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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중적인 성우 씨 Apr 19. 2019

연애시대_#1  그와 내가 연애 5주년을 기념하는 방법

만난 지 5주년 기념이라는데, 그걸 언제부터 어떻게 계산한 건지는 묻지 못했다. 여하튼 형의 차까지 빌려와 여의도에서 나를 태우고 강남, 영동대교 남단의, 그것도 한강뷰의 스카이라운지로 향하며 남자친구는 들떠 있었다. 요즘 가장 인기 있는 드라마에서 나온 레스토랑이어서 예약하기도 쉽지 않았다며 평소의 그와 다르게 약간 으스대기도 했다.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한 남자친구는 학생이었고, 밀린 공부를 따라가느라 아르바이트를 하지도 못해 여유로운 형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몇 번이나 만류했지만, 그는 5주년은 꼭 자신이 챙기고 싶다며 단호히 내 말을 거절했다. 나는 남자친구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 그가 하자는 대로 했다.     


레스토랑은 꽤 고급스러운 분위기였다. 그 드라마에서 본 피아노와 마이크도 그대로였다. 우리가 예약한 자리는 한강의 야경이 한눈에 보이는 창가 자리였다. 남자친구는 대놓고 싱글벙글하진 않았지만, 눈가에서 입가에서 미처 숨지 못한 웃음이 자주 삐져나왔다. 그런 남자친구를 보니 나도 기분이 좋았다.    


평소 먹는 밥값에 ‘0’이 하나 더 붙은 메뉴판을 찬찬히 살피고 있는데 남자친구가 그중 제일 비싼 축에 드는 안심 스테이크를, 후식까지 나오는 세트로 두 개 주문했다. 스테이크 가격이 너무 비싸서 한 개 정도는 파스타를 먹자고 하려고 했는데. 그는 그런 내 마음을 짐작하고는 스테이크로 두 개를 주문하며, “괜찮지?”라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남자친구와 마주 앉은 식탁엔 손가락 세 개만 한 크기의 스테이크와 죽순 세 개, 완두콩 몇 알, 그리고 어떤 놈이 깎아놨는지 면상을 후려갈기고 싶은 ‘콩보다 조금 큰’ 당근 이 있었다. 희고 커다란 접시의 여백엔 소스가 한 폭의 동양화처럼 그려져 있었다. 우리는 당황했지만 당황하지 않고, 서로에게 미소를 보내며, 스테이크를 먹기 시작했다.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자수가 놓인 냅킨을 무릎 위에 살포시 얹고, 더 고급스러운 은식기 위의 커트러리 세트로.


느긋이 먹으며 야경을 구경하기엔 너무 적은 양 때문인지 화려한 한강뷰는 어느샌가 보이지 않았고, 처음에 봤던 메뉴판 생각만 머릿속을 뱅뱅 돌았다. 그나마 접시를 너무 하얗게 비우는 것도 왠지 너무 없어 보이는 것 같아 내가 죽순 두 개를 남겨 놓으니, 남자친구도 그 눈치를 챈 건 지 당근 한 개와 죽순 한 개를 남기고 식사를 마쳤다.        


후식으로 나온 커피는 내린 지 오래되어선지, 로스팅 자체를 너무 태워선지, 맛대가리도 없었다. 우리는 먹는 둥 마는 둥, 그렇다고 깔깔대며 기분 좋게 5주년을 즐기지도 못하고, 라이브로 연주하는 남미 계의 연주자들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창 밖으로 보이는 한강의 야경이 답답하게 느껴져 이만 나가고 싶다고 하자, 남자친구는 계산을 하고,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퇴근시간 올림픽대로 옆이라 매연 가득한 하늘인데도 밖으로 나오니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아 우린 서로 아무 말도 안 했지만 그 비싼 저녁 값이 목에 걸린 콩만 한 당근마저 위장으로 내려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이런 기분으로 집에 가고 싶지 않아, 오랜만에 나왔는데 한강변이나 걷자고 했다. 우리는 형의 차를 안전히 주차하고, 요즘 가장 핫하다는 유명 레스토랑에서 함께 보기로 했던 그 야경 속으로 들어가 손을 잡고 걸었다.       


몇 분이나 걸었을까. 어이없게도 배가 고팠다. 어른들 말씀처럼 돌도 씹어먹을 나이였던 한창때의 남자친구는 더 했으리라. 뉴스에서 신문에서 IMF란 단어가 매일매일 쏟아져 나오던 1997년의 겨울. 후식으로 나온 맛대가리 없는 커피 값까지 그 당시 돈으로 20만 원짜리 스테이크를  먹고 느끼는 허기란, 불쾌하다기 보단 씁쓸했다. 그리고 좀 더 있으니 슬슬 부아가 나기도 했다. 이런 나 자신이 20만 원짜리 저녁을 먹기 전에 나보다 훨씬 더 찌질하게 느껴졌다.      


