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춘천의 가을, 최선을 다해 살았던 달림이에게 보내는 편지
빛바랜 완주증 속의 숫자를 가만히 읊조려 본다. '4시간 18분 28초'. 어느덧 2026년, 강산이 두 번 넘게 변한 지금 돌아봐도 그날의 기록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그것은 삶의 무게에 짓눌려 비틀거리면서도 결코 멈추지 않았던 한 남자의 치열한 독백이자,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젊은 날의 뜨거운 고백이었다.
그해 가을, 나의 일상은 마치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같았다. 월요일엔 대학 강단에 섰고, 화요일과 토요일엔 학생이 되어 가방을 멨으며, 그 사이의 시간은 한 회사의 차장으로 치열하게 버텼다. 두 아이의 아침 등교를 책임지는 아빠이자, 지친 아내를 위해 설거지 한 번 제대로 도와주지 못하는 미안한 남편이기도 했다. 내 차 앞 유리에 붙은 다니던 회사와 두 곳의 대학교 출입증 3개는 내가 감당해야 할 세상의 무게와 의무를 상징하는 치열한 삶의 흔적이자 기꺼이 짊어져야 했던 책임감이었다.
수업을 위해 진주로 향하는 길, 습관적으로 밀려오는 졸음을 쫓으며 나는 가끔 누군가를 향해 소리치고 싶었다. "정말 힘들다"라고, "이만큼 했으면 되지 않았냐"라고. 초등학교 시절, 내가 가장 존경하던 선생님께 호된 꾸중을 들었던 기억이 24년 전 그날 자꾸만 뇌리를 스쳤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시 성적이 좋다고 우쭐해하던 내게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네 친구 A는 학교를 마치면 곧장 집으로 달려가 밤늦게까지 부모님 일을 도와드려야 해. 숙제할 시간조차 없는 그 애보다 네 성적이 좋다고 해서 네가 더 대단하다고 할 수 있겠니?" 춘천의 길 위에서 마주한 내 처지는 그때의 친구 A와 너무나 닮아 있었다. 생업과 학업, 가정을 지탱하느라 정작 달리기 연습에 쏟을 물리적 시간은 잠을 쪼개고 쪼개도 늘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40km를 거뜬히 연습하는 동료들 틈에서 고작 20km만 뛰고 발길을 돌려야 했던 그 비참함은, 마치 나만 다른 출발선에서 뒤처져 있는 것 같은 조바심을 낳았다.
하지만 삶은 늘 완벽한 준비를 허락하지 않는다. 춘천으로 향하기 전, 나는 약국에서 소염진통제를 샀다. 어깨는 저렸고 무릎은 삐걱거렸다. 훈련 부족으로 인한 두려움은 금연 결심보다 지키기 어려웠던 '내일 아침엔 꼭 뛰겠다'는 다짐의 실패들이 모여 만든 거대한 벽이었다. 작년의 5시간 10분이라는 기록이 이번에도 나를 따라다닐 것만 같아 씁쓸했지만, 나는 그저 그 무거운 몸을 이끌고 춘천의 출발선에 섰다.
레이스가 시작되자, 나는 마라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색하지 않는 법'임을 깨달았다. 30km 지점에서 허리가 끊어질 듯한 통증이 밀려오고, 양쪽 종아리에 쥐가 날 것 같은 공포가 엄습해와도 나는 절대 멈추지 않았다. 102보충대 군인들의 열렬한 응원 앞에서는 그들의 뜨거운 함성에 보답하듯 흐트러진 자세를 다잡으며 달렸고, 길가에 선 응원객들에게는 오히려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한 아줌마가 알려준 대로 새끼손가락 끝을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꾹 누르며 고통을 삼켰다. 힘들다고 입을 떼거나 얼굴을 찌푸리는 순간, 내 안의 인내심이 썰물처럼 빠져나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밤하늘의 달과 같다. 우리는 달의 뒷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그 차가운 암석의 표면이 얼마나 거칠고 차가운 고독을 견디는지 알지 못한다. 때로는 짙은 구름에 가려 그 존재조차 희미해질 때도 있지만, 달은 단 한 번도 제 궤도를 잊은 적이 없다. 구름 탓을 하며 궤도를 이탈하지도, 자신의 빛이 부족하다고 불평하지도 않는다. 자신을 가린 구름을 원망하기보다 정해진 궤도를 묵묵히 돌며, 제시간에 차오르고 기울어 밤의 길잡이가 되어주는 숙명을 수행할 뿐이다.
2002년의 나는 달리기를 통해 그 달의 성실함을 몸소 배우고 있었다. 38km 지점을 지나며 "나도 이제 4시간대 주자다"라는 확신이 들었을 때, 눈앞이 흐릿해졌던 것은 체력의 한계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해냈다"라고 소리치고 싶은 벅찬 감정을 누르며 마지막 결승선을 통과했을 때,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선택했던 그 힘겨운 여정들, 일과 학업과 육아를 병행하며 달리기까지 하려 했던 그 모든 고집이 결코 오판이 아니었음을 말이다.
2026년의 오늘, 다시 운동화 끈을 묶으며 그때의 나를 돌아본다. 인생이라는 긴 마라톤에서 우리는 여전히 늘 좋은 조건에서 일하거나 취미를 즐길 수 없다. 때로는 예기치 못한 비바람을 맞고, 때로는 짙은 구름 아래를 달린다. 하지만 상관없다. 좋은 환경이 아니더라도, 몸이 조금 무겁더라도 우리는 그저 결승점을 향해 달려나가야 한다.
말없이 제 자리를 지키는 저 달처럼, 우리도 우리에게 주어진 생의 궤도를 묵묵히 완주해야 한다. 화려한 피날레는 아닐지라도, 오늘 하루를 견뎌내며 내딛는 그 걸음 자체가 이미 가장 아름다운 마무리를 향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청량한 가을 공기 같은 삶을 소망한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지만, 내 가슴 속에는 춘천의 뜨거웠던 아스팔트 열기와 그날의 묵묵했던 다짐이 여전히 박동하고 있다. 나는 오늘도 나만의 궤도를 따라, 나만의 속도로 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