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승이가 커가는 시간
마라톤은 흔히 자신과의 싸움이자 기록을 향한 고독한 질주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에게 달리기는 조금 다른 의미였다. 네 살배기 아들을 업고 출발선에 섰던 그날부터, 어느덧 훌쩍 커버린 고등학생 아들과 나란히 숨을 몰아쉬며 결승선을 통과하기까지, 우리 부자의 레이스는 단순한 운동이 아닌 서로의 성장을 지켜보고 온기를 나누는 가장 정직한 대화였다. 기록이라는 숫자 너머에 새겨진, 14년이라는 시간의 동행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2000년 12월의 그날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진주시민마라톤대회 5km 코스, 고작 네 살이었던 민승이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운동화 끈을 만지작거리며 출발선에 서 있던 모습 말이다. 500m도 채 가지 않아 내 등을 두드리며 업어달라던 아이의 보채는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다. 업혔다 내리기를 수없이 반복하며 겨우 완주했던 그날, '함께 달리는 기쁨'이라는 더 큰 가치를 가슴에 새겼다. 운동이란 그저 나 자신을 이기고 벼리는 고독한 과정인 줄로만 알았던 나에게, 달리기는 때로 나만의 걸음을 멈추고 곁에 있는 가족의 손을 잡는 것이 무엇보다 위대한 기록이 될 수 있음을 가르쳐 주던 순간이었다.
그해 겨울이 지나고 반년쯤 흘렀을까. 2001년 6월, 제주의 푸른 바닷바람을 맞으며 다시 하프마라톤 출발선에 섰다. 결승점을 불과 100m 앞두고 나를 기다리다 달려와 내 손을 꼭 맞잡던 다섯 살 아들의 온기가 지금도 손끝에 선연하다. 업무에 치이고 연습도 부족했던 데다, 설상가상으로 안경까지 부러져 흐릿한 시야 속을 헤맸지만, 아들의 손을 잡는 순간 마라톤의 고통은 씻은 듯 사라졌다. 기록이라는 숫자보다 내게 더 절실했던 건 아들과 함께하는 그 짧지만 강렬한 '피날레 이벤트'였다. 제주의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우리는 가족만이 나눌 수 있는 단단한 추억을 새겼다. 그날 밤, 곤히 잠든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막연한 꿈을 꾸었다. 언젠가는 업고 업히는 게 아니라 정말로 나란히 발을 맞춰 달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그리고 막내 민정이까지 우리 가족 모두가 그 주로 위에 함께 서게 될 그날을 소망했다.
그 꿈이 현실이 되기까지는 다시 10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2011년 11월, 제11회 창원통일마라톤대회를 앞둔 어느 아침이었다. 식탁에 마주 앉은 중학생 민승이에게 넌지시 물었다.
"이번 창원통일마라톤대회, 10km 한번 뛰어볼래?"
민승이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사춘기에 접어든 녀석답게 별다른 말은 없었지만, 그 무심한 긍정만으로도 내 마음은 이미 벅차올랐다. 거절하지 않았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대회 당일은 제법 쌀쌀한 공기가 감도는 아침이었다. 민승이에게는 생애 첫 10km 도전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걱정보다는 기분 좋은 설렘이 앞섰다. 어린 시절부터 아빠를 따라 많은 대회장을 누볐으니 그 풍경이 녀석에게도 그리 낯설지는 않으리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새로 산 러닝화를 신고 유니폼을 챙겨 입은 아들의 뒷모습을 보며 새삼 세월의 무게를 실감했다.
드디어 출발선에 섰을 때, 나는 말로 설명하기 힘든 뭉클함에 휩싸였다. 녀석은 이제 더 이상 내 등에 업히려 하지 않았다. 내 어깨높이만큼 훌쩍 커버린 아들이 오롯이 자신의 두 발로 땅을 딛고 내 곁에 서 있었다. 우리는 마침내, 나란히 섰다.
출발 신호가 울렸다. 처음 3km는 천천히 함께 달렸다.
"초반에 너무 빨리 뛰면 안 돼. 천천히 가야 끝까지 뛸 수 있어."
