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지에 닿는 법보다 길 위에서 오래 머무는 법에 대하여
단지 더 빨리 달리기 위해 길 위에 서는 것은 아니다. 기록 단축이 달리기의 유일한 목표가 될 수도 없다. 달리기는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소중한 동반자이며, 달리는 행위 자체가 기쁨이 되는 그런 '지속 가능한 달리기'여야 한다. 하지만 나는 한동안 그 자명한 본질을 잊고 있었다. 기록이라는 숫자가 주는 성취감에만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작은 2002년, '가을의 전설'이 펼쳐진 춘천에서였다. 나의 세 번째 풀코스 도전이었던 그해 춘천마라톤에서 나는 4시간 18분 28초라는 기록으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2001년 첫 도전에서 거둔 5시간 34분, 그리고 같은 해 춘천마라톤에 처음 참가하여 기록했던 5시간 10분에 비하면 그야말로 눈부신 발전이었다. 사실 출발선에 서기 전까지만 해도 완주조차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으나, 막상 예상치 못한 호기록을 손에 쥐고 나니 person 마음이 달라졌다. '18분만 더 빨랐더라면.' 시계를 내려다보던 그 순간, 나의 목표는 어느덧 '완주'를 넘어 '서브 4(4시간 이내 완주)'라는 손에 잡힐 듯한 목표로 바뀌어 있었다.
이듬해 1월, 새해의 차가운 바닷바람이 휘몰아치는 고성에서 네 번째 풀코스에 도전했다. "춘천에서 4시간 18분이었으니, 이번에는 반드시 4시간을 깨자"라고 다짐하며 스톱워치를 눌렀다. 하지만 30km 지점을 넘어서자 매서운 칼바람에 다리는 무거워졌고 숨은 턱 끝까지 차올랐다. 결과는 다시 4시간을 넘겼다. 완주를 했다는 것에 만족하며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남지는 어쩔 수 없었다.
그때부터 기록 단축을 목표로 정하고 훈련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퇴근 후에는 창원대 트랙을 돌며 인터벌 트레이닝과 LSD 등 전문 용어들을 몸에 익혔다. 2003년 한 해에만 하프 코스를 포함해 11개의 대회에 출전했고, 63.3km 울트라마라톤까지 완주하며 거리에 대한 자신감을 키웠다. 2004년에도 경남 일대를 누비며 12개의 대회를 소화했다(지금처럼 대회가 많지 않은 시절이었다). 하프 기록이 좋아지면 풀코스 기록도 자연스럽게 단축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2004년 경주, 그리고 다시 돌아온 2005년 춘천에서도 '4시간의 벽'은 요지부동이었다. 특히 3년 만에 다시 찾은 춘천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나에게 풍경을 감상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오로지 구간 기록을 체크하고 급수대에서 시간을 아끼는 데에만 집중했다. 결과는 3년 전과 다를 바 없는 기록이었다. 결승선을 통과하며 시계를 확인한 순간, 아쉬움이 남았다. 나름대로 꾸준히 훈련했음에도 기록이 나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해 늦가을, 진주마라톤 하프 코스를 뛰던 중 문득 질문 하나가 머릿속을 스쳤다.
'언제부터 달리기의 본질을 잊은 채 숫자만을 쫓게 된 것일까?'
기록은 형편없었지만 달리기가 마냥 즐거웠던 시절이 있었다. 102보충대 군인들의 응원에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던 2002년의 춘천, 가족 6명이 손을 맞잡고 결승선을 넘었던 따스한 기억, 아들 민승이의 손을 잡고 골인하며 느꼈던 제주의 행복... 나는 '더 빨리'에만 매달린 나머지, 정작 '왜 뛰는지'를 잊고 있었다. 달리기가 숫자가 아니라 삶의 과정이어야 했다.
2005년이 저물어갈 무렵, 나는 서브 4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기로 했다. 지난 3년간의 경험은 나에게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더 빨리 뛰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더 오래 달릴 수 있는 마음을 지키는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언젠가 자연스럽게 서브 4라는 문턱을 넘을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영원히 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내가 내일도, 모레도 여전히 길 위에 서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기록 단축을 위해 나름대로 노력은 했지만, 돌이켜보면 정작 이를 뒷받침할 만큼 충분한 연습량을 확보하지는 못했다. 현실적인 여건을 고려하지 못한 무리한 목표 설정이었다는 점을 인정해야 했다. 부족한 연습량을 대회 참가 횟수로 만회하려 했던 것은 결국 욕심이었고, 기록 향상을 도모할 상황이 되지 않는 현실을 외면한 채 숫자와 기록에 매달리는 것이 정답이 아니라는 것을 그 3년의 세월을 통해 비로소 배울 수 있었다.
달리기와 더 오랜 시간을 함께하기 위해서는, 현실적인 여건상 풀코스보다는 하프 코스가 나에게 더 적합하다는 판단이 섰다. 그래서 이후로는 한동안 풀코스에 나서지 않고 주로 하프 코위주로 달렸다. 여러 사정상 예전만큼 자주 달리지는 못했지만 지역 대회 위주로 참여하며 달리기의 맥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2012년 가을, 나는 다시 춘천의 출발선에 섰다. 7년 만에 다시 선 그곳은 마치 오랫동안 떠났던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었다. 나에게 풀코스는 기록을 증명하는 자리가 아니라, 문득 그리움이 찾아올 때 불쑥 떠나는 여행 같은 존재가 되었다.
기록에 매달렸던 3년의 시간은 결국 나에게 '자유롭게 달리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기록이라는 결과보다 소중한 것은 숨 가쁜 호흡 속에서 느끼는 생동감이며, 결승선에 도착하는 순간보다 값진 것은 길 위에서 묵묵히 달려온, 그리고 그것을 위해 준비한 나의 땀과 추억이다. 4시간이라는 문턱은 여전히 저 멀리 서 있을지 모르지만, 시계를 보기보다 바람의 결을 느끼며 달리고 싶다. 달리기가 목적지가 아닌 과정이 될 때, 비로소 마라톤은 삶의 평온한 풍경이 될 수 있다. 나의 달리기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