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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돈 Nov 27. 2019

이글레어

나이트캡(Nightcap)이라는 단어가 있더라. 잠들기 전 숙면을 돕기 위해 마시는 한 잔의 술이란 의미다. 한 잔의 술이 정말로 숙면에 도움이 되는지에 대한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침대에 들어가기 전 독한 위스키를 한 잔 들이켜는 행위는 잠들기 위한 의식으로 매우 적합해 보인다. 어쩌면 가장 훌륭한 음주문화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40도짜리의 술에 혀가 적응을 해버린 지금의 나는 종종 위스키를 이용한 나이트캡의 은총을 받고 잠들곤 한다. 해외출장을 갔을 때와 돌아왔을 때, 불면증에 시달릴 때, 휴일에 낮잠을 거하게 자버려 밤잠이 안 올 때 위스키 한 잔을 따르고 나면 왠지 모르게 이제는 잘 수 있을 것이란 근거 없는 평온함을 만나곤 한다.


3번째 미국 출장에서의 나이트캡은 버번위스키를 목표로 삼았다. 이전의 미국 출장에선 미국 주류 샵의 방대한 주류 라인업에 압도되어 비교적 한국에서도 익숙하게 접했던 위스키엔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었다. 그러나 돌고 돌아 결국 미국에선 버번위스키를 마셔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미국에 도착하여 곧바로 찾아간 동네 리쿼 샵은 미국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동네 조그만 슈퍼마켓 크기에 술만 잔뜩 진열해놓은 곳이었다. Bevmo 같은 대형 매장이 아니었기에 바틀 관리를 정성스럽게 한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지만 대형 매장에선 찾을 수 없었던 희귀한 위스키들이 몇 개 보였다. 한국으로 가져갈 프리미엄 위스키 한 병과 함께 미국에서 나이트 캡으로 마실 위스키 한 병을 골랐다. 바로 이글레어였다.


이글레어 10년. 바틀엔 10년 숙성이라고 쓰여있진 않지만 온라인 정보상으론 최소 10년 이상 숙성 위스키라고 한다. 버번위스키를 10년이나 숙성하다니. 집에 고이 모셔놓고 있는 부커스도 숙성기간이 6~8년 정도로 기억하는데 이 35달러짜리 버번이 10년 숙성이라니 믿기지 않는다. 이글레어는 버팔로 트레이스로 유명한 버팔로 트레이스 증류소에서 생산하는 상위 라인업 위스키로 합리적인 가격에 훌륭한 품질을 자랑한다고 알려져 있다. 물론 국내에선 미국 현지 가격보다 3배 이상 비싸지기 때문에 선뜻 손이가지 않지만, 미국에서 나이트캡으로 마시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선택이었다. 당연히 잠이 올리 없는 미국에서의 첫날, 아쉬운 대로 플라스틱 컵에 한잔 따르고 의자에 앉는다. 이번 출장도 무사히 마칠 수 있길 기원하며 잠들기 위한 의식을 치른다.

이글레어 10년

먼저 향을 맡아본다. 강렬하지 않다. 짐빔과 잭다니엘로 버번위스키를 접했던 나는 강렬한 알콜 향에 코와 입안이 화끈거리던 기억을 잊지 못한다. 내가 기억하는 버번위스키는 강렬한 알콜, 강렬한 바닐라향, 강렬한 나무향... 모든 것이 강렬하게 자기주장을 하는 드센 술이었고, 콜라 또는 다른 리큐르와 섞었을 때 그 성격이 완화되어 더 맛있어지는 술이었다. 그러나 이글레어는 달랐다. 우선 알콜향이 튀지 않았다. 마치 고숙성된 스카치위스키 마냥 자연스럽게 음료에 알콜이 녹아들어 있는 느낌이다. 버번 10년 숙성의 내공인 듯하다. 버번  특유의 강력한 바닐라 향이 있지만 그 바닐라 향 주위를 화사한 꽃 또는 허브 냄새가 에워싼다. 향으로 이미 내 기분은 충분히 푹신해진다. 버번에 대한 경계심이 허물어지는 기분 좋은 향이다. 코를 더 잔 속으로 파고들어 향을 맡아보려 해도 알콜 향은 쉽사리 느껴지지 않는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도수는 더 높으면서 알콜의 날카로움을 잡다니. 버번 10년 숙성의 힘이 이 정도나 되는 것일까.

신비로운 향을 마음속에 간직한 채 입으로 넣어본다. 바닐라향이 무자비하게 내 입안을 강타한다. 설탕을 첨가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달달함이 입안에 함께 퍼진다. 그리고 뒤따라 우디한 맛이 따라온다. 나무를 핥는 맛. 새 오크통을 사용하는 버번위스키에서는 자연스레 나타날 수밖에 없는 향이다. 그러나 지배적이지 않다. 좀 더 우세한 바닐라향, 그리고 함께 뒤따라오는 섬세한 꽃 향기들이 나무 맛의 주장을 약화시킨다. 입 안에서 바닐라와 꽃 향이 모두 사라졌을 때, 나무 맛은 드디어 긴 여운으로 혀를 맴돈다. 스파이시함 또는 얼얼함도 함께 혀와 남는다. 나는 버번이었다 라고 외치는 듯하다.


바다 건너온 나라에서 맞이하는 첫 밤을 이렇게 훌륭한 위스키와 함께할 수 있음에 마음이 들뜬다. 언제나 해외출장은 내게 거대한 걱정을 선사하지만, 숙소에 도착하여 더 이상 피할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때, 걱정해봐야 소용없는 시간이 와버렸을 때 긴장을 풀기 위한 술 한잔은 몸에 크게 나쁘지 않다고 믿는다. 본래 나이트캡의 의미를 생각하면 한 잔으로 끝내야겠지만 이러한 기분을 좀 더 즐기고 싶어 조금 더 마셔버렸다. 나이트캡은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고 말았지만, 약간 취한들 어떠한가.

기분 좋은 마무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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