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길을 동경하던 초보 달림이가 마주한 위대한 한계
낯선 길을 마주하게 되었다. 생각보다 매력적인 길이라 느껴졌고, 그래서 그 길을 한 번 가보기로 했다. 넘어야 할 산이 많다는 주변의 우려도 들려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 가보고 싶다는 열망이 앞섰다.
사람은 저마다의 능력과 처한 현실이 있고, 가고자 하는 길은 대개 그 바탕 위에 놓여 있다. 길을 가다 힘들면 잠시 주저앉아도 괜찮다. 그 쉼표 속에서 느끼고 배우며 다시 앞으로 나아갈 동력을 얻기 때문이다. 그렇게 길은 이어진다.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2000년, 21세기로 접어들며 대한민국에는 거센 달리기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일명 '풀뿌리 마라톤'의 태동기였다. 그 인기를 증명하듯 2001 동아마라톤대회(2001.03.18)는 신청 시작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월 28일경, 선착순 1만 명의 정원이 채워지며 조기에 마감되었다. 그 뜨거운 열기 속에 나 역시 생애 첫 풀코스 도전을 위해 이름을 올렸다.
2000년 가을, 경주에서의 첫 하프 마라톤 완주의 기쁨을 길게 만끽할 수 없었던 이유는 42.195km라는 미지의 길에 대한 호기심과 경외심 때문이었다. 마라톤을 시작하기 전 내게 이 숫자는 자동차 계기판의 눈금이나 도로 이정표에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추상적인 수치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를 내 두 발로 정복해야 할 '거리'로 받아들이는 순간, 그것은 거대한 벽이자 아득한 심연으로 다가왔다.
창원 집에서 진주 반성 본가까지의 거리가 대략 그 정도인데, 차로 꼬박 한 시간을 달려야 닿던 그 먼 길을 오직 내 두 발의 힘으로만 주파해야 한다는 사실은 도무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상상 너머의 영역이었다. 기계의 힘을 빌려도 한참을 가야 하는 그 아득한 공간을 맨몸으로 달리는 것은 황영조나 이봉주 같은 초인들만이 가능한 '인간계 밖의 일'이라 여겨왔다. 그런데 그런 마라톤에 내가 감히 도전장을 내민 것이었다.
완주를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42.195km라는 거리에서 오는 심리적 압박감을 줄이는 것이었다. 당시 창원 지역의 유일한 마라톤 동호회였던 ‘창원마라톤클럽’ 카페를 비롯해 여러 인터넷 사이트를 기웃거리며 정보를 모았다. 그러다 LSD(Long Slow Distance), 즉 장거리 달리기 훈련법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만약 그때 클럽에 가입했더라면 내 달리기 인생은 많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선두 그룹에서 달리시는 초등학교 대선배이자 '하프마라톤의 황제' 김형락 님 같은 분들께 직접 지도를 받을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결과적으로 이때부터 '마라톤 독립군' 인생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홀로 서는 이 습성이 굳어져 훗날 산티아고 순례길이나 동남아 장거리 여행도 혼자 떠나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본 대회를 앞두고 최종 점검을 위해 ‘2001 스포츠조선 전국 하프마라톤대회(2001.02.25)’에 참가했다. 경남 하동을 출발하여 전남 광양시청까지 이어지는 영·호남 화합의 상징적 코스였다.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 선수의 올림픽 제패를 기념하는 대회이기도 했던 그날, 나는 21.0975km를 달리며 풀코스라는 거대한 산을 넘기 위한 채비를 마쳤다. 하프 완주 후 얻은 자신감 덕분에 42.195km에 대한 두려움은 조금씩 설렘으로 바뀌기도 했다.
아쉽게도 이 대회는 이후로는 개최되지 않았으나, 광양시청에 집결한 참가자들이 버스로 하동까지 이동한 뒤 다시 광양으로 달려오는 방식이 꽤 이색적이었다. 싸한 공기를 가르며 국도를 달리는 맛이 제법 좋아 달리기에 입문하길 참 잘했다는 확신을 준 대회였다. 기록은 2시간 3분으로, 안타깝게도 '서브 투(2시간 이내 완주)'에는 실패했다.
대회 전날, 고속버스를 타고 상경했다. 내려올 때는 비행기표를 예약해 두었는데, 5시간 이상 도로 위에서 사투를 벌인 뒤 다시 그만큼의 시간을 버스에서 보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후 늦게 친구 희용의 집에 도착했다. 마침 제수씨와 조카들은 여행을 떠나 집이 비어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였지만 다음 날의 거사를 위해 술은 입에도 대지 않았다. 말로만 듣던 식이요법(카보로딩)도 제대로 해보고 싶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대회 당일 아침, 바나나 두 개로 허기를 달래고 지하철을 이용해 광화문으로 향했다. 장거리 이동 피로 때문인지 잠자리가 바뀐 탓인지 밤새 숙면을 취하지 못했고, 출발선에 서기 전부터 몸은 평소보다 무겁게 느껴졌다. 광화문 광장의 기온은 섭씨 7도 안팎으로 쌀쌀했지만, 광장을 가득 메운 만여 명의 달림이들이 뿜어내는 열기는 대기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새봄을 달리자, 서울을 달리자'라는 슬로건 아래 모인 건각들은 배번을 고쳐 달고 바셀린을 바르며 비장한 결의를 다졌다.
