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만에 다시 선 춘천의 출발선
2012년 6월, 회사 마라톤 동우회의 문을 두드렸다.
사실 가입을 결심한 명확한 이유는 없었다. "기록 향상을 위해선 이제 혼자 뛰면 안 된다"는 주변의 조언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홀로 달리는 고독함이 한계에 다다른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은 마음이었는지 지금도 분명치 않다.
동우회 게시판에 짤막한 가입 인사를 올리자 환영 댓글이 달렸다. 그중 유독 내 마음을 흔든 문구가 있었다.
"가을의 전설."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단어였다. 2001년과 2002년, 그리고 2005년, 나는 춘천을 찾았고 그때마다 단풍에 물든 의암호가 나를 반겨주었다. 4시간의 벽(Sub-4)을 넘기 위해 숨 가쁘게 달렸고, 일 년에 열 차례가 넘는 대회를 소화할 만큼 달리기에 진심이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2005년 이후, 내 인생에서 풀코스는 자취를 감췄다. 어느덧 7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있었다. 그렇게 나는 다시 춘천마라톤 참가 신청 버튼을 눌렀다. 회사 유니폼을 입고 달리는 첫 번째 대회가 될 터였다. "삶의 밸런스를 잘 잡아가며 준비해 보자." 일기에 그렇게 다짐을 적었지만, 사실 내가 다시 춘천의 출발선에 서게 될 줄은 나조차 몰랐다.
지난 7년, 달리기를 쉬는 동안에도 내 몸은 쉬지 않았다. 2009년 1월부터는 아침 수영을 시작하며 물의 흐름을 익혔고, 2010년에는 MTB를 구입해 본격적으로 페달을 밟았다. 그 노력은 2012년에 결실을 맺었다. 4월 대구철인3종대회에서 첫 출전을 마쳤고, 6월 삼척 하프 대회를 거쳐 마침내 신안대회에서 아이언맨 코스를 완주해 냈다. 본격적으로 철인3종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철인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바탕에는 과거 뜨겁게 달렸던 마라톤의 경험이 든든한 베이스가 되어 주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7년 만에 다시 마주한 춘천은 그 어느 때보다 가혹했다. 수영과 자전거가 더해진 기초 체력 덕분에 예전보다 훨씬 많은 운동량을 소화해 왔음에도, 마라톤 풀코스만을 위한 특화된 훈련 부족과 예기치 못한 컨디션 난조는 나를 당황케 했다.
2012년 10월 27일 토요일, 회사 동우회에서 대절한 버스에 올랐다. 혼자서 대회를 다닐 때는 이동부터 숙소 예약까지 모든 게 숙제였는데, 동료들과 함께하니 그저 몸을 맡기기만 하면 되어 참 편안했다. 약간은 들뜬 분위기 속에서 저녁을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다행히 잠자리는 편안했다.
이튿날 아침, 춘천의 가을은 변함없이 아름다웠다. 2만 5천 명의 건각들이 모인 광장. 엘리트 선수들이 먼저 출발하고, 나는 30분 뒤에 출발하는 조에서 내 차례를 기다렸다. 출발 신호를 기다리며 가슴속으로 나직이 읊조렸다.
'7년 만이구나.'
출발 총성과 함께 흐름에 몸을 맡겼다. 주변의 페이스에 맞춰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고비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겨우 5km 지점이었다. 갑자기 호흡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심장 박동수가 급격히 치솟으며 호흡의 리듬이 깨지는 현상. 속도를 최대한 늦추며 가다듬으려 애썼지만, 앞으로 나가려는 의지와 따라주지 않는 호흡 사이에서 밸런스는 이미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20km 지점까지는 몸이 너무 무거워 '만약 조금의 틈이라도 있었다면 포기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25km를 지나서야 호흡이 조금씩 안정을 찾았다. 나는 '35km까지는 절대로 걷지 않는다'는 나만의 원칙이 있다. 한 번 걷기 시작하면 남은 거리를 '걷다 뛰다'의 지옥 같은 반복으로 채워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는 자신과의 지루한 협상 시간이었다. 32km를 지나 보폭을 반으로 줄이고 자세를 가다듬으며 묵묵히 전진했다.
40km, 41km 이정표를 지날 때까지, 지금까지 포기하지 않은 나를 생각하며 마침내 결승선을 통과했다. 기록은 5시간 25분 4초. 내 인생에서 가장 느린 풀코스 기록이었다.
대회를 마친 뒤, 동료들과 함께 춘천닭갈비로 든든히 배를 채웠다. 고생 끝에 맛보는 매콤한 달콤함이 온몸으로 퍼졌다. 다시 대절 버스에 몸을 싣고 귀가하는 길, 창밖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달리면 생각이 단순해진다. 이번 대회 내내 머릿속을 맴돈 생각은 단 하나였다. '왜 이렇게 안 나가지?' 역시 연습하지 않으면 이렇게 되는구나! 7년 만에 뛴 풀코스는 나에게 '최장 기록'이라는 선물을 주었다. 열정을 가지고 많이 뛰는 수밖에 없음을 잘 안다. 즐기면서 다시 이전과 같이 한번 해보자.
7년 전보다 1시간 넘게 늦춰진 기록에 사실 조금 실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7년 만에 다시 42.195km를 완주했다는 사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몸은 비명을 질렀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2005년의 춘천 이후 7년 동안 참 많은 것이 변했다. 학위를 마쳤고, 철인이 되었으며, 아들 민승이는 어느덧 중학생이 되었다. 비록 기록은 형편없었고 준비는 부족했지만, 춘천의 가을바람과 메달의 무게는 7년 전 그때와 다를 바 없었다.
7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었다. 42.195km를 완주한다는 것이 나에게 여전히 가슴 벅찬 의미를 준다는 사실이다. 느려도 괜찮고, 준비가 조금 서툴러도 괜찮다. 중요한 건 내가 여전히 달리고 있다는 것, 그리고 끝내 마침표를 찍었다는 사실이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깊은 잠에 들었다. 7년 만에 맛본 '가을의 전설'의 달콤한 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