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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실섹시 Nov 17. 2024

30대의 삶 - 31

종교와 철학으로 내 삶을 분업화하기.


나는 하루 일정을 타이트하고 빡세게 보내는 것에 대해 나름대로의 자부심이 있는 편이다.

그리고 비교적 어린 나이에 다양한 사회 경험을 시작하여 직원 10명 내외의 작은 규모의 회사부터, 규모가 조금 있는 회사를 거쳐 현재 사업에 이르기까지 참 많은 경험을 한 것도 내 삶에 큰 자양분이 되곤 한다.


직장 생활을 할 때는 하루 중 과반수의 시간을 보내는 직장에서 나의 역할이 너무 하찮다는 사실을 견디기가 힘들었고 (회사 규모를 막론하고), 사업을 할 때는 '이런 것까지 해야 하나?'싶은 아주 작은 일마저도 그냥 되는 것이 없어서 힘들었다. 아니, 현재진행형으로 힘들다. 이렇다 보니 사실 현재로서는 차라리 뇌 빼놓고 매뉴얼대로 시키는 대로만 했던, 내가 너무 견디기 힘들었던 아주 작은 톱니바퀴의 삶이 그립기도 하다.


그렇지만 나는 타인에 비해 자기 효능감에 대한 집착이 심한 편이다. 그러다 보니 하루 중 과반수 이상의 시간을 보내는 이른바 '노동' 시간이 긴 것에 대해 큰 저항감이 없다. 비효율을 극도로 혐오하는 성격 탓에 시간 낭비라고 여겨지는 모든 순간을 견디지 못하니, 사실 일할 때가 가장 마음이 편하고 성장하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또, 아무래도 사업하는 사람들은 "퇴근"의 개념이 보편적인 직장인들과는 차이가 있다 보니 나처럼 기질적으로 불안이 높은 사람은 집에 와서도 사업체에 대한 다양한 고민거리들을 해소시키기 위해 일 아닌 일을 하기도 한다. 운전을 하다가도 자영업자들의 이야기를 눈여겨보고, 밥을 먹으며 업계 커뮤니티를 통해 업계 소식을 업데이트하고, 운동을 하면서도 유튜브로 남들의 업무 방식에 주목하고. 그러다 보니 사실상 일과 사생활에 대한 경계가 무너진 생활을 했다.


이러한 생활 방식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으로는 업무상 결과가 또렷하지 못할 때 느껴지는 허탈함이 우울감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데 있다. 조직 문화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과업은 팀워크로써 어떠한 큰 목적을 위해 분업화된 업무의 형태로 할당되니 내 할 일에 대한 명확한 경계가 존재한다. 따라서 프로젝트 자체적인 성과보다는 나에게 주어진 과업만을 신경 쓰면 되곤 했다. 물론 큰 그림 자체의 성과가 좋으면 더할 나위 없지만 그렇지 못했더라도 나의 책임을 덜 수 있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아주 큰 베네핏이 된다. 그러나 사업을 전개할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큰 그림부터 밑그림, 세부적인 계획은 물론이거니와 실행까지 혼자서 해야 되니 늘 업무 로드가 상당해진다. 기획부터 실행, 그 모든 과정에서 내 책임의 꼬리를 자를 수 있는 영역이 1도 없으니 늘 상당한 불안에 시달리게 된다.


보통 자영업자에게 있어서 큰 프로젝트란 결국 '매출'에 있다. 더 정확히는 '순익의 비율이 높은 매출'이다.

모든 자영업자의 숙제인 만큼, 늘 시달리는 고민들을 어떻게 해소할까 전전긍긍하며 여러 가지 방법들을 도모해 보지만 영 석연찮은 결과들에 정신적 육체적 한계에 부딪힌 지 오래였으나 나는 늘 스스로를 몰아세웠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에게 최선이란, 몸이 어디 하나 맛이 가거나, 쓰러지거나, 뭐 하다못해 코피라도 흘려야 한계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무래도 드라마나 영화의 영향인 것 같다.

그래서 늘 극심한 피로에 시달리면서도 아직은 할 수 있다고, 해야만 한다고 스스로 몰아세우며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하루하루 연명하던 어느 날이었다.


