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라는 이름의 폭력

by 한드로

1. 나 자신에게만 가혹한 신이 되어


우리는 종종 우리 밖의 거대한 세계보다, 내 안의 작은 방 하나를 통제하지 못해 더 깊이 절망합니다. 신비로운 우주의 섭리와 예측 불가능한 운명 앞에서는 "인간이 어찌 알겠느냐"며 겸허히 고개를 숙이지만, 정작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슬픔과 무기력 앞에서는 자비 없는 심판관이 되곤 하죠. 신에게는 감히 모르겠다고 말할 수 있으면서, 자기 자신에게는 그 고백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세계 앞에서의 무력함은 겸허함이 되지만, 나 자신 앞에서의 무력함은 처벌의 명분이 되어버립니다.


2. 가성비의 늪에 빠진 고통


'의미'란 무엇일까요. 삶은 그저 일어날 뿐, 세상은 우리에게 들이닥치는 일을 친절히 설명해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거친 파도 속에서 표류하지 않기 위해 의미라는 닻을 내립니다. 이 닻은 여기서 끝이 아니라고, 다음 장이 있다고 우리에게 속삭여주죠. 그것은 망망대해 같은 생의 한가운데서 잠시 나를 붙들어두는 임시 정박지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고통을 견디기 위해 만든 이 닻이 때론 우리를 옥죄는 감옥으로 변질되곤 합니다. 모든 아픔이 반드시 의미로 환원되어야 한다는 강박이 시작될 때이죠.


효율의 논리에 길들여진 우리는 고통마저 가성비를 따지며 저울질합니다. 마음이 무너질 때면 마치 숙제를 해치우듯, 서둘러 그럴싸한 의미로 그것을 설명하려 들죠. 아직 상처에서 피가 흐르고 있는데도 이 아픔이 나를 어떻게 성장시킬지에 대한 해설을 채워 넣기에 급급합니다. 마치 의미 없는 시간은 인생의 결함이라도 되는 것처럼, 우리는 그 공백을 견디지 못하고 다급하게 덧칠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고통 그 자체보다, 아무것도 되지 않는 고통을 더 힘들어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인생이라는 장부에 고통을 기입할 때, 우리는 반드시 성장이나 지혜라는 항목으로 그것이 환급되기를 바라죠. 이만큼 아팠으니 이만큼 나아져야 한다는 보상 심리는, 아무 소득 없는 아픔을 쓸모없는 낭비로 만들어 버립니다.


3. 타인에게 납득되어야 하는 아픔


우리가 고통 앞에서 서둘러 의미를 찾는 이유는, 그래야만 이 고통이 사회적으로 설명 가능한 상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회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질문하죠. "그 아픔을 통해 무엇을 배웠니?", "어떻게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니?" 그리고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고통은 손실이나 도태로 간주됩니다. 우리가 고통에 부여하는 의미의 상당 부분은 사실 내재화된 사회 규범이 발현된 것이죠. 타인에게 나를 납득시키기 위한 성적표와 같은 것입니다.


해석을 멈추는 것은 이 사회 규범이 만들어내는 소음을 차단하는 것입니다. 이 아픔이 유익해야 한다는 압박과, 해석이라는 필터가 사라질 때, 나는 오롯이 감각하는 나로 존재하게 됩니다. 사회가 정의한 '실패한 인간', '상처 입은 자'라는 껍데기를 벗어던질 때, 그저 숨 쉬고, 통증을 느끼고,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는 생명 본연의 감각이 깨어납니다. 이때의 존재감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또렷한 생존의 밀도에서 비롯되는 것이죠. "나는 왜 이럴까", "이 감정이 건강한 것일까"라는 질문의 스위치를 끄면, 의미는 없지만 존재는 오히려 선명해집니다. 목적이 아닌, 상태 그 자체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4. 고통을 재료로 쓰지 않을 권리


무의미의 상태를 오래 견디는 사람일수록 스스로에게 덜 폭력적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폭력으로 대하는 방식은 굉장히 교묘하죠. 그것은 고통을 재료로 대하는 태도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아픔조차 나를 단단하게 만들 재료, 성장을 증명할 재료, 혹은 타인에게 보여줄 근사한 서사를 완성할 재료로 사용하려 합니다. 삶이라는 공장을 돌리기 위해 내 아픔을 땔감으로 사용하는 것이죠.


여기서 폭력이 발생합니다. 고통을 재료로 보게 되는 순간, 우리는 아파하는 나 자신을 '돌봐야 할 존재'가 아닌 '수확해야 할 자원'으로 취급하기 때문입니다.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 경험을 어떻게 자소서에 녹여낼까" 혹은 "이 상처가 내 예술의 밑거름이 되겠지"라며 스스로를 위로하듯 의미를 덧씌우는 것은, 상처 입은 자아에게 다시 한번 생산성을 강요하는 비극적인 자기 착취입니다. 고통을 성장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슬퍼할 권리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아플 권리를 동시에 박탈당합니다.


5. 태풍에 꺾인 나무


고통에 서둘러 의미를 덧칠하려 했던 우리의 조급함은, 사실 그 아픔을 감당하기 버거웠다는 반증일지 모릅니다. 그저 단 한순간도 무의미하게 표류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가혹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분투해 왔을 뿐이죠.


광활한 우주는 별의 폭발과 소멸에 일일이 이유를 묻지 않습니다. 숲은 태풍에 꺾인 나무에게 어떤 교훈을 얻었냐고 심문하지 않습니다. 나를 다 담아내지 못하는 좁은 서사를 멈추고, 아픔을 도구 삼아 무언가를 만들어내려는 오만함이 멈출 때 우리는 비로소 부서진 채로도 온전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건강함이란 상처를 억지로 봉합하여 흉측한 흉터로 박제하지 않을 수 있는 용기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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