오르막 길에서는 보폭을 줄이고 상체를 조금 앞으로 숙이라고 알려줬다. 민승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을 따라 했다. 4km 지점을 지나면서 민승이가 몇 걸음씩 나보다 앞서 가기 시작했다.
"편하게 네 페이스대로 뛰어."
아빠와 다르게 아들은 가볍게 잘 뛰어나갔다. 뒤에서 그 모습을 보며 가슴이 벅찼다.
'저 녀석이 벌써 이렇게 컸구나.'
10km가 그리 멀지 않았다. 어린 시절 내 등에 업혔던 아이가 이제는 혼자 10km를 달렸다. 결승선을 통과할 때 민승이는 힘들어했지만, 끝까지 최선을 다해 뛰었다.
"잘했어, 민승아. 정말 장하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땀을 흘리는 아들의 목에 완주 메달을 걸어주며, 나는 훌쩍 커버린 녀석의 머리를 듬직하게 쓰다듬었다. 민승이는 숨을 턱 끝까지 차오르면서도 나를 보며 씩 웃어 보였다. 그날 밤, 나는 벅찬 가슴을 누르며 블로그에 이런 글을 남겼다.
'다만 처음 뛰는 아들 옆에서 끝까지 리드해 주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평생 기억해야 할 소중한 추억을 만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아쉬움조차 레이스의 일부였다. 기억해야 할 추억, 그것이야말로 내가 아들과 함께 주로에 서는 가장 큰 이유였으니까.
이듬해인 2012년 4월 15일, 제8회 경남창원야철마라톤대회에서 민승이와 두 번째 동반주를 했다. 지난 대회에서 리드해주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듯, 이번에는 내가 앞장서서 민승이를 이끌었다. 결승점에 다다를수록 민승이도 힘을 내어 속도를 높였고, 우리는 나란히 결승점을 밟았다. 함께 호흡을 맞추며 달리는 즐거움이 조금씩 쌓여가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몇 달 뒤인 2012년 11월 18일, 제12회 창원통일마라톤대회에서 민승이는 하프 코스에 도전했다. 녀석이 생애 첫 하프마라톤 완주를 일궈낸 날이었다. 참가신청을 해놓고 정말 뛸 건가 긴가민가 했는데, 완주를 해냈다.
그날은 시작부터 좋은 분위기가 아니었다. 9시부터 풀 코스 출발인데 나도 늦잠을 잤고, 민승이는 8시가 넘어서야 겨우 눈을 떴다. 집 앞이 바로 운동장이라 이동 시간이 짧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자는 민승이를 깨워 물으니 안 뛴다고 손사래를 쳤다. 나도 그냥 자라고 했다. 대회 준비를 따로 한 것도 아닌 데다 전날 친구들과 축구 시합까지 했으니 무리시킬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내는 단호했다. 기어이 민승이를 침대에서 일으켜 세우며 얼른 뛰러 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출발 20여분 전에 도착해서 뛸 준비를 했다. 배번도 붙이고 바셀린도 바르고. 늦은 탓에 마음이 좀 바빴다. 출발점에 서서 은근히 걱정되었다. 이 녀석이 10km는 두 번 뛰어 봤지만, 하프는 그것의 단순 두 배가 아니기 때문이다. 뛰기 전에 일단 15km까지는 걷지 말자고 했다. 내가 하프 뛸 때 늘 하는 것처럼. 그렇게만 하면 아무리 컨디션이 좋지 않아도 내 경험상으로는 완주에는 별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출발 선상에서 반가운 지인들과 짧은 인사를 나누고 나니, 곧이어 풀 코스 주자들에 이어 하프 코스의 출발 신호가 웅장하게 울렸다. 날씨도 적당히 선선했고 내 컨디션도 꽤 괜찮았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초반 km당 6분 페이스로 가볍게 발을 뗐다. 나란히 달리며 민승이에게 호흡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세는 어떻게 유지해야 하는지 차근차근 일러주었다. 그렇게 3km쯤 달렸을 때였을까. 전날 자전거 국토종주를 마치고 오셨다는 이 원장님이 주로를 걷고 계신 모습이 보였다. 다리도 풀 겸 10km만 뛰실 거라던 그분이 민승이를 보더니 부자가 참 폼나게 달린다며 기분 좋은 덕담을 건네주셨다. 그 칭찬 한마디에 내 어깨가 괜히 으쓱해지던 그 순간의 공기가 아직도 생생하다.
