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과 행복, 열등과 탁월함
인간은 생존을 위해 위험을 무릅쓴다. 현대 사회에서,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좁은 땅덩이에 탁월한 문명 발달이 더해 진다면 생존의 위협을 느끼기는 더욱 어렵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최근들어 다양한 정신병자들이 발생시키는 범죄행위와 같은 특수 케이스와 소수의 소외 계층이 겪는 극심한 빈곤을 제외하고) 그래서 요즘의 우리는 행복을 삶의 우선순위로 두고는 한다.
인간의 원초적인 욕구가 충족된다면 인간은 본래 안정을 추구한다. 가정을 이루어 자기만의 울타리를 형성하고 그 커뮤니티 안에서 각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것이 인간이 행복한 삶을 이루는 가장 원시적인 형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글로벌 시대가 도래하며 우리가 소속된 커뮤니티가 팽창함에 따라 지금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은 가히 기형적인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은 무리 생활을 하는 동물이다. 무리 생활이란 곧 사회를 뜻한다. 이전의 인간에게 사회란 끽해야 동네를 벗어나지 못하였는데 지금의 우리는 손가락 하나의 액션만으로 즉시 지구 저편의 집단 혹은 누군가와 커뮤니티를 형성할 수 있다. 다양한 출신의 새로운 사람들과 사회를 구축하여 시야를 넓히는 행위는 이 시대 기조에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훌륭한 일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견문을 넓힌다는 행위의 작용이자 부작용은 인간이 추구하는 안정의 기준 점을 높인다는 데에 있다. 견문이 넓어져 삶에서 추구하는 가치가 확장한다는 것, 목표가 높게 설정된다는 것은 인간이 한번뿐인 삶을 야망적인 태도로 영위한다는 점에서 이상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행복의 관점에서 본다면, 나에게 주어진 행복의 기준점이 높아지는 것은 실로 피곤하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내가 추구하는 행복의 가치가 늘 새로운 목표가 생긴다는 것은 삶에 혼란을 부추긴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을 살펴볼 겨를이 없다. 틈만나면 새로운 자극들에 노출된다. 그에 대한 작용으로 기존의 욕망을 성취하기도 전에 또 다시 욕망이 피어난다. 성취를 만끽할 틈이 없다. 늘 우리는 결핍에 시달린다. 내가 뭘 원하는지도 모른채로 말이다. 왜 그럴까. 왜 우리는 만족하지 못하나.
우리는 열등을 두려워 하는 것 같다. 탁월한 한국 사람들. 무엇 하나 빠지지 않고 다들 잘났다. 길거리를 거닐다 보면 누구 하나 특별히 못난 사람 없이 모두 멋지고 예쁘며 잘 정돈된 차림새다. 길거리도 이러한데 온라인 매체를 살펴보면 가히 입이 떡 벌어진다. 다른 나라 sns에 비해 정말 유달리 화려한 우리나라 사람들. 그에 대한 반증으로 세계 곳곳에서 주목하는 k관련 컨텐츠들.
'열등을 두려워 하는' 탓에 우리는 늘 탁월함을 추구하기 바쁘다. 유행에 늦어지는 것이 두렵고, 트렌드에 늦어지면 '아재' 혹은 '꼰대'라는 지칭명사로 열등한 집단으로 묶인다. 우리는 열등한 취급을 받는 것이 두려운 민족이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뒤쳐지는 것이 두려워 쉴틈없이 달리고 사회에선 끊임없이 노력을 관철시킨다. 사회의 평균 기준점을 높이는데에서 '노력'이란 아주 편리한 도구가 아닐 수 없다. 탁월한 사람의 재능보단 노력을, 열등한 사람의 재능의 부재보단 노력의 부재로 치부시켜 버리면 되니까 말이다.
이러한 도구 역할로써의 '노력'이 현 세대에게 들통이 난 탓인지 요즘에는 '노력'을 터부시하는 문화가 생겨난 것 같다. 노력을 '노오력'이라는 표현으로 가치폄하를 일삼고, 애쓰는 것을 미련한 것이라고 여긴다. 최선의 노력 끝에도 실패하면 본인의 열등함이 탄로날까 두려운 것이다. 또 다시, 열등함이 주는 두려움에 떠는 한국 사회의 특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