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칵테일
소맥에는 정답이 없다.
소주와 맥주를 섞는다. 이 단순한 레시피에 얼마나 많은 종류의 소맥들이 파생되는지 셀 수 없다.
먼저 비율. 술이 약한 사람에게 권하기 위해 소주를 매우 조금 넣은 소맥부터, 맥주로 색과 향만 첨가한 일명 '꿀물주'까지, 소주와 맥주의 비율이 어떻든 모두 소맥이다.
그다음은 기법. 나는 무난하게 젓가락 한 짝을 넣고 나머지 한 짝으로 가격하는 방식으로 주로 소주와 맥주를 섞는다. 그러나 지역 따라, 사람 따라, 분위기 따라 소주와 맥주를 섞는 방법은 천차만별이다. 하나하나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물론 섞지 않아도 된다.
이러니 술자리에서 누군가 소맥을 만들어주겠다고 소주와 맥주를 주문하면 자연스레 기대를 하기 마련이다. 이 사람의 소맥은 어떨까. 다만 너무 눈을 반짝이며 쳐다보면 제조자에게 부담을 줄 수 있기에 대놓고 쳐다보는 건 참는다.
칵테일에 왜 관심을 갖게 됐냐고 누군가가 물어보면 한 가지 이유로 확실히 대답할 순 없지만 대표적인 이유가 바로 이 소맥 때문이다.
회식 자리에서 상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김이 빠져가는 소맥을 홀짝홀짝 마시는 것은 그다지 즐겁지 않은 일이다. 미지근하게 식은, 김 빠진 소맥은 참으로 맛이 없다. 어차피 재미없는 회식 자리, 소맥이라도 맛있게 마시고 싶었고, 내가 만든 소맥으로 지쳐가는 나를 포함한 말단 직원들에게 일시적인 활기를 불어넣어줄 수 있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만화 '바텐더'에서 그런 대사가 나오던가. 의사가 몸을 치유한다면 바텐더는 영혼을 치유한다고.
영혼을 치유하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사회생활에서 빠질 수 없는 술자리에서 맛있는 술 한잔을 만들어 잠깐이나마 활력을 불어넣어주고 싶다는 게 내 칵테일 입문의 포부였다.
간간이 칵테일에 대해 알아보면서 나름 관련 자격증도 취득하고 집에 온갖 술들을 들여놨지만 아직까지 남에게 칵테일을 대접한다는 것은 쉽사리 용기가 나지 않는 일이다. 레시피대로 만들어 마셔보면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기 마련이다. 특히나 소맥같이 기본적이고 보편적이며 간단한 칵테일은 난이도가 극악이다. 사람들에게 너무나 익숙하기에 더 맛있게 만든다는 건 나 같은 칵테일 입문자에게는 불가능에 가깝다.
보리 아락이라는 술을 알게 된 것은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맥주와의 궁합이 훌륭하다는 광고글 덕분이었다. 광고를 크게 신뢰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배상면주가의 술은 신뢰하는 편이었기에, 마트에서 보리 아락을 보았을 때 자연스레 호기심이 발동하였다.
뒤쪽 라벨의 원재료 및 함량을 보면 주정보다 보리 아락 원액의 함량이 주정보다 높은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증류원액 중 보리가 차지하는 비율은 12%이다. 이 정도가 높은 수치인지 낮은 수치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뒤에 보리향도 첨가된 것으로 보아 보리의 느낌을 내기 위해 꽤 신경을 썼음을 알 수가 있다.
향을 맡아본다.
구수한 누룽지 향이다. 사실 보리라는 곡물을 요즘 시대엔 쉽사리 접할 수가 없기에 보리향이라는 게 무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기에 누룽지향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가 없다. 이런 게 보리향이었던가 하고 떠올려보지만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한 입 가져가 보는데 입 속에 들어가기 전부터 일명 '보리향'이 입속에 퍼진다. 입 속에 들어가자 보리향이 더욱 깊숙이 퍼져가면서 입안을 점령한다. 목으로 넘어가면서 보리향이 목을 강타하는구나 싶더니 알코올 향이 곧바로 올라온다. 21도의 소주라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적당히 단 맛이 느껴지고 역하지 않은 알코올 향과 보리 향이 입안에 남는다. 잔향이 꽤 오래가는 느낌이다.
보리 아락의 구매 목적은 맥주와의 블렌딩이었기에 편의점에서 구매한 독일 맥주 벡스와 섞어보도록 한다.
향을 먼저 맡아본다. 보리향이 살아있다. 맥주 안에 들어가서도 그 강렬했던 보리향이 조금은 뿜어져 나온다. 한 입 가져와본다. 마실 때는 보리 아락 고유의 목을 강타하는 보리향 느낌은 거의 들지 않는다. 다만 액체에서 보리의 맛이 느껴진다. 강렬한 향으로 인해 가려져있던 보리 아락의 보리 맛이 맥주에 희석되면서 발현되는 느낌이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일반적인 소맥과는 달리 소주의 알코올 향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보통 카스에 참이슬을 섞으면 맥주 사이로 소주의 약간은 날카로운 알코올 향이 파고들어 목을 때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맥주와 보리 아락의 조합에서는 알코올 향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보리 아락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맥주 속으로 녹아들었다는 느낌이다.
보리 아락과 맥주는 썩 괜찮은 조합이었다. 칵테일이라고 하면 여러 가지 음료가 섞여 새로운 시너지를 발생하여 새로운 음료가 탄생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카스와 참이슬을 섞는 일반적인 소맥은 칵테일이긴 하지만 그들의 조화가 새로운 맛을 만들어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 각자의 맛이 함께 나타날 뿐이다. 하지만 보리 아락은 달랐다. 자연스럽게 맥주 속에 녹아들면서 혼자서는 찾기 힘들었던 보리 맛을 새로 피워냈다.
맛있는 소맥을 만들어 활력을 불어주겠다는 내 포부가 얼마나 거창한 것이었는지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다. 보리 아락은 특유의 보리 맛으로 소맥에 풍부함을 불어넣어줬지만, 회식 자리에서 내 앞에 있을 참이슬과 카스로는 이런 시너지가 쉽지 않을 것이다.
간단한 레시피의 칵테일일수록 맛있게 만들기가 어렵다고 한다. 간단한 만큼 그 안에서 특별한 맛을 이끌어내는 것이 힘들어진다. 그러나 소맥 같은 뻔하고 흔해빠진 칵테일일지라도 분명히 더 맛있게 만드는 방법이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방법을 찾아낼 때까지 술에 대해 계속 정진하고 싶다.
즐겁게 취하면 그만일 것을 왜 술에 대해 그리 심오하게 알아보려 하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나의 대답은 명료하다. 취하기 위해 마시는 것보다 마시다 보니 취하는 것이 더 즐겁기 때문이다. 술은 자연이 선물해준 너무나 복잡하고 아름다운 세계이다. 이 세계에 한 발짝씩 다가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취기가 오르기 마련이고, 나의 정신은 들뜨기 시작한다. 감사할 따름이다. 세상엔 맛봐야 할 술이 무수히 많고, 그들의 대기열만으로 내 여생을 채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