러 번 수정했던 경험이 떠올랐다. 수정 작업하면서 판매율을 높이는데 적합한 시안을 위한 수정이 아니라, 최종 컨펌자의 개인적인 취향과 기분을 맞추기 위한 작업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이렇게 시를 통해 자연스럽게 나의 경험을 떠올렸다.


공감의 힘이란 참 대단하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의 이야기에 공감한다는 이유만으로도 스마트폰 잠금을 풀고 사진을 찍어 글까지 쓰게 만들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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