1997년이었다. 주가가 폭락하고, 직장인이었던 나 역시 보증에 대출에, 학생인 남자친구에게 구구절절 말하지 못했을 뿐 넉넉한 사정이 아니었다. 메뉴판을 보기도 전에 나는, 그 가격에 그 저녁을 먹으려면 차라리 그 돈을 그냥 내게 주면 어떠냐고, 나는 칼국수 한 그릇도 너와 함께라면 좋다고,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말들이 있었지만 차마 하지 못했다. 그냥 남자친구가 준비한 저녁을 즐겁게 먹기로 했다. 주변머리 없고 융통성 없는 그가 얼마나 물어물어 알아본 곳이었을까. 등록금을 벌기 위해 휴학도 했었던 그가, 그 빠듯한 가운데 얼마나 오랜 기간 준비했을까.          


우린 그렇게 짐작만 할 뿐 서로의 사정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건 배려이기도 했지만 구차해지기도 싫었다. 그래서 그날도 우린 각자 해야 했을 말들은 삼채로 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마주 앉았다. 심지어 남도 아니고, 찌질한 나를 보이기엔 자존심이 상하는 정도의 그런 먼 친구도 아니고, 사랑하고 있음을 기념하고 싶은 연인이었으면서도 그랬다.   




“우리, 오뎅 먹을까?”        


걷다 보니 저만치에 붕어빵과 오뎅을 파는 노점이 불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오뎅을 먹자는 내 말에 잠깐 멈칫하는 남자친구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나는 그의 대답을 듣지 않은 채 그의 손을 잡고 오뎅을 파는 곳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그 날 우린, 오뎅을 스무 개나 먹었다. 남자친구가 열두 개, 내가 여덟 개.           


우린 두 개째 오뎅을 먹으며 ‘풋’ 하고 웃었다. 네 개쯤 먹을 때 우린 깔깔 웃었다. 여섯 개쯤 먹을 때 우린 정신없이 즐거웠다. 이 사람 저 사람이 다 찍어먹었을 것 같은, 그릇 둘레가 깨로 범벅이 되어있는 간장 종지에 오뎅을 찍어 맛있게 먹었다. 노점의 환한 조명 탓인지, 오뎅이 담겨 있는 통은 아까 그 레스토랑에서 본 나이프와 포크를 담은 은식기와 비슷한 색깔로 보였다. 우린 그 은빛의 국물 통에서 오뎅을 꺼내먹고 종이컵에 뜨거운 국물을 따라먹으며 목에 걸려있던 죽순과 당근을 내려보냈다.            




우리는 살면서 이따금 그런 ‘찰나’를 만나곤 한다. 왠지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뭔가를 들킨 것 같이 얼굴이 훅 붉어지는 게 느껴지는 찰나. 누가 보고 있지도 않는데 감추던 내 치부가 드러난 것 같아, 뜨거운 냄비를 아무 생각 없이 맨 손으로 집은 것처럼 ‘앗, 뜨거라’ 하는 찰나. 그런 찰나를 만난다 해도 고개 숙일 것 없다. 그 찰나를 부끄러움으로 기억할 것도 없다.     


누구를 위해 부끄러운가. 나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이면 된다. 권력 앞에서 비겁함을 선택했을 땐 모욕감을 느끼지 않으면서, 물질 앞에서 정직하지 못했을 땐 수치스러워하지 않으면서, 부모의 가난이나 혹은 당장의 얇은 지갑을 들켰을 때 모멸감을 느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사람들은 우리 생각보다 남 일에 별 관심이 없다. 혹 그중 몇몇이 내 얇은 지갑을, 내 부모의 가난을 ‘그렇다더라’ ‘이렇다더라’ 떠들어 댄다 해도, 그건 성숙하지 못한 그들의 태도를 나무랄 일이지 우리가 스스로를 부끄러워할 일은 아니다. 그 떠들어 대는 몇몇이 좀 더 나은 환경에서 나이에 맞는 사고와 고민을 하지 못하고 미성숙하게 자란 걸, 아주 조금 안쓰러워하면 그뿐이다.          




1997년 겨울, 형의 차를 빌려와 나를 태우고,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썰며 5주년을 기념해주고 싶었던 남자친구의 마음을 나는 기억한다. 스카이라운지에서 보고 싶었던 야경을 차마 즐겁게 보지 못하고 그 야경 속으로 들어가 오뎅을 함께 먹자고 한 내 마음도 그는 알 것이다.

그는 지금의 내 남편이 되었고, 우리는 오늘도 함께 아침을 먹었다.          


요즘 왼쪽 어깨가 아파 병원에 다니고 있는 내 어깨에 파스를 붙이며 남편은,

“나 몰래 어디 야구하러 다녀?” 하고 농담을 건넨다.

투수야. 좌완” 하고 나는 그걸 또 받는다.

“류현진이야? 큭큭” 하고 남편이 웃는다.

“거의 그 급이지. 푸하하” 하고 나는 대답했다.     


1997년의 그 둘은 그렇게, 2019년 개그듀오가 되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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