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km 출발선에서 스쿼시 코트, 골프장까지
2005년 가을, 춘천에서 여섯 번째 풀코스를 완주한 뒤 한동안 풀코스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서브 4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달리기 본연의 즐거움을 되찾으려 했던 이 시기는, 결과적으로 달리기를 넘어 다른 스포츠 분야로 외연을 넓히는 소중한 계기가 되었다.
2006년 1월, 익숙한 고성 이봉주 훈련코스 하프를 마지막으로 점차 보폭을 줄여나갔다. 3월 창원 야철마라톤 하프를 끝으로 거리에 대한 미련을 잠시 접어두었으며, 그해 11월부터는 10km 주로에 서는 것이 새로운 일상이 되었다. 그것은 치열한 일상과 적절히 타협하며 찾아낸 나만의 리듬이기도 했다.
10km. 1999년 여름, 1시간 23분이 걸려 처참하게 완주했던 그 거리. 2000년 가을, 하프를 뛰기 전까지 내가 마라톤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그 거리로 다시 돌아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도망치듯 물러선 것이 아니라 능동적인 선택이었다. 풀코스와 하프에서 느꼈던 강박을 내려놓고, 일상 속에서 무리 없이 달릴 수 있는 ‘안전 거리’를 찾은 셈이었다.
생각해보면 달리기 덕분에 얻은 것은 마라톤 완주 경험만이 아니었다. 꾸준히 달리며 쌓아온 체력과 지구력은 나를 또 다른 도전으로 이끌었다. 2002년 3월, 나는 학위 과정을 시작했다. 회사 생활과 병행하는 공부는 결코 쉽지 않았다. 주중에는 회사에서, 주말에는 강의실에서, 그리고 남은 시간에는 논문을 써야 했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한계에 부딪히던 시간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달리기가 있었다. 퇴근 후 집 근처를 뛰는 시간, 주말 대회를 위해 호흡을 가다듬던 시간들이 나를 버티게 해주었다. 주로 위에서 스트레스를 털어내고 생각을 정리하며 다시 일어설 힘을 얻었다. 결국 2007년 2월, 5년이라는 긴 여정 끝에 무사히 학위 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그 기간 동안 풀코스를 뛰고 서브 4에 도전하며 울트라마라톤까지 완주했던 그 끈기는 학업에도 고스란히 투영되었다. 42.195km를 완주하며 배운 인내와 포기하지 않는 마음은 내 몸뿐 아니라 정신까지 단단하게 단련시켜 주었다.
학위를 마친 후 찾아온 마음의 여유는 나를 더 넓은 세계로 이끌었다. 2004년 8월 처음 접한 스쿼시는 달리기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스포츠였다. 사방이 막힌 좁은 코트 안에서 벽을 향해 공을 튀기는 이 운동은, 탁 트인 길을 일정한 리듬으로 달리는 마라톤과는 달리 순간적인 폭발력과 민첩성을 요구했다. 다행히 달리기로 다져진 기초 체력 덕분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고, 입문 1년 만인 2005년 11월에는 제2회 창원시 생활체육협회 스쿼시대회에서 8강에 오르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2006년 4월에는 또 다른 전환점을 맞이했다. 연습장에서 두세 달 정도 기본기를 익힌 후, 창원CC에서 처음으로 필드에 나갔다. 이른바 ‘머리를 올린’ 것이다. 공을 칠 때 머리를 고정하는 자세 등 기본기를 가다듬던 시간들이 비로소 푸른 잔디 위에서 시험대에 올랐다. 같은 달, 미국 학회 참석차 LA에 갔을 때 뜻밖에도 골프를 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낯선 땅에서 학회 발표보다 더한 긴장감을 느끼며 공을 쳤지만, 달리기로 단련된 집중력이 큰 도움이 되었다. 자연 속에서 누리는 여유와 성취감, 그리고 지인들과 나누는 대화는 달리기와는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돌이켜보면 이 시기는 달리기를 '덜' 한 것이 아니라, 달리기가 준 체력을 '더' 넓게 활용한 시기였다. 2003년부터 2005년까지 내게 달리기가 그 자체로 도달해야 할 목적이었다면, 이제 달리기는 삶의 질을 높여주는 유연한 수단이자 든든한 밑거름이 되었다. 어떤 날은 10km를 달리고, 어떤 날은 스쿼시 코트로 향했으며, 주말에는 골프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2006년 11월 19일, 제6회 창원통일마라톤대회 10km 출발선에 섰을 때의 기분은 묘했다. 2001년 첫 대회 때 하프를 뛰며 벅차했던 기억이 스쳤다. 이제 10km는 더 이상 고통이 아닌 편안한 소풍 같았다. 스쿼시로 다져진 순발력과 골프로 익힌 호흡 조절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결승선을 넘으며 나는 안도했다. 다음 날 출근에 지장이 없을 만큼의 가벼운 몸 상태, 그것이 당시 내가 지켜내야 할 삶의 균형점이었다.
2008년 3월에는 창선-삼천포대교 전국하프마라톤대회 10km를 뛰고, 같은 달 제18회 3.15마라톤대회에서 오랜만에 하프 주로와 재회했다. 몸은 영리하게도 과거의 리듬을 기억하고 있었다. 11월에는 다시 제8회 창원통일마라톤대회 10km로 돌아와 적당한 만족을 즐겼다. 하프는 여전히 부담스러웠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나는 달리기를 완전히 놓지 않으면서도 다른 것들과 조화를 이루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2009년 말, 다시 하프 주로로 복귀했다. 기록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다시 그 거리를 달릴 수 있다는 감각, 그리고 그 과정이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다는 평온함이었다. 2006년부터 2009년까지 숫자로만 보면 이 시기는 정체기처럼 보일지 모르나, 내게는 달리기가 삶 전체로 스며든 ‘확장기’였다. 달리기는 항상 전력질주일 필요가 없으며, 때로는 속도를 늦추고 거리를 줄이며 다른 삶의 영역과 연결될 때 더 오래 지속될 수 있다는 진리를 배웠다.
10km는 결코 짧은 거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나를 ‘달림이’로 태어나게 한 모태였고, 지칠 때 언제든 돌아가 쉴 수 있는 베이스캠프였으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는 가장 정직한 거리였다. 그 베이스캠프가 있었기에 나는 스쿼시 코트와 골프장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여행하고 돌아올 수 있었다.
이제 나는 2012년 춘천, 7년 만의 풀코스라는 새로운 출발선을 바라본다. 서두르지 않고 내 페이스대로 다시 달릴 준비가 되었다. 하지만 그 뜨거웠던 재도전의 이야기는 잠시 뒤로 미루고, 지금은 일상과 운동이 조화를 이루며 삶의 외연을 확장해간 그 소중한 시간들을 마음껏 추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