2.5km마다 늘어선 급수대에서 물을 마시고, 자원봉사하는 학생들의 활기찬 응원을 등에 업으며 우리는 묵묵히 나아갔다. 10km 지점에 다다랐을 때 시계를 보니 아직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은, 첫 도전치고는 꽤 괜찮은 페이스였다. 하지만 안심도 잠시, 어느덧 민승이의 호흡이 조금씩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발목까지 아프다며 얼굴을 찡그리는 아들을 보며, 나는 마라톤을 하다 보면 누구나 한 번은 겪는 고비일 뿐이라며 녀석을 다독였다. 조금만 더 버티면 파스를 뿌려주는 곳이 나올 테니 거기서 다시 힘을 내보자고, 내 경험을 빌려 아들의 의지를 붙들었다. 그렇게 가쁜 숨을 몰아쉬며 도착한 15km 지점. 준비된 바나나와 초코파이로 허기를 달래고, 뭉친 다리 근육도 풀 겸 우리는 잠시 속도를 늦춰 함께 걸었다.
하지만 아들은 내심 15km 지점만을 유일한 목표로 삼고 버텼던 탓이었을까. 그 고비를 넘기기가 무섭게 민승이는 자꾸만 걸음을 늦추려 했다. 그때마다 나는 걷는 거나 뛰는 거나 힘든 건 매한가지라며, 조금만 더 기운을 내보자고 녀석을 다독였다. 허리를 곧게 펴고 호흡을 길게 가져가라는 조언도 잊지 않았다. 지칠 대로 지친 민승이는 남은 거리가 얼마나 되느냐고 수시로 물어왔다. 어느덧 18km 지점. 사실 그때부턴 걸어가도 충분히 완주할 수 있는 거리였지만, 민승이는 이번엔 배까지 아프다며 귀여운 엄살을 부리기 시작했다.
"아빠, 이제 절대로 하프는 안 뛴다니까! 뛸 거면 그냥 10km만 뛸래."
녀석의 투정 섞인 외침이 어찌나 우스우면서도 대견하던지, 나는 웃음 섞인 손길로 엉덩이를 찰싹 때려주었다. 그러고는 다시 천천히, 아들의 보폭에 맞춰 계속 뛰었다.
이제 마지막 고비인 충혼탑 고개만 넘으면 끝이었다. 슬쩍 민승이의 눈치를 보니 당장이라도 멈춰 서서 걸어갈 기세였다. 나는 저 언덕을 끝까지 뛰어넘어야 진정한 마라토너가 되는 거라고 녀석을 부추겼다. 대신 언덕 입구까지만 잠시 숨을 고르며 걷자고 타협안을 제시했다. 전략이 통했는지 우리는 고갯마루까지 멈추지 않고 달려 나갔다. 운동장 진입로에 들어서자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달리는 자세를 점검했다. 결승점의 기념사진은 무엇보다 멋지게 남겨야 했으니까. 운동장 입구에서 아내가 폰 카메라를 들고 우리 부자를 찍었다. 잠시 멈춰 서서 포즈를 취하고, 제대로 한 장 더 찍은 뒤 남은 트랙을 달렸다. 마침내 우리는 두 손을 번쩍 맞잡고, 그 어느 때보다 당당하고 멋있게 결승선을 통과했다.
생애 첫 하프 완주치고는 큰 무리 없이 정말 잘 해냈다. 뭉친 다리를 풀어주려 스트레칭을 시키고, 간식을 챙겨 먹인 뒤 민승이의 목에 묵직한 완주메달을 걸어주었다. 기념사진까지 몇 장 더 남기는 것으로 아들의 첫 하프 완주 이벤트를 기분 좋게 마무리했다. 고등학생이 되기 전, 아빠와 함께 땀 흘리며 달린 이 시간이 아들에게도 평생 잊지 못할 귀한 추억이 되었기를 소망했다. 사랑한다, 아들!
그날 밤, 나는 블로그에 못다 한 속마음을 적었다.
'다음엔 우리 딸도 한번 꼬셔볼까?'
