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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돈 Mar 20. 2022

몽키숄더

포기가 늘었다.

대전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통근을 시작한 지 1년 반이 지났다. 6시 반에 집에서 나가 8시경 회사에 도착한다. 5시 반에 퇴근을 하면 7시 반까지 운동을 하고 9시경 집에 도착한다. 씻고 늦은 저녁을 간단히 먹고 11시쯤 잠든다. 간혹 야근을 할 때면 12시 반쯤 잠들기도 한다. 서울 집값이 비싸 자취를 포기하였고, 자취를 포기하니 평일에 약속을 잡는 것을 포기하게 되었다. 초반엔 맥주라도 한 캔 사 와서 혼술 후 잠들곤 했었는데, 이젠 그마저도 포기하였다. 시간은 점점 부족해지고, 나이가 들면서 체력은 안 좋아지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술을 마시며 여유롭게 맛과 향을 즐기며 글로 기록하는 시간은 서울 통근 직장인에겐 쉽사리 허락되지 않는다.

직장인의 삶은 유쾌하지 않다.


술에 대한 열정이 예전만치 못한 데에는 술을 사러 갈 시간이 없는 이유도 크다. 과거엔 좋은 가격에 입고된 술이 있다면 자전거를 타고 1시간 넘는 길을 이동하여 구매했었지만, 서울로 직장을 옮긴 후로는 그런 여유가 없어졌다. 나 같은 사람에게 데일리 샷이라는 구매 수단은 매우 고맙다. 가격은 싸지도 비싸지도 않지만 가까운 장소로 다양한 술을 배송받아 구매할 수 있기 때문에, 조금 더 비싸게 사더라고 시간을 아끼기엔 매우 좋다. 평소 관심 있던 술이 입고됐다는 소식을 들으면 최저가가 아니더라도 크게 망설이지 않고 구매를 하곤 한다. 3월엔 몽키숄더가 입고되었고 고민 없이 구매하게 되었다.

몽키숄더는 조니워커 그린라벨, 네이키드 그라우스와 더불어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블렌디드 몰트 위스키이다. 블렌디드 몰트 위스키는 일반 블렌디드 위스키와는 다르게 그레인위스키를 섞지 않고, 100% 몰트 위스키로만 블렌딩 한 위스키를 의미한다. 그레인위스키는 부드럽고 밍밍한 맛으로, 위스키에 편안한 맛을 부여하기 위해 블렌딩 되는 경우가 많다. 그레인위스키가 섞이지 않은 몰트 위스키는 비교적 진하고, 몰트의 꿉꿉한 맛을 가진 경우가 많다. 몽키숄더는 글렌피딕, 발베니와 같은 대중적인 위스키 증류소를 소유하고 있는 윌리엄 그랜트 앤 선즈에서 출시한 위스키이다. 글렌피딕과 발베니 원액이 블렌딩 되어있다고 알려져 있어, 위스키 애호가들 사이에 가성비 좋은 위스키로 알려져 있다.

이름도, 병의 디자인도 재미있는 술이다. 병에 특이하게 원숭이 3마리가 포개어져 있다. 처음엔 이 원숭이들이 귀여워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알고 보니 이름의 뜻은 원숭이와는 관련이 없고, 생각보다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더랬다. 몽키숄더는 위스키 증류소의 노동자들의 굽은 어깨를 뜻하는 단어라고 한다. 몰트 위스키를 제조하기 위해선 싹이 튼 맥아(몰트)를 건조해주는 작업이 필요한데, 맥아들이 골고루 건조될 수 있도록 삽으로 뒤집어주는 작업을 끊임없이 해줘야 한다. 대부분의 증류소에서는 이 작업을 기계로 하고 있지만, 발베니와 같은 일부 증류소에서는 여전히 사람이 직접 삽을 이용해 작업을 하고 있다. 삽으로 맥아를 뒤집어주는 노동자들을 몰트맨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장시간 동안 삽질을 하기기 때문에 어깨가 처지고 휘어지는 직업병을 얻게 된다고 한다. 이렇게 얻은 체형이 원숭이의 어깨와 비슷하다고 하여, 이를 몽키숄더라고 부른다고 한다. 몰트맨들의 노고를 기리기 위해 출시한 위스키가 바로 몽키숄더이다.


향을 맡아본다. 처음 마셔본 블렌디드 몰트 위스키는 네이키드 그라우스였는데, 사뭇 다른 느낌이다. 네이키드 그라우스가 셰리의 향긋함이 먼저 느껴진다면 몽키숄더는 몰트의 비릿함과 오일리함이 코를 치고 들어온다. 그 뒤에 셰리 향이 약소하게나마 잔잔하게 느껴진다. 그 외엔 다양한 향이 특별히 느껴지진 않아 바로 맛을 본다. 짜다. 저렴하게 표현하자면, 고소한 참기름에 소금을 쳐서 먹는 소금장 맛이다. 몰트 위스키임을 강조하듯이 고소한 맛과 짠맛이 강렬하게 느껴진다. 셰리의 느낌은 없고, 처음부터 끝까지 보리의 꿉꿉함이 입안을 맴돈다. 알코올 도수가 높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부드럽게 입안을 통과해서 목을 따뜻하게 만들어준다. 전체적으로 표현할 맛이 풍부하지 않지만, 몰트의 묵직함만으로 위스키가 갖춰야 할 맛을 충족시키고 있다. 저렴한 가격을 생각했을 때, 충분히 가벼운 마음으로 마시기에 합당한 위스키이다.


취하면 그 기분이 즐거워 술을 마시던 시절이 있었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았고, 내일을 걱정하지 않았다. 다음날 깨질 것 같은 머리는 전리품과 같았다. 이제는 취기가 오르기 시작하면, 이 정도면 내일의 일상에 어느 정도 영향이 있을 것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리며 슬퍼하거나 그리워하진 않는다. 절제력이 생기고 건강을 챙기게 된 지금의 음주생활이 더 만족스럽다. 한 TV  프로그램에서 유재석은 나이가 들어간다는 건 하나씩 좋아하는 걸 포기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미리 대비를 해놓지 않으면 내일 일을 작년, 재작년처럼 할 수 없기 때문에 좋아하더라도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일을 해온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말의 무게가 크게 느껴진다. 과거의 즐거움을 포기하는 대신 현재 내게 더 필요한 가치에 집중하는 게 된다. 사회인으로서의 존재감이 커질수록 그에 반비례해서 사회인 이전의 모습은 희미해지는 게 당연하다. 어쩌면 이렇게 점차 사회인의 모습이 짙어지는 것이 근로자들 나름대로의 몽키숄더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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