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6월의 제주
2001년 6월의 초입, 제주의 바람은 육지의 그것보다 조금 더 달고 뜨거웠다. 결승점을 100m 앞두고 기다리고 있던 민승이의 손을 잡았다. 아들의 온기를 느끼는 순간 마침내 해냈다는 성취감이 온몸을 감쌌다. 그것은 완주의 기쁨이라기보다,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이 주는 벅찬 행복이었다.
대회를 앞두고 나는 수차례 소심한 자문(自問)에 빠지곤 했다. "세상은 왜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자꾸만 가로막는 걸까." 쉼 없이 몰아치는 설계 일정과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업무 상황은 나를 끊임없이 압박했다. 이미 비행기와 숙소 예약은 마쳤지만, 과연 이 여행이 가능할지 의문이 들 때가 많았다. 무엇보다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어린 민승이와 민정이에게 제주의 푸른 바다를 꼭 보여주고 싶었기에 불안감은 더 컸다.
연습량도 턱없이 부족했다. 바쁜 와중에 짬을 내어 창원대 코스를 가끔 뛰긴 했으나, 2주 동안 거의 발을 떼지 못한 적도 있었다. 무더운 날씨에 치러질 대회를 생각하면 불안이 엄습했지만, 다행히 업무의 파도는 교묘히 나를 비껴갔다. 비행기를 처음 타보는 아이들이 거대한 기체를 보며 눈을 반짝이는 모습만으로도, 제주 여행은 이미 절반의 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제주에 도착해 예약해 둔 차 두 대에 가족들을 나누어 태웠다. 종합운동장에서 배번과 기념 티셔츠를 챙겨 서귀포로 향하는 길, 제주의 풍광이 우리를 반겼다. 정보통신부 서귀포수련원의 안락함 속에 짐을 풀고 외돌개로 향했다. 광활한 바다와 푸른 초원이 어우러진 장관 앞에서 우리는 일상의 고단함을 잊었다. 경치에 취해 마신 좁쌀막걸리 한 잔은 뒷날의 레이스를 잠시 잊게 할 만큼 달콤했다.
둘째 날 새벽 6시 반, 어머니와 이모님을 모시고 먼저 경기장으로 향했다. 연습 부족으로 몸은 무거웠지만, 다행히 하늘은 그리 뜨겁지 않았다. 시력 렌즈 프레임이 부러지는 바람에 앞이 선명히 보이지 않는 불안함이 있었지만 눈부심을 막는 것이 우선이라 판단해 안경 대신 고글을 챙겨 썼다. 달리기 열풍 덕분에 시중에 첫선을 보이기 시작한 쿨맥스 티셔츠를 갖춰 입고 무릎과 장딴지에 테이핑을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트랙을 몇 바퀴 돌아보니 속도가 나지 않았다. 기록은 '서브 투(Sub-2)' 대신 '완주' 그 자체에 의미를 두기로 했다.
출발 신호와 함께 시계의 버튼을 눌렀다. 도심을 벗어나자 푸른 해변이 눈에 들어왔다. 도수 없는 고글 탓에 풍경은 뭉그러진 수채화처럼 보였지만, 그 색감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기록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으니 오히려 다리에 힘이 붙었다. 급수대마다 들리는 여학생들의 우렁찬 파이팅 소리는 뜨거워진 심장에 찬물을 끼얹어주는 보약 같았다.
반환점을 돌아 15km 지점에 다다랐을 때, 한 아저씨와 묘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뛰다 걷다를 반복하며 나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그를 보며 나는 확신했다. 마라톤은 결국 꾸준함의 싸움이라는 것을. 결승점을 2km 남겨두고 나는 마지막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질주하며 여러 명을 추월했다. "나도 참 많이 성장했구나"라는 희열이 가슴을 채웠다.
마지막 운동장 진입로, 레이스 내내 비슷한 페이스로 달리던 외국인 여성 러너를 추월하고 싶은 유혹이 생겼지만, 꾹 참았다. 나에게는 기록보다 더 중요한 '피날레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결승점 100m 전, 가족들과 함께 서 있는 민승이를 발견했다. 들뜬 마음에 손뼉을 치면서 민승이를 불렀고, 이 녀석도 이번이 두 번째인 피날레 이벤트가 좋은지 나에게 달려왔다. 우리는 사이좋게 손을 잡고 골인했다.
'언젠가는 너와 함께, 그리고 민정이도 함께 달릴 날이 오겠지.‘
아들의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는 마라톤의 고통을 씻은 듯 잊게 해 주었다.
레이스는 끝났지만 가장으로서의 일정은 다시 시작되었다. 완주의 후유증을 돌볼 겨를도 없이 가족들을 챙겼다. 마라톤과 가족 여행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으려 노력하는 나 자신이 조금은 대견하게 느껴졌다.
점심을 먹고 향한 목장에서는 말들과 함께 시원한 바람을 맞았다. 말을 무서워하던 민정이도 제주가 주는 자유로운 공기 속에서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중문 단지에서 돌고래 쇼를 놓친 것은 아쉬웠지만, 해변에서 아이들과 물장난을 치며 바라본 수평선은 막힌 가슴을 뻥 뚫어주었다. 셋째 날 성산 일출봉에 오를 때는 다리가 천근만근이었지만, 정상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그 모든 피로를 보상하고도 남았다.
돌아오는 비행기가 기류 변화로 조금 흔들렸지만, 우리 가족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단단했다. 2박 3일,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나는 마라톤을 통해 나 자신을 이겨냈고, 가족들과 함께 제주의 푸른 기억을 공유했다.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가슴속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이 뿌듯함은 난생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것이었다.
지난 4월, 어머니를 모시고 막내 동생의 면회를 위해 가족과 함께 방문했던 청주에서의 하프 마라톤, 그리고 제주 대회는 내게 또 다른 시작을 꿈꾸게 했다. 전국의 아름다운 풍광을 배경 삼아 달리는 그 길마다 우리 가족의 발자취를 함께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건강한 웃음과 아이들의 성장을 지켜보며, 마라톤과 여행이 어우러진 이 행복한 시간들을 계속 이어가리라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