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의 나.
0교시를 듣지 않아도 된다는 공식적인 허락을 받은 다음날. 반 아이들의 부러움과 질투 섞인 눈빛을 뒤통수로 기분 좋게 받아내며 무작정 학교 후문을 나섰다. 유치원 버스를 매일같이 놓치던 어린이는 고3 수험생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저녁에는 슈퍼히어로의 체력이었다가 아침 해만 뜨면 온 지구의 중력을 온몸에 떠안은 듯 인사불성인 상태를 매일같이 반복하며 0교시를 지각하거나 빼먹기 일쑤였다. 어떻게 학교를 12년째 다니면서 아침에 일어나는 습관이 안 드냐며 부디 내가 무사히 졸업해서 등교전쟁 종전의 날이 도래하기를 소망하시는 엄마의 잔소리를 흘려보내며 밥을 뜬다. 세수할 시간은 없어도 아침엔 삼겹살을 구워 먹고 가야지. 뽀얀 비계와 붉은 살코기가 적절히 섞여있는 삼겹살 두 줄을 노릇하게 구워 든든히 챙겨 먹고 배를 땅땅 두드리며 등교한다.
지각을 잡는 선생님도 수업준비로 들어가시므로 편안한 마음으로 교문을 들어선다. 교실에 들어서자 친구들이 오늘 0교시 선생님이 누구였는데 빼먹었냐며 혼날 각오하고 선생님께 빨리 가보라고 성화였다. 아차, 오늘 0교시는 우리 학교 역사상 가장 무섭다는 영어 선생님의 수업이었는데……. 제 발로 안 오면 잡으러 오겠다는 선전포고를 들은 아이들은 혹여 반전체로 불똥이 튈까 내 등을 떠밀었다. 수업은 못(안) 들었지만 어젯밤 열심히 한 숙제는 보여드려야 하기에 얼른 가방에서 영어문제집을 꺼내 교무실로 향했다.
복도를 지나 계단을 꺾어 내려가던 중 탁탁 소리가 들린다. 무슨 소리지? 한번 더 꺾으니 매로 자신의 왼손 바닥을 탁탁 치며 올라오시는 영어 선생님의 정수리가 보였다. 오늘 매는 지름 4cm의 대나무구나! 0교시를 빼먹은 단 한 명의 학생도 그냥 넘기지 않고 친히 잡으러 오는 길이셨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존경의 눈빛을 담아 고개를 위아래로 열심히 끄덕인다. 두 손을 공손히 배꼽 앞에 모으고 선생님의 뒤를 따라 교무실로 들어갔다.
“넌 도대체 왜 자꾸 0교시에 안 들어오는 거야!!”
교무실에 도는 정적. 선생님 어깨너머로 다른 선생님들이 보인다. 눈은 화면에 고정되어 있지만 귀는 모두 여기에 집중하고 계시겠지. 정신 똑바로 차려. 여긴 호랑이굴이다. 선조들의 교훈으로 떨리는 마음을 가다듬으려 노력한다. 그래, 살아나가는 길은 호랑이가 날 불쌍히 생각하게 만드는 수밖에 없어. 순간 며칠 전 뉴스가 생각난다. 요즘 아이들이 이른 등교시간으로 인해 아침밥을 거른다며 주먹밥을 나눠줬다고 하던데 그걸 써먹어보자.
“선생님~ 저 피아노 전공할 건데요~ 아침밥을 안 먹으면 하루 종일 수업 듣고 연습하는 걸 버틸 수가 없어서 어떡하죠? 저 정말 밥 심으로 산단 말이에요.”
내 이야기를 들으신 선생님의 눈빛이 흔들린다. 선생님도 그 뉴스를 보셨던 것이다!
“그래? 아침밥 때문이라… 나도 요즘 애들 아침밥 못 먹고 다닌다고 하는 뉴스 보긴 했다. 예체능이라고……. 알았다. 그럼 넌 앞으로 0교시 오지 말고 대신 밥 꼭 먹고 와!”
야호! 만세! 할렐루야! 아멘! 그 순간 난 너무 기쁘고 놀라 뛰어오르고 싶었지만 끝까지 정신을 차리기로 한다. 선생님 모습 뒤로 보이는 다른 선생님들의 입 꼬리가 씰룩 거리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이겠지? 영어선생님만 모르시면 된다. 반으로 돌아오니 친구들의 시선이 쏟아진다. 아, 얘네들은 내가 엄청나게 혼나고 올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겠구나! 친구들의 표정에선 어떻게 괜찮을 수 있냐는 듯한 안도감과 의아함이 전해진다. 안도감과 의아함이 전해진다. 얘들아, 이래서 뉴스를 봐야 하는 거야. 다 쓸데가 있다고. “나 이제 0교시 안 와도 된대!” 아이들의 눈이 커진다. 어째서? 친구들에게 나의 기지와 순발력을 발휘한 썰을 풀어주고 자리에 앉아 다짐했다. 내일 0교시 전에 와서 가방을 보란 듯이 걸어두고 땡땡이치러 나가리라!
