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함께 한 5km 달리기
마라토너에게 기록이란 지독한 짝사랑과 같다. 지난달 경주에서 열린 하프마라톤을 무사히 완주하고 나니, 내 마음속에는 ‘숫자’에 대한 욕심이 독버섯처럼 피어올랐다. 이번 제10회 진주시민마라톤(2000.12.3.(일))에서는 기필코 ‘2시간의 벽’을 돌파해 당당한 하프 완주자로 거듭나리라 다짐하며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인생은 늘 뜻밖의 방향으로 우리를 이끈다. 개인 훈련에 매진하던 어느 날, 작년 비바람 몰아치던 화왕산을 씩씩하게 오르던 네 살 민승이와 아내 등 뒤에서 그 거친 날씨를 견뎌내던 두 돌 아기 민정이의 모습이 문득 머릿속을 스쳤다.
“우리 애들이 5km를 뛸 수 있을까?"
"안돼! 날씨도 추울 거고 조금만 가다가 다리 아프다고 할걸?"
"당신은?"
"얘들하고 응원이나 할게."
"엄마는 어떠실까? “
아내의 현실적인 우려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은 이미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다 같이 한번 뛰어보자!”
아내의 반대와 우려를 뒤로하고 어머니와 조카까지 포함해 온 가족의 이름을 단체 등록부에 적어 넣었다. 나의 ‘sub-2(2시간 이내 완주)’라는 야심 찬 목표는 그렇게 잠시 쉼표를 찍었다.
대회 당일, 가슴에 나란히 배번을 단 가족들과 출발선에 섰다. 그것은 기록을 위한 질주가 아니라, 우리 가족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역사적인 산책’의 시작이었다. 레이스는 예상대로 좌충우돌이었다. 24개월 된 딸 민정(대회 비공인 최연소 출전자:24개월 17일)이는 아예 아내 등에서 내려올 줄 몰랐고, 민승이는 내 등에 업혔다 내리기를 반복하며 가끔씩 뛰기도 했다. 연습 한 번 제대로 못한 아내는 민정이를 업고도 묵묵히 나아갔고, 어머니는 조카의 손을 잡고 걷다 뛰다를 반복하며 생전 처음 맛보는 주로의 공기를 즐기셨다.
대회의 백미는 결승점을 눈앞에 둔 순간이었다. 우리 가족 여섯 명은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한 몸이 된 것처럼 나란히 결승선을 밟았다. 스톱워치의 초침은 여전히 무심하게 흘러가고 있었지만, 그 순간 우리 가족이 공유한 공기와 온도는 세상 그 어떤 정밀한 기록지로도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며칠 후 배달된 대회 화보 속에서 활짝 웃고 있는 우리 가족의 사진을 보았다. 거기에는 1초를 다투는 치열한 경쟁 대신, 함께하며 얻은 벅찬 감동만이 가득했다. 퇴근한 후, 여전히 가라앉지 않는 여운을 안고 창원대학교 교정을 달렸다. 입가에 번지는 미소는 하프마라톤을 처음으로 완주했을 때보다 훨씬 더 진하고 달콤했다.
검도에만 매진하던 시절, 나는 운동이란 나 자신을 벼리고 이기는 과정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달리기는 내게 전혀 다른 세상을 가르쳐주었다. 때로는 목표를 향해 무섭게 질주해야 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나만의 걸음을 멈추고 곁에 있는 가족의 손을 잡아야 할 때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라는 것을.
나는 앞으로도 계속 달릴 것이다. 때로는 나의 한계를 시험하며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고통을 즐길 것이고, 언젠가 결승점을 통과해 바닥에 쓰러졌을 때 후회 없이 달렸노라고 하늘을 향해 외칠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내 마라톤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기록은 개인 최고 기록을 달성한 날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들의 손을 잡고 가장 느리게 결승선을 통과했던 바로 그날로 기억될 것이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