하지만 아쉽게도 민정이와 함께 대회장을 누비는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것은 훗날을 기약해야 할 또 다른 이야기로 남겨두었다.
다시 2년의 세월이 흘러 2014년 11월 17일, 제14회 창원통일마라톤대회가 열렸다. 민승이와 함께하는 두 번째 하프 도전이었다. 개인적으로는 61번째 하프 완주이자, 창원통일마라톤에만 어느덧 13회째 참가하는 의미 깊은 날이기도 했다. 대회 참가신청을 앞두고 슬쩍 민승이의 의중을 물었다.
"민승아, 이번에도 하프 OK?"
"콜!!!"
기대 이상의 시원한 대답이 돌아왔다. 첫 하프를 뛰고 나서 다시는 하프를 뛰지 않겠다고 장담하던 녀석이었는데, 그새 힘든 기억은 잊고 달리는 맛을 알아버린 걸까. 사실 입시 공부에 매몰된 고등학생에게 운동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건 부모로서 늘 안타까운 일이었다. 혹여 무리가 되는 건 아닌지 잠시 고민도 됐지만, 지난 레이스에서 보여준 녀석의 끈기를 믿어보기로 했다.
대회 당일 아침, 아내가 정성껏 차려준 밥을 든든하게 먹었다. 잠이 덜 깬 눈을 비비며 제 책상 앞에 앉아 묵묵히 배번을 달고 있는 민승이의 뒷모습을 보니 대견함이 밀려왔다. 마라톤 장소인 운동장이 코앞이라 이동 시간에 쫓기지 않고 느긋하게 집을 나설 수 있었다. 경기장에 도착해 대회 복장으로 갈아입고, 나란히 서서 기념사진도 찍으며 가볍게 몸을 풀었다. 민승이는 달리면서 들을 노래를 휴대폰에 미리 내려받고 있었다. 나는 "나중엔 거추장스러워서 후회할 텐데"라며 농담 섞인 핀잔을 주었지만, 정작 나 역시 처음으로 휴대폰을 챙겼다. 앞으로도 같이 뛸 기회는 또 있겠지만, 고등학생 아들과 함께하는 이 소중한 동행의 순간들을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라톤 하는 신랑을 둔 덕분인지, 아내는 이제 베테랑 서포터가 다 되었다. 출발지에서 우리 부자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주더니, 어느새 우리가 달려올 주로 길목에 먼저 도착해 있었다. 아내를 발견하고 반갑게 손을 흔드니, 아내는 연신 셔터를 누르며 우리를 응원했다. 사실 내 상태는 그리 좋지 못했다. 일주일 전 진해마라톤에서 10km를 뛴 것을 빼면 제대로 된 연습조차 없었고, 술은 여전히 하루 걸러 하루꼴로 마셨다. 덕분에 그때 내가 민승이 보조를 맞추려 천천히 뛰고 있었던 건지, 아니면 정말 내 실력이 이것뿐이라 아들 뒤를 쫓아가고 있었던 건지 나조차 헷갈렸다. 물론, 냉정하게 따져보면 후자일 가능성이 훨씬 컸다.
민승이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뛰었기 때문에 옆에서 내가 하는 말을 바로 듣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이어폰을 빼 녀석에게 다시 물었다.
"뛸 만 해?"
옆에서 같이 뛰며 녀석의 숨소리나 자세를 봤을 때 그렇게 힘들지는 않은 것 같았다.
지난번 첫 하프 도전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민승이에게 15km까지는 절대 걷지 말자고 미리 엄포를 놓았다. 그건 적지 않은 레이스를 거치며 얻은 나만의 '마지노선'이었다. 15km까지만 어떻게든 버텨내면, 그 이후엔 설령 걷게 되더라도 육체적·심리적 고통이 훨씬 덜하다는 것을 몸소 체득했기 때문이다. 10km를 지나며 민승이의 속도가 조금씩 떨어지긴 했지만, 옆에서 지켜본 녀석의 자세는 아직 흐트러지지 않았다. 하지만 14km 지점을 통과할 무렵, 민승이가 발목 통증을 호소하며 파스를 찾았다. 15km 급수대에는 파스가 있을 거라는 희망 하나로 녀석을 다독이며 레이스를 이어갔건만, 막상 도착한 급수대 그 어디에도 파스는 보이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주로 곳곳에서 풍기는 진한 파스 냄새가 코를 찔러 오히려 방해가 되기도 했건만, 그날은 15km 지점에 이를 때까지 파스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아들의 발목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여 초조해진 나는 결국 진행 요원에게 짜증 섞인 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아니, 왜 파스가 없습니까!"