약 3년간 오전 8시에 pt를 받으시던 회원님께서 다니시는 교회 내 선교회에서 전도 활동을 해야 하는데, 그것을 모의연습할 대상이 필요하다며 도움을 요청하셨다. 나는 모태신앙으로 기독교에 대한 큰 저항감도 없을뿐더러, 코로나 이후 교회와 멀어져 중단된 종교활동에 대해 도의적인 마음의 짐이 있던 터였다. 흔쾌히 수락을 했고 다양한 대화가 오가다가 분의 권사님께서 준비해 오신 말씀을 들었는데 벌써 2달도 지난 그때의 말씀, 이야기가 큰 감동이 되어 여전히 나를 위로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 수리함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감당 가능한 고난만을 주십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남은 것을 기도로 하나님께 구할 뿐입니다.


내 종교적 신념을 떠나서 해당 메시지는 모든 철학을 관통하는 메시지라고 여겨졌다. 동양철학에 존재하는 진인사대천명 (盡人事待天命), 서양 격언에 'Heaven helps those who help themselves.'라는 말의 존재들을 들여다보면 모두 비슷한 의미로,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실행과 결과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에게 지려고 하는 삶의 중압감에서 조금이라도 자유롭기 위해서는 나를 위로하는 종교 혹은 철학이 필수적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교회에서 멀어진 지 조금 되긴 했지만, 모태 신앙인만큼 간헐적으로 하나님을 찾았다. 삶은 때로 '이게 맞나' 싶을 정도로 가혹하게 굴었고, 사업을 하면서 그 빈도가 더 잦아진 듯했다. 한계와 위기에 봉착하면 절대자를 찾아서 해결을 간구하는 것은 우주의 먼지에 불과한 나라는 존재에게 해방감을 안겨주는 행위를 찾아보기도 힘들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소원수리함이 아니라는 말씀을 통해 내 최선이 우선시된 후 하나님께 결과를 의탁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된 것이다.


이 날 이후 내 최선에 대해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퇴근 후에도 늘 다음 달 월세, 직원들 급여, 등 내 실행의 사기(士氣)에 불안함만 부추기는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에 잠식당하며 전전했던 다양한 플랫폼 속 '새로운' 혹은 '효율적'인 방식들을 수집하는데만 급급했다. 그러니 정작 실행할 시점에는 모든 체력이 소진되었다. 경쟁사들의 매출, 운영방식, 국내 경제가 이렇다는 이 저렇다는 이 등의 정보 수집 행위는 최선의 영역에 포함될 수 있으나 사실 명확한 실행의 결과가 없다는 점에서 본질의 궤적을 한참이나 벗어난 것이었다. 쉽게 말해 전단지를 어떻게 디자인할 것이고, 어떻게 더 싸게 제작해서, 어떻게 더 효율적으로 붙일까를 고민하느라 정작 제작도, 붙이지도 못한 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그제야 내가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들에 대해 전전긍긍하고 고민하느라 정작 해야 하는 것들에 대해 쏟아야 할 에너지를 뺏겨서 소진되었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최선은 실행의 영역에서 명료한 한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정보 수집의 영역에서의 최선은 한계가 없다. 적정 수준의 정보수집, 그를 바탕으로 한 실행 계획도 없이 무한한 정보 수집, 수집된 정보를 바탕으로 실행 계획이 수정되니 끝도 없는 굴레에 갇혔다. 그리고 그 굴레는 과부하를 불러일으켰고 실행도, 정보 수집도 간신히 '동작'만 할 뿐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던 것. 그것도 한참 전에. 사업을 한다는 사람이 초등학생들도 안다는 경제학의 기본, 기회비용을 길바닥에 철철 쏟아내고 있었다는 말이다. 나 원 참, 기가 차서.


결과가 나올 때까지 최선을 다한다는 태도. 사업가로서 반드시 갖춰야 할 태도이지만 내 최선이 미련하고 불필요한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드시 살펴봐야 할 터이다. 그리고 그 참혹한 싸움의 과정에서 종교와 철학을 동반자로 두는 것은 정신건강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동반자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하나님과 삶이라는 큰 프로젝트에서 팀워크를 전개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 프로젝트에서 최선이라는 과업을 할당받았고, 그것에 최선을 다하며 남은 결과는 하나님께 꼬리 자르기를 하겠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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