그렇게 반 친구들의 부러움이 뒤통수에 꽂히는 것은 나의 철저한 계획이었던 것이다! 아, 아침공기가 이렇게나 상쾌했었나! 오늘은 무슨 일로 깨우지도 않았는데 일찍 일어나서 밥을 먹고 나가냐며, 해가 뜬 방향을 재차 확인하시는 엄마의 미스터리는 절대 풀리지 않을 것이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단 45분. 최대한의 휴식을 즐기기 위해 너무 멀리 가서는 안 된다. 등교할 때마다 종아리 근육 튼튼하게 하는 언덕 위의 우리 학교가 지금 보니 배산임수의 완벽한 지형이로다! 그렇다면 이 고요하고 청명함을 내 오롯이 느끼고 학교로 돌아가리. 그런데 어디에서 안전히 쉬다 가지?
힘차게 걸음을 옮기다 문득 멈추고 주위를 살핀다. 매산등이 눈에 들어온다. 앞으로 나의 0교시는 여기서 보내야 할 것이다. 나는 어디에 있어야 할까? 전학 온 중학생 때부터 셈한다면 5년째 걸어 오가던 길이 나만의 공간이 되는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그래, 이곳 어딘가에 나의 아지트가 있을 거야. 오늘은 아지트를 탐색하는 시간을 보내자. 천천히 골목골목 둘러보니 담벼락 하나, 돌 하나, 예쁘지 않은 곳이 없다. 소담하고 고요한 이곳. 나는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듯 매산등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살펴보는데 갑자기 내 앞에 계단이 나타났다. 도전정신에 비해 겁이 많은 나는 옆으로 고개를 빼내고 계단 뒤편을 바라본다. 이어져 있는 벽을 보니 반대쪽으로 내려가는 계단도 있는 것 같다. 한번 올라가 보자! 좁고 낮은 계단들을 하나씩 딛고 올라섰다. 생각보다 계단 끝이 금방 보이지 않는다. 등굣길과 점점 멀어진다. 하늘이 더 가까워진다고 느낄 즈음 생각보다 넓은 땅이 나타났다. 마치 방금 깎은 듯 잘 관리된 잔디가 보였다. 여기가 어디지?
잔디밭은 경사가 조금 있었지만 걷는 데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잔디를 조심히 밟으며 고개를 들어보니 무덤 하나가 보였다. 무덤이 있다는 건…… 이곳이 풍수지리적으로 매우 좋은 땅이라는 뜻이지 않은가! 나는 단정히 봉긋 솟아있는 무덤 옆으로 가 앉았다. “안녕하세요. 제가 땡땡이 중이라 들어와 봤는데요. 혹시 여기로 자주 와도 될까요? 별일 없으면―맘에 안 드셔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친다거나 아무도 없는데 사람소리가 들린다거나 하는―허락하신 걸로 할게요. 그런데 여기… 정말 좋네요!” 혼잣말하며 무덤 옆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는 순간, 와!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순천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옅게 아른한 안개 사이로 고요한 듯 분주한 하루가 시작되고 있다. ‘저기 있는 사람들은 내가 여기서 보고 있는지 모르겠지?’ 하나님이 된듯한 기분이 들었다. 조그맣게, 또 부지런히 움직이는 사람들은 정말로 개미들 같았다. 나름의 질서대로 돌아가는 시내를 바라보니 나도 열심히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좋은 걸 지금껏 혼자 보셨어요?” 듣는 이도 없는 부러움 섞인 투정을 괜히 하며 무덤에 기대 누웠다. 작은 연노랑 나비가 팔랑 거리며 날아간다. 흰나비도 따라간다. 눈을 감으니 바로 아래 길에서 나는 소리도 들려온다. 낡은 자전거의 바큇살이 끼긱대며 헐거워진 딸랑이가 흔들려 부딪히는 가는 소리, 집집마다 아침을 시작하는 소리, 부드러운 바람에도 빽빽한 대나무 잎사귀들이 소란하게 비벼지는 소리, 작은 참새들이 쪼로롱 거리는 소리들. 황홀하리만치 멋진 아지트였다. 조용한 소음은 풍성한 음악만큼 아름다운 것이구나. 아니, 어쩌면 세상의 무수히 많은 소리들을 악기로 따라 연주한 것이 음악이 된 것은 아닐까?
따라라란 따라라- 0교시 마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상한 나라에서 나와 학교로 돌아갈 시간이다. 아쉽지만 이렇게나 멋진 아지트를 찾은 것에 만족하며 교복을 털며 일어난다. “저 또 올게요. 그때까지 잘 계세요!” 공손히 인사하고 학교로 돌아갔다.
“어디에 있다가 왔어?” 이상한 나라에서 돌아온 나에게 친구들이 걱정과 호기심 섞인 질문을 던진다. “음… 잔디밭 같은 곳!” 다음날 아침 나는 몇 시에 일어났을까?
“안녕하세요! 저 또 왔어요. 여기가 너무 좋아서 또 일찍 일어났지 뭐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