그 시절의 마라톤 복장은 지금처럼 화려하거나 기능적이지 않았다. 땀을 빠르게 흡수하고 배출하는 속건성 재질의 유니폼은 구경조차 하기 힘들던 때였다. 따라서 모자도 상대적으로 기능성이 좋았던 등산용 창모자를 착용했다. 하의는 숏 팬츠를 입었고, 상의는 반팔 티셔츠 위에 대회 기념품으로 받은 흰색 마라톤 유니폼을 겹쳐 입었다. 쌀쌀한 아침 공기를 막아줄 보온용 반장갑을 끼고, 발에는 형광색 아식스 마라톤화를 신었다. 세련된 러닝 웨어로 무장한 요즘 주자들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차림이었지만, 그 장비들은 42.195km라는 미지의 길을 함께할 나의 유일한 갑옷이었다.
이번 대회에는 풀코스 4,433명, 하프코스 6,353명이 참가했다. 혼자였던 나는 생전 처음 접하는 메이저 대회의 규모와 전국에서 모인 주자들의 다양한 모습을 구경하며 긴장된 시간을 흘려보냈다. 2001년 3월 18일 오전 10시, 출발 신호와 함께 쏟아져 나가는 인파 속에 몸을 실었다.
‘정말 완주할 수 있을까?’
수백 번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이었다. 연습 때 달렸던 10km, 20km는 마라톤이라는 거대한 대륙의 해안선에 불과했다.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미지의 영역, 30km 너머의 고통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다행히 아득한 거리감은 어느새 박동하는 심장 소리에 묻혀버렸다. 코스는 광화문을 출발해 종로와 신설동을 거쳐 잠실 도심을 관통한 뒤, 최종 목적지인 잠실 주경기장 트랙으로 들어오는 여정이었다.
후미에서 출발한 데다 컨디션 난조로 페이스를 올리지 못하다 보니 구간별 도로 통제 시간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결국 제한 시간이 지나면서 정해진 주로를 차량에 내어주고 인도로 밀려나 외로운 레이스를 이어가야 했다. 중간중간 걷기도 했다. 그나마 위안이 된 것은 옆에서 같이 걷던 이름 모를 동행이었다. 우리는 서로 "이 먼 길을 2시간대 초반에 뛰는 이봉주 선수는 정말 사람이 아니다"라며 장단을 맞추고 헛웃음을 지으며 고통을 나누었다.
지루하고 고된 시간의 연속이었다. 20km 부근을 지날 때는 하프 코스를 마치고 돌아가는 주자들이 세상에서 제일 부러웠다. 그쯤에서 레이스를 멈추고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마의 30km 구간에 들어서자 회수 차량이 자꾸 눈에 밟혔다. 차에 올라타고 싶은 유혹이 강렬했지만, 첫 도전에서 좌절하면 평생 이 고비를 넘기지 못할 것 같아 어떻게든 버티며 나아갔다. 포기하기엔 그간 흘린 땀이 너무 아까웠다.
광화문을 출발한 지 5시간 34분 16초 만에 마침내 잠실 주경기장 결승점을 통과했다. 역사적인 순간을 얼싸안으며 축하해 주는 이 하나 없었지만, 42.195km라는 불가능해 보이던 거리를 완주해 낸 나 자신이 무척 자랑스러웠다. 목에 걸린 금빛 타원형 메달 안에는 승리를 상징하는 월계관 문양이 선명히 새겨져 있어, 그간의 고통을 따뜻하게 위로해 주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으론 '다시는 뛰지 않으리라'는 생각도 스쳤다.
너무 늦게 도착한 탓인지 주경기장은 한산했고, 지친 몸을 이끌고 간 보조경기장에는 물품 보관과 기념품 전달을 돕는 자원봉사자들만 남아 있었다. 온몸에 새겨진 근육통을 훈장처럼 안고 비행기 시간에 맞춰 운동장을 떠날 채비를 했다. 소변이 마려워 들른 화장실에서 한참을 애쓴 끝에야 진한 오렌지빛 소변 한 방울이 비쳤다. 몸 안의 모든 수분이 42.195km의 길 위에 쏟아져 버린 듯했다.
김포공항행 지하철을 타러 가는 길, 도저히 힘에 부쳐 근처 분식점에서 라면과 김밥으로 허기를 달랬다. 급식대에서 먹은 바나나와 초코파이만으로는 쏟아낸 에너지를 보충하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그렇게라도 에너지를 채우지 않으면 공항까지 갈 힘조차 없었다. 비행기를 타고 김해공항에 도착해 리무진 버스로 창원에 돌아오는 내내 몸은 비명을 질렀고, 나는 끙끙거리며 고통을 견뎠다.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두 팔 벌려 나를 맞아주었다. 몸은 천근만근이었으나 생애 첫 완주의 감격을 그냥 흘려보낼 수는 없었다. 시원한 소맥 한 잔에 고통을 씻어내며, 내 인생에 새겨진 42.195km의 훈장을 자축했다.
그날 이후, 나의 첫 마라톤 완주 무용담으로 주변은 한동안 시끄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