매번 자원봉사자들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임해왔지만, 고통스러워하는 아들의 모습에 그만 평정심을 잃었던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참 미안한 일이다.
16km 지점을 지날 무렵, 민승이는 결국 조금만 걸어가자고 했다. 나 역시 녀석의 등을 억지로 떠밀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는 서두르지 않고 걷기 시작했고, 나는 챙겨 온 휴대폰을 꺼내 아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달리면서 느끼는 심정이 어떤지 동영상 인터뷰도 시도했는데, 민승이는 잔뜩 지친 표정으로 "다시는 하프를 안 뛴다"며 선언하듯 내뱉었다. 녀석이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을 때, 나는 주로 옆에서 자원봉사를 하던 여학생들과 활짝 웃으며 단체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때부턴 기록을 향한 질주가 아니라, 그 순간을 만끽하는 즐거운 소풍이 되었다.
19km 부근을 지날 때도 우리는 걸으며 사진을 찍곤 했다. 20km 이정표는 충혼탑 언덕 9부 능선쯤에 놓여 있었다. 언덕 초입부터는 다시 뛰어보자고 아들을 다독였다. 언덕은 꼭 뛰어서 넘어야 한다는 내 고집 때문이었다. 중간중간 멈추려는 민승이의 등을 뒤에서 밀어주기도 했다. 고비를 제대로 넘겨야 그만큼 성취감도 크다는 마라톤의 진리를 아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동장 입구에 들어섰을 때, 트랙 저편에서 우리를 기다리던 아내의 실루엣이 보였다. 그 모습에 힘을 얻어 우리는 흩어지던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나란히 발을 맞췄다. 마침내 도달한 결승점,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두 손을 맞잡고 함께 선을 넘었다. 대견하게 자란 아들과 손을 맞잡고 골인하던 그 순간의 벅찬 감정은,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가슴 한구석을 따뜻하게 적시는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돌이켜보니 그때 이후로 아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었다. 서로의 삶의 궤적이 달랐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대회가 우리 부자의 마지막 동반주가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그때도 문득 스쳐 지나갔다. 고3을 앞둔 아들은 이제 자신만의 세계를 더 크게 가질 나이였으니까. 그럼에도 군말 없이 함께 달려준 아들이 고마웠고, 묵묵히 버텨준 그 모습이 너무나 대견했다.
그리고 지금, 2026년 3월. 민승이는 이제 내 곁이 아닌 더 넓은 세상을 무대로 달리고 있다.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자신의 꿈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 나가는 당당한 청년이 되었다. 아빠의 등에서 내려와 나란히 달리는 법을 배웠던 아이는, 이제 혼자서 인생이라는 거대한 마라톤 코스를 개척해 나가고 있다. 비록 지금은 내가 리드해 줄 수도, 뒤에서 밀어줄 수도 없는 먼 곳에 있지만 나는 믿는다. 우리가 함께 넘었던 그 많은 언덕과 결승선의 기억이, 낯선 길 위에서 마주할 고난을 이겨낼 단단한 근육이 되어주리라는 것을.
2000년 12월, 네 살 민승이는 내 등에 업혔다. 2001년 6월, 다섯 살 민승이는 내 손을 잡았다. 2011년 11월, 중학생 민승이는 내 옆에서 달렸다. 2012년 11월, 민승이는 처음으로 하프를 완주했다. 2014년 11월, 고등학생 민승이는 다시 내 곁에서 달렸다. 2026년 3월, 민승이는 세계라는 주로 위를 자신만의 속도로 달리고 있다.
달리기가 나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기록이 아니었다. 완주 메달도 아니었다. 아들과 나란히 선 출발선. 함께 달린 21.0975km. 그리고 두 손 맞잡고 넘은 결승선. 그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값진 선물이었으며, 지금도 멀리서 홀로 달리고 있을 아들을 향한 나의 변함없는 응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