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격 있게 말하기
몇 달 전 한 회원님의 수업 중이었다. 운동 중 잠시 쉬는 시간에 회원님께 올해 목표가 무엇인지 여쭤봤다.
이내 망설이시더니 '말하기, 듣기, 쓰기'라고 말씀하셨다. 가볍게 던진 질문에 다소 깊이 있는 답변에 짐짓 놀랐고 수업이 끝나고도 며칠간, 아니 그 이후로 지금껏 머릿속에 맴돈다.
나는 잘 말하고, 잘 듣고, 쓰고 있나?
작년 12월부터 한 달에 한 번씩 탈이 나거나, 사고가 발생했다.
헬스장을 인수하고 정신없이 일 하다가 한 달여간만에 13킬로가 빠졌고 1월 초 생일잔치 이튿날 너무 아파서 이러다 죽겠다 싶어 셀프로 119에 신고해 구급차에 실려갔다. A형 독감, 코로나, 장염이 동시에 걸리는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다. 구정이 있었던 2월에는 부모님 댁에 가서 신나서 밥을 먹다가 급체를 해서 연휴기간 내내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3월에는 대리 기사님이 내 차를 벽에 들이받아서 차가 박살 나고, 야유회에서 뽈을 찬다고 까불다가 아킬레스건 파열을 당했다.
이 모든 일의 배경에는 나의 입방정이 있었다.
사실 작년즈음부터 번아웃 증상을 겪고 있었다. 자도 자도 피로가 풀리지 않았고, 이전처럼 업무에 집중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짧은 시간 동안 수십 번의 업무전환을 해댔고 휴대폰을 할 때도 유튜브를 틀어놓고 인스타그램을 하다가 쿠팡을 들어갔다가 카톡이 오면 답장을 하다가 뭘 하고 있었는지 까먹기 일쑤였다.
저녁에 집에 들어와서 씻고 일기를 쓰다 보면 하루종일 이래저래 한건 많은데 도대체 뭐 제대로 한 게 없는 것 같아 허탈하고 초조했다. 그럼에도 쏟아지는 피로감에 쓰러지듯 잠에 청했고 그 삶이 몇 달간 지속되니 입버릇처럼 주변 사람들한테 하던 말이
아 쓰러지고 싶다.
안식을 필요로 하는 적절한 수준의 사고를 당하거나
건강상의 적신호가 발생하였다는 진단을 받아
명분 있게 쉬고 싶다.
나는 집단에서 다수의 즐거움을 종용한다는 취지에서 다소 과격한 워딩을 사용하고는 한다.
모두 다 속으로는 생각하고 있지만 차마 말하지 못하는 것들을 적절한 재치와 함께 활용하면 웃기니까. 솔직함은 나의 무기이자 내가 추구하는 위트이며, 가려운 곳을 속 시원하게 긁어주는 캐릭터로써 나 스스로를 구축했던 것 같다. 그게 내가 추구하는 멋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근데 그 생각에 요즘 브레이크가 걸리기 시작했다.
몇 주 전 친구의 커플과 같이 밥을 먹는데 친구의 여자친구가 나를 따라 한다고 성대모사를 했는데 너무 상스러운 단어를 채택하며 따라 하길래 민망해서 박장대소하며 내가 언제 그랬냐고 버럭 했다. 친구가 그 정도는 아니라고 말려줬지만 내심 크게 다르지는 않다고 여기는 듯했다. 당시에는 다 같이 웃으며 넘어갔지만 영 찝찝했다.
그 일이 생기고 며칠 전에는 친한 사람들과의 시끄럽고 소란스러운 자리에서 누군가 동영상을 찍었는데 거기서도 내가 사용하던 단어나 문장들이 좀 듣기 거북하다고 여겨졌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에는 취했으니까 그랬겠지 했는데 계속 거슬려하고 있다가 당시 같이 자리했던 친구들에게 사과했었다.
이렇게 되니 요즘의 나는 도대체 어떻게 말하고 있었던 거지? 싶어 고민을 시작했다.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사고들, 그 과정에서 내가 입에 달고 살았던 문장들.
나는 나이 서른넷이나 처먹고 나잇값을 하는 단어와 문장을 사용하였는가?
작년 12월부터 시작해 지난 몇 달간 내 삶에 발생되었던 다수의 이벤트, 기억이 아니라 영상이라는 객관적 자료 속 내 모습을 마주한 순간, 누군가 나를 따라 하는 모습을 보고 받은 신선한 충격. 개선의 필요성은 확실하게 인지하였다. 그러나 반성하기 전에 '왜'를 추적했다.
나는 내 멋에 산다. 하지만 내 멋에 빠져 사는 것을 경계한다. 왜냐하면 나는 오글거리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내 기준, 내 멋에 사는 것은 간지 나는 일이지만 멋에 빠져 사는 것은 오글거리는 일이다.
매우 모호한 말장난 같지만 설명을 하자면 특정 행위에 있어 그 자체를 소비하는 것보다 행위를 소비하는 스스로의 모습에 빠져있는 것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알맹이 없이 그럴듯한 포장지만 난무하는 세상에서 나는 진짜가 되고 싶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그래서 나는 요즘 SNS가 힘들다.
최근에 과도한 스트레스에 노출이 되어 있었던 것 같다. 사업적으로, 삶적으로 고민이 많았다. 서른네 살쯤 되었으면 이제 삶에 대한 방향성이나 사회적 위치에 대한 안정성을 느낄 법도 한데 매일 불안의 연속이니까. 이 와중에 미디어에 노출이 되어 관심을 받기 시작하니 스스로 경계심이 발동된 게 아닐까. 나는 병적인 자의식 과잉과 열등감에 시달리는 사람이니까. 더 열심히 살아야 하고, 더 스스로를 가치 있는 사람으로서 증명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불안감에 시달리는 사람이니까.
나는 오글거리는 사람이 되는 것이 죽기보다 싫으니까 내 멋에 빠져 사는 한심한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더 모난 워딩과 상스러운 어투로 스스로의 위치를 눌렀던 것 같다. 허울뿐인 현재의 상황과 내 주변의 것들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앞으로 내 삶을 제대로 확립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한 셈이다.
그러나 현재에 이르러 그 수단은 잘못되었음을 통탄한다.
지난 몇 개월간 부정적 문장에 이끌려온 내 삶의 행적들이 그것을 반증한다. 나의 위치는 내가 곱씹는 문장의 에너지가 이끄는 법. 더 품격 있는 단어와, 더 세련된 어휘로도 충분히 집단에서의 위트 있는 캐릭터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품격 있게 말하는 남자, 잠실섹시가 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