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서울울트라마라톤대회(63.3km) 완주기
사람들은 흔히 ‘신세계’라고 하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낯선 땅이나 미지의 공간을 떠올린다. 하지만 내가 경험한 신세계는 지도 위에 있지 않았다. 그것은 내 몸이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시간과 거리, 즉 한계를 넘어선 찰나에 존재했다. 42.195km라는 마라톤의 상징적인 종착점을 지나, 단 한 걸음도 더 내디뎌본 적 없는 미지의 영역으로 들어서는 순간, 나는 비로소 달린다는 것의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었다. 2003년 10월 26일, 한강 변을 따라 달렸던 63.3km의 여정은 나에게 공간적인 의미를 넘어선 시간적, 경험적 의미의 신세계를 선물해 주었다.
이 무모해 보일 수도 있는 도전에 나선 것은 강렬한 자극제 덕분이었다. 전년도 대회에서 지도교수님께서 100km 부문을 완주하시는 것을 보며 느꼈던 경외심은 곧 나를 향한 질문으로 바뀌었다. ‘내 한계는 과연 어디까지일까?’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다음 해에 63.3km 부문에 과감히 이름을 올렸다.
대회 전날, 창원에서 서울로 올라가 후배 연조의 자취방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오랜만에 만난 반가운 얼굴이었지만, 다음 날의 대사를 위해 우리는 술잔 대신 정갈한 식사를 나누며 대화를 이어갔다. 긴장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며, 다음 날 마주할 길 위의 시간들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2003년 10월 26일 아침, 출발 신호와 함께 레이스가 시작되었다. 초반은 의욕적이면서도 차분했다. 첫 5km를 34분 18초에 통과하며 몸을 달궜고, 10km 지점 역시 34분 39초라는 거의 일정한 구간 기록을 유지하며 총 1시간 8분 57초에 통과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한강의 가을바람은 상쾌했고, 내 발걸음은 가벼웠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뛰는 이들의 리듬을 빌려 타기도 하고, 때로는 나만의 페이스를 찾아 앞서 나가기도 했다. 20km 지점까지의 구간 기록은 2시간 16분 38초로, 오히려 초반보다 조금 더 빨라진 속도를 보여주었다. 몸이 완전히 풀린 상태에서 오는 고양감이 나를 밀어주고 있었다. 30km 지점까지도 10km 구간 기록을 1시간 6분 28초의 구간 기록(누적 3시간 23분 6초)을 기록하며 나름 견고한 페이스를 유지했다.
이날의 백미는 보급소에서 제공한 뜨끈한 어묵이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물과 함께 입안으로 들어온 어묵은 지금까지 내가 먹어본 그 어떤 산해진미보다도 달콤하고 따뜻했다. 그것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지쳐가는 근육과 영혼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생명수였다.
고비는 30km를 넘어서며 서서히 찾아왔다. 40km 지점까지의 구간 기록은 1시간 13분 46초로 눈에 띄게 늘어났다. 체력이 고갈되기 시작했고, 길은 점점 길게 느껴졌다. 마침내 풀코스의 종착점인 42.195km 지점에 도달했을 때 시계는 4시간 52분 47초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 지점을 통과하는 순간, 내 몸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내 생애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시간과 공간의 영역, 즉 '진짜' 신세계였다. 공간적인 미지의 세계만이 신세계가 아니라, 자신의 체험이 닿지 않았던 시간적 경험 역시 또 다른 미지의 세계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실감했다.
50km 지점까지의 구간 기록은 1시간 18분 42초(누적 6시간 11분 29초)까지 떨어졌다. 근육 마디마디가 비명을 질렀고, 똑같은 자세로 팔을 젓는 것조차 지겹고 고통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의식적으로 팔의 각도를 높였다 낮췄다 하고, 젖히는 방식을 계속 바꿔가며 근육의 피로를 어떻게든 분산시키려 애썼다. 그 고통스러운 몸부림 자체가 나에게는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생소하고도 강렬한 자극이었다.
결승점을 불과 몇 킬로미터 남겨두었을 때, 100km 부문 우승 선수가 무서운 속도로 나를 추월해 갔다. 이미 100km를 달려온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경쾌한 그의 발소리는 신세계의 끝자락에서 만난 경이로운 풍경 중 하나였다.
마지막 13.3km 구간을 1시간 20분 13초 동안 사투하듯 달려, 최종 기록 7시간 31분 49초로 대장정을 마쳤다. 결승점에 다다르자 주최 측에서는 들어오는 주자들을 위해 정성스럽게 결승선 테이프를 쳐주었다. 내가 그 빨간 테이프를 가슴으로 끊는 순간, 7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쌓였던 고통은 한순간에 성취감으로 치환되었다.
완주의 기쁨을 축하하며 주최 측에서 건네준 와인 한 잔을 마셨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그 짜릿한 맛은 완주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나는 머리에 월계관을 쓰고 난생처음으로 포디엄에 올라 기념 촬영을 했다. 비록 프로 선수는 아니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내 인생의 가장 정직한 승리자가 된 기분이었다.
서울울트라마라톤대회는 나에게 '완주'라는 결과보다 더 값진 과정을 남겨주었다. 42.195km를 넘어서며 경험한 그 낯설고 고통스러운 페이스의 변화와 감각들은, 내가 알던 세상의 경계를 조금 더 넓혀주었다. 우리는 흔히 외부의 세계를 탐험하려 애쓰지만, 사실 가장 큰 신세계는 우리 내면의 한계를 넘어설 때 열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63.3km를 달린 뒤 받은 완주 메달과 완주비(完走碑)에는 나의 땀과 고뇌, 그리고 결승점에서의 환희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달리기가 주는 선물은 비단 건강한 신체뿐만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알지 못했던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해주는 것,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언제든 스스로 신세계를 열어젖힐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는 것이다. 2003년의 그 가을날, 나는 내 발로 직접 지도의 끝을 지우고 나만의 신세계를 그려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