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말들>, 홍승은 작
책을 폈다. 피식, 웃음이 샜다.
비소였다.
한 손에 들어오는 얇은 책의 왼쪽에는 두어 문장이,
오른쪽엔 겨우 한 페이지를 채우는 문장들이 쓰여 있다.
‘유명한 작가는 이렇게 편하게 글을 써도 책이 팔리는구나.’
더 이상 부정적일 수 없을만한 비뚤어진 마음만큼이나 비스듬히 앉아 훑으며 읽다가
날카로운 문장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흠흠, 다시 자세를 고쳐 앉는다.
그리고 첫 장으로 돌아갔다.
왼쪽에 있는 두어 문장과 오른쪽의 이야기들은 결단코 가볍거나 얕지 않았다.
작가는 수많은 시간을 들인 관계의 말들을 모래에서 사금을 찾듯
정성스레 고르고 고른 문장으로 정성스레 페이지를 채웠다.
한쪽을 다 읽어도 쉽게 넘길 수 없었다.
그렇게 읽고 다시 한번 또 읽었다.
<관계의 말들>은 깊고 무거운 책이었다.
나는 누구와 관계하는가?
나는 엄마이면서 아내이고 딸, 며느리다.
누군가에게 선생님이기도 친한 선배와 후배이기도 하다.
소비자가 되기도 하고 판매하는 입장이 되기도 하며
종교를 가진, 이성애자, 스쳐가는 사람 등등 …….
수많은 관계들로 나를 잘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누군가와의 관계로 나를 설명하는 것도
그저 편리하게 명명하는 것일 뿐 나 자체에 대한 설명은 아니지 않냐고 반문한다.
그러면서 그저 단순히 표현되고 정의되는 관계에 머물지 말고
조금 더 자세히 나와 우리를 보는 눈을 가지는 것이 어떻겠냐고 따듯한 권면을 한다.
작가는 우리가 보통 떠올리는 관계보다 더 많은
보통 밖의 관계들―소수라고 부르기도 하고 속삭이며 말해야 하는―수많은 관계에 대해
독자가 마주하도록 꺼내놓는다.
심지어 정의할 수 없는 관계까지 가져다 놓았다.
놀랍게도 이 보통 밖의 관계들 중에 내가 처음 접한 관계는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이 책을 펴며 이런 관계들과 잘 지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스스로 약자의 입장에 설 때가 많다고 생각했으면서도
보통 밖의 관계까진 아니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었음을 느끼게 했다.
이 책은 그렇게 내가 외면하고 상처 주며 흘려버린 관계들을
수면 위로 건져 올려 소극적이기도,
적극적이기도 했던 나의 가해를 상기시켰다.
그러고 보니 나는 함부로 평범하지 않은 관계를 저격하는 사람으로 살고 있었다.
사회적인 통념과 속한 시대에 익숙해져 버린 관습에
의식 없이 이끌려 내가 속한 관계가 보통 언저리에 머물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몇 가지 관계만을 선이고 답이라고 정의 내리는 것 또한 무리가 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비로소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이 책을 감명 깊게 읽었다고
세상의 모든 관계를 이해하게 됐다거나
그 관계들이 전부 옳다고 생각하게 된 것 또한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보통’으로 속하는 사회에 소속되어 있어서
―혹은 소속되기 위하여―수많은 관계에 대해
누구도 허락하지 않은 권리를 가진 사람처럼
마음 놓고 손가락을 흔들어댔던 내 모습이 부끄럽고 부끄러웠다.
<관계의 말들>은 읽는 내내 다정하게 꼬집으며
나의 시선을 마음껏 이끌었다.
‘나’에게로 시선을 두게 했다가 ‘우리’에게로,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던 ‘보통의 관계’에서
내가 외면했던 ‘소수의 관계’로
저항할 수 없이 직면하게 만들어 주었다.
‘우리’가 아니라 고유한 ‘따로’를 생각해도 외롭지 않은 존재의 힘을 믿게 해 주었다.
고유한 ‘따로’는 고립이 아니라 나 자신이 되는 순간이기에
우리는 거리를 둬도 괜찮다고.
그것이 ‘나’와 ‘우리’를 안전하게 지키는 방법이라고 알려주었다.
한 덩어리로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다른 빛으로 반짝이는 것.
그리하여 모든 빛이 존중받는 우주는
얼마나 아름다울지 상상하는 것만으로
아름답고 황홀한 기분이 들었다.
작가가 이야기하는 함께, 또 따로
잘 살기 위한 100가지의 이야기를
우리 모두 읽고 머금는다면
우리 모두 다정과 존중에 능숙한 세상이 될 것이라는 희망까지 생긴다.
이제야 이 책이 올해의 책에 선정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사랑은 그 자체로 선이고 답이라고 생각하고 살지만
정말 우리가 사용하는 사랑이
그 의미에 맞게 쓰이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되었다.
소외가 짙은 사회에서는 자신을 지우는 것을 사랑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정말 사랑일까?
그렇다면 누가 누구에게 지워져야 사랑인 것일까?
우리가 부르는 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모난 곳 없는 보통의 사랑이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당당히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 차별적인 시선을 가진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나는 언제나 사랑이 중요하다고 믿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사랑이란
어떠한 관계는 배제한 전제를 바탕으로 한 사랑이었다.
이 책은 내게 당신이 하는 사랑이 정말 사랑이냐고 묻는다.
나는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이제 여기서 알려주는,
나를 사랑하는 기술을 갖고 싶어졌다.
망가져야 할 상황에서도 자신을 신뢰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그렇게 자신을 믿으며 다른 이들과 연대하는 사람.
진정 사랑의 힘을 가진 사람의 모습이 내 모습이 되고 싶어 욕심이 났다.
나도 이 사랑의 힘을 갖고 싶다.
소속된 안정감에 오히려 거리를 두고
다가올지 모르는 소외를 경계하는 마음과
그것을 모르지 않으려고 애쓰는 마음을 소유한 사람이 되고 싶다.
마지막 이야기는 구어체로 말을 건넨다.
밥은 먹었느냐고, 만나서 반가웠다고.
식구들이 모두 잠든 새벽에
홀로 식탁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를
눈앞에서 보며 말하듯 지나간 99가지의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함께 흔들려 봄이 어떠했냐고 묻는다.
그리고 다정하게
어깨에 힘을 빼고 글을 써보라고 격려한다.
혹 그러다 자기 의심이 올라오더라도,
그래서 스스로를 믿기 어렵더라도
나를 믿고 지지해 주는 ‘우리’를 믿으며
계속 관계에 대해 이야기해달라고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