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를 갈구하는 쾌락
쾌락은 도덕의 잣대를 들이대기 전에, 이미 그 자체로 지독히 편향적입니다. 그것은 과거의 회한이나 미래의 불안을 허용하지 않죠. 오로지 '지금'이라는 칼날 같은 현재를 향해 극단적으로 달려갈 뿐입니다. 하지만 이 극단적인 현재는 자유가 아니라 결박입니다. 쾌락의 정점에 서는 순간, 우리는 광활한 시간의 선형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단 하나의 점으로 응축하죠.
우리는 본능적으로 압니다. 쾌락에 점령당한 이는 더 이상 우리가 알던 그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죠. 점으로 갇힌 시간 안에서 내일은 소거되고, 이후의 서사는 고려되지 않습니다. 그 순간의 얼굴이 불안을 자아내는 이유도 바로 이 '단절' 때문이죠. 삶의 맥락으로부터 잘려 나가, '찰나의 강도'로 묶여버린 존재. 그것은 도망칠 수도, 멈출 수도 없는 감금입니다.
비극은 이 단절이 가장 친밀한 관계 속에서 일어난다는 점입니다. 사랑의 절정에서 우리는 상대를 마주하는 동시에, 또한 그를 잃습니다. 그토록 갈구했던 사람의 얼굴에서 익숙한 표정과 다정한 눈빛은 사라지고, 극단적인 현재에 점령된 '낯선 얼굴'만 남게 됩니다.
낯섦의 이유는 원초적 욕망이 거침없이 통과하는 통로가 바로 그 얼굴이기 때문이죠. 자아의 방어기제가 무너진 이 얼굴에는 관계도, 성격도, 우리가 쌓아온 시간의 흔적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정작 그 안에는 그 사람이 부재하는 상태. 우리는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그가 너무 멀리 가버렸음을 목격합니다.
인간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 '멀리 가버린 얼굴'에서 형언할 수 없는 불안을 느꼈던 거 같습니다. 자아가 흐려지고, 내가 사랑하는 이가 욕망의 매질로 변모하는 순간을 날것 그대로 두기엔 너무 위험해 보였을 테니까요. 그래서 인간은 ’신성‘이라는 두꺼운 비단으로 '성'을 감싸기 시작했습니다.
성은 결코 아름다워서 신성해진 것이 아니죠. 오히려 그것이 가진 파괴적인 힘을 감당하기 위해 만들어낸 보호 장치가 신성함일지 모릅니다. 자아가 해체되고 연인의 얼굴이 사라지는 그 강렬한 혼돈이 공동체와 개인의 삶을 무너뜨리지 않도록, 우리는 '고귀함'이라는 이름으로 그 두려움을 봉인했던 겁니다. 성의 신성화는 경배가 아니라, 제어할 수 없는 거대한 힘에 대한 경외이자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알고 있는 얼굴'에 묶어둡니다. 그리고 예측 가능한 반응과 안정적인 서사 속에서 사랑을 정의하죠. 그러나 쾌락의 순간은 이 모든 안온함을 배신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낯선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죠.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깊이 사라진 그 얼굴을 보며, 그것이 그 사람의 '가장 깊은 층위'이자 '가장 솔직한 본질'이라고 오해합니다.
인간은 가득 찬 맥락보다 비어 있는 구멍을 더 맹신하는 기질이 있습니다. 설명이 풍부하고 서사가 분명한 상태보다,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공백 상태에 더 큰 의미를 투사하기도 하죠. '자극의 강도'만 남은 그 진공 속에서 우리는 강도가 셀수록 그것이 더 진실에 가깝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그곳에 남은 것은 진실이 아니라, 의미를 붙일 수 있는 표면마저 사라져 버린 미끈한 허무일지 모릅니다.
쾌락이 매혹적인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짊어진 '의미의 굴레'에서 우리를 잠시 벗어나게 해 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끊임없이 자아를 증명하고 맥락을 이어가야 하는 피로함으로부터 탈출하여, 극단적으로 나를 현재에 묶어버리는 '의도된 상실'같은 것이죠.
결국 우리가 절정의 순간에 갈구하는 것은 상대의 존재가 아니라, 그 얼굴이 거울처럼 비춰주는 '자기 상실의 깊이'일지 모릅니다. 우리가 사랑이라 믿었던 것은 사실 자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해방감이었고, 쾌락이라는 응축된 점 속에서 나라는 존재가 증발할 때 느껴지는 찰나의 희열이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본질이라는 거창한 단어를 빌려 쾌락을 미화하지만, 정녕 우리가 사랑한 것은 사랑하는 이가 사라진 자리, 그 비어버린 틈새로 쏟아져 들어오는 무의미의 강렬함 그 자체였을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