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기한

영원을 약속하는 어리석음으로

by 한드로

사랑의 기한


"사랑의 기한을 정해야 한다면, 만년으로 하겠소."

주성치 님이 주연한 영화 '서유기'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어릴 적 이 대사를 듣고 벅차오르는 마음을 진정시키느라 한동안 무척이나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만년이라는 시간은 인간의 삶으로는 가늠조차 되지 않는 아득한 세월이죠. 우리의 삶은 고작 몇십 년에 불과한데, 그 짧은 시간 속에서 영원한 사랑을 다짐합니다. 유한한 몸으로 무한을 꿈꾸는 모순과 덧없음을 알면서도 영원을 약속하는 아이러니. 그 불가능한 꿈 속에서, 사랑은 어쩌면 더 애틋하고 아름다워지는지 모릅니다.

낙엽

억겁의 약속


불교에서는 인연을 억겁의 시간이 쌓여 만들어진 현상으로 설명하죠. 일 겁은 1년에 한 번 스치는 선녀의 옷깃에 바위가 닳아 없어지는 데 걸리는 시간을 의미합니다. 일 겁의 시간이 일억 번 흘러야 만날 수 있는 인연. 바람에 스민 억겁의 짙은 향기로 우리는 그 인연을 떠올릴 수 있을까요? 수억광년의 우주를 날아 빛을 전하는 밤하늘의 별처럼, 우리의 인연 역시 억겁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아득한 시간을 흘러 우리에게 닿고 있는 중인지 모릅니다.


인연의 흐름은 거대한 강물과 같습니다. 합쳐지고, 갈라지고, 머물고, 흩어지고, 그래서 우리는 표류하게 되죠. 강물 위에 실린 작은 배처럼 말입니다. 만나고 싶다고 만날 수 없고, 끊고 싶다고 끊어낼 수 없습니다. 그저 인연의 물살에 몸을 맡기고 억겁의 시간을 견뎌야 합니다. 얽힌 인연의 실타래가 다 풀릴 때까지 애처로운 우리의 표류는 계속 되겠지요.

선녀의 옷깃


가끔은 아직 만나지 못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부재 속에도 설명하기 어려운 울림이 있습니다. 텅 빈 우주의 적막을 밀어내는 별빛, 아득한 시간을 굽이치는 인연의 물살. 그 거침없는 흐름이 만들어내는 먹먹한 울림이 어렴풋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심연에 새겨진 인연의 또렷한 기억이 꿈꾸듯 어깨를 간지럽힐 때면, 그 거대한 인연의 소용돌이에 때론 정신이 혼미해집니다.


선녀의 옷깃은 오늘도 바위를 무심히 스쳐 지나가겠지요. 그 무심함은 때로 우리의 삶을 덧없이 느끼게 합니다. 하지만 끝을 알면서도 끝이 없는 사랑을 꿈꾸는 어리석음이 인간의 숙명임을 알기에, 우리의 만남을 기적처럼 빛나게 해주는, 억겁의 울림이 들려주는 그 이야기를 의심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