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경주, 그리고 첫 하프마라톤

하프 완주의 기쁨을 넘어 풀코스라는 미지의 세계를 꿈꾸다

by 자목

첫 10km 달리기의 고된 경험은 시간이 지날수록 희석되어갔고, 나에게는 검도가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지배적인 시간이 계속되었다.


2000년 6월, 삼천포에서 있었던 검도 초단 심사를 통과했다. 3년 반이 넘는 검도 경력으로 보면 2단 정도는 벌써 딸 수 있었는데 매번 다른 일들이 승단 시험과 겹치는 바람에 뒤늦게 승단하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비로소 유단자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이후 간간이 통증을 느꼈던 오른쪽 어깨 상태가 점점 나빠지기 시작했다. 어깨를 들어 타격하기가 쉽지 않아 훈련을 건너뛰는 날이 늘어났다. 그러던 중 문득 한번 달려볼까 하는 생각이 스쳤고, 곧장 집 근처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나가 보았다.

‘어라! 어깨가 풀리는 것 같네.’

달리고 나니 뭉쳤던 어깨 근육이 풀리며 통증도 한결 가라앉았다. 계속 뛰면 상태가 호전되리라는 기대로 퇴근 후 조금씩 거리를 늘려갔다. 달리기에 대한 호기심이 싹트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각종 마라톤대회의 완주자들이 올린 체험담이 심금을 울리기도 했다. 나도 그런 감동을 맛보고 싶다는 바람이 생길 정도였다.

그런데 관심이 늘어날수록 단순해 보이던 달리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달리기 자세는 둘째치더라도 러닝화는 어떤 것을 신어야 하는지, 연습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의문은 인터넷 검색과 교수님의 조언을 토대로 직접 경험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전에는 교수님과 대화를 나눌 때마다 서로 마라톤과 검도의 매력을 뽐내곤 했는데, 어느 순간 마라톤에 더 마음이 기울어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교수님께서 실험실 후배들과 ‘2000 동아경주오픈마라톤’에 나가신다며 참가를 제안하셨다. 잠시 망설임 끝에 합류를 결정했고, 종목은 당연히 10km였다.

“경주까지 가는데 하프는 뛰어야지!”

연습이라고는 퇴근 후 운동장 몇 바퀴가 전부인 내게 하프는 ‘넘사벽’ 그 자체였다. 하지만 제자의 한계를 늘 한 단계 높여 잡으시는 스승님의 명을 거역할 순 없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하프마라톤을 신청한 순간부터 엄청난 고민이 밀려왔다.

‘그 먼 거리를 어떻게 뛴단 말인가!’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경주에 가서 하프마라톤을 뛰어야만 하는 피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내가 매달릴 수 있는 건 연습밖에 없었다. 평소 운동장에서 뛰던 거리를 조금씩 늘려나갔다. 운동장만 계속 뛰다 보니 너무 지겨워 동네를 달렸다. 당시만 해도 GPS 기능이 있는 시계가 없어 뛴 거리를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었다. 결국 차를 운전해 주로를 미리 돌며 주행거리를 체크하는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버겁기만 하던 거리도 점차 몸에 익어갔고, 발걸음이 가벼워질 때마다 조금씩 더 멀리 나아갔다. 그렇게 대회 전까지 소화한 최장 연습 거리는 12km였다. 첫 대회 당시 그토록 아득하게만 느껴졌던 10km보다 더 먼 거리를 연습 때 이미 완주해낸 셈이었다. 하지만 실제 대회에서 달려야 할 거리는 연습량보다 10km나 더 길었기에, 완주에 대한 중압감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2000년 11월 12일, 대회 당일의 아침이 밝았다. 경주 세계문화엑스포 국기광장의 날씨는 5℃ 내외로 제법 쌀쌀했지만, 쾌청한 가을 하늘 아래 운집한 수천 명의 열기는 그 서늘함을 녹이고도 남음이 있었다. ‘폼생폼사’ 정신으로 큰맘 먹고 장만한 새 경기복을 입고 후배들과 함께 하프 출발선에 섰다.

‘완주할 수 있을까?’

출발 신호와 함께 무리에 끼여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첫 3km 구간이 심한 오르막이어서 천천히 뛰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초심자의 경우, 긴장감으로 인해 경기 초반에 오버페이스를 하면 완주하기 어렵다는 여러 조언을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달려 나갔다. 자동차 대신 러너들로 가득 찬 도로 위를 달리는 기분은 제법 쏠쏠했다. 홀로 동네를 달리던 고독한 연습과는 차원이 다른 해방감이 느껴졌다. 급수대를 지나칠 때마다 물을 마시며 체력을 최대한 아끼려 노력했다. 10km 구간을 지날 때는 만감이 교차했다. 그동안의 연습에 대한 보상을 충분히 받는 것 같아 좋았다. 그런데 거리가 늘어날수록 점점 힘이 빠지며 다리도 무거워졌다. 마지막 급수대에서 물과 함께 바나나, 초코파이를 먹었다. 내 인생 최고의 초코파이였다.


천천히 뛰더라도 절대 걷지 않겠다는 다짐은 마지막 5km에서 무너져버렸다. 어떻게든 뛰어보려 했지만 가쁜 호흡과 무거워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주변에 걷는 사람들이 있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그렇게 마지막 오르막 구간을 넘어서자 완주의 예감이 몰려왔다. 결승선만큼은 당당히 달려가겠다는 다짐으로 남은 힘을 모두 쥐어짰다. 결승선을 넘는 순간, 먼저 경기를 마친 후배들이 달려와 시원한 물병을 내밀었다. 그동안 고민했던 하프마라톤을 완주했다는 기쁨이 배가 되는 것 같았다.

최종 기록 : 2시간 20분 44초


완주해낸 나 자신을 자랑스러워하며 물병을 손에 쥔 채 주로 옆에 앉아 지친 몸을 달래고 있을 무렵, 앞서 출발한 풀코스 주자들이 속속 결승점을 통과하고 있었다. "42.195km라는 마의 거리를 3시간 이내에 주파하는, 이른바 ‘서브 3(Sub-3)’ 주자들이었다.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그 아득한 거리를 어떻게 그토록 빠르게 달릴 수 있는지, 내 눈에는 그들이 마치 외계인처럼 보였다. 그리고 환호성을 지르는 등 결승선을 넘는 주자들의 다채로운 골인 장면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무척 흥미로운 구경거리였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5시간대 주자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모든 기력을 소진한 채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들어오는 그들의 모습은 안쓰러울 정도였다. 그런데 바로 그 지점에서, 나는 묘한 공통점을 하나 발견했다. 몸은 비록 만신창이가 되었을지언정, 결승선을 넘는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눈부신 환희의 미소가 번져 있었다. 그 미소를 마주한 순간, ‘도대체 어떤 기분일까’ 하는 강렬한 호기심과 함께 ‘내가 저 42.195km의 끝에 서게 된다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짓게 될까’ 하는 설렘 섞인 질문이 마음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프마라톤 완주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내 마음은 이미 풀코스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래! 이왕 시작한 김에 풀코스도 한번 뛰어보자.’

하프마라톤을 준비할 때는 엄청난 부담감에 짓눌려 있었지만, 풀코스 완주를 떠올리니 왠지 모를 신비로운 세계를 동경하는 것 같은 기분 좋은 긴장감이 찾아왔다.


그날 밤, 아내에게 영웅담을 늘어놓고 잠자리에 누웠지만, 온몸의 근육통으로 쉽게 잠들 수 없었다. 밤새 끙끙대며 뒤척였지만, 마음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볍고 평온했다. 나의 진짜 마라톤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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