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 최초의 경험이었다.
나는 보통 울다가도 불시에 딴생각이 나서 울음이 뚝 그치곤 했고 지금도 그렇다. 그런데 살면서 처음으로, 정말 오랜 시간을, 지독한 두통에 시달릴 만큼 펑펑 울었다. 죽음이란 것은 정말이지 슬픔의 결정체인 것 같다.
돌아가신 이후에도 몇 년간 외할머니만 떠올리면 신기할 정도로 눈물이 왈칵 쏟아지고 마음이 저렸다. 그만큼 나는 우리 외할머니를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사랑했다.
외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얕은 치매를 앓으셨다.
만날 때마다 똑같은 말 몇 가지를 반복하셨는데 그중 하나가 '커서 작가 선생님 될 거야? 호호'였다.
나는 어렸을 때 음악을, 작곡을 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할머니가 커서 뭐가 될 거냐고 물으시는 질문에 '작곡가'가 될 거라고 말씀드렸었다.
모르는 표현이라서 작곡가가 작가가 된 것인지, 잘못 들으셨는지, 이후에 늘 나를 만나면 '우리 정모 커서 작가 선생님 될 거야~? 호호' 라며 손뼉을 치고 좋아하셨다.
그 꿈을 접은 지 몇 년이 지나 어엿한 직장생활을 하고 있을 때도 할머니는 늘 한결같이 '커서' 작가 선생님이 될 거냐며 활짝 웃으셨다.
그래서 할머니 장례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 차 안에서 마음속으로 결심했었다.작가가 되기로.
글을 쓰는 것으로 먹고사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살면서 꼭 책을 쓰기로.
시간이 많이 흘렀다.
여전히 책을 쓰는 작가는 먼 일의 일이지만 나름대로 글쓰기는 하나의 루틴으로 자리 잡아 있다.
매일 일기를 쓰는 것.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씩 이렇게 브런치에 글을 쓰는 것. 그러고 보니 브런치에서는 나를 작가라고 불러주고 있다. 할머니 나 잘했지?
할머니 보고 싶어요
생각해 보면 나는 어렸을 때부터 글 쓰는 것을 좋아했다.
싸이월드가 유행이던 시절에 다른 게시판을 모두 닫아놓고 다이어리만 열어뒀다.
일기라기보단 오글거리고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겠는 중2병 감성이 낭랑한 글이 한 바가지 있었다.
페이스북이 유행이던 시절에도, 인스타가 유행인 현재에도 그렇다. 내 SNS에는 늘 글이 존재해 왔다.
요즘 기록의 유형은 크게 사진, 영상, 그리고 글 세 가지로 구분되는 것 같다.사진은 기억을 돕는 매개체로 작용한다. '그땐 그랬지'라며 추억을 일깨우곤 하는데 사실 기억은 왜곡되기 마련이다. 당시에 겪었던 다양한 환경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듯 하지만 한순간 포착된 단편에 불과하고 사실 그때의 섬세한 감정선을 명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상은 좀 더 확실한 기록이 된다. 그러나 너무 적나라하기 때문에 기피하고 싶다. 정돈되지 않은 날것의 당시 모습은 뭐랄까 좀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든다. 결과적으로 사진은 왜곡되기 쉬워서, 영상은 왜곡될 수 없어서 싫다.
그래서 나는 기록 중에 글쓰기를 가장 좋아한다.
가장 고차원적이고, 기록이라는 의미에 가장 가까운 매개체라고 생각한다. 당시의 감정과 환경을 내가 섭렵한 언어라는 세계관 안에서 무한하게 또 적나라하게 표현할 수 있으니까. 사진이 주는 추억을 상기시키는 묘미와 영상이 주는 날것의 매력이 모두 담길 수 있다. 무엇보다 글쓰기는 다소 귀찮고, 품이 많이 든다. 귀찮고 품이 많이 드는 것은 삶 속에서 더 오래 명확하게 기억되기 마련이다.
글을 잘 쓰는 것,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오랜 시간에 걸쳐 거듭 고민하고 정돈하여 기록하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세련된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필수적인 요소라고 생각이 든다. 귀찮은 것을 실행하며 얻는 낭만의 가치를 아는 사람. 그것이 바로 섹시한 어른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