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치면 악보 보고 마음대로 연주해요?”
수업 상담마다 듣는 질문이다. 그다음 나도 똑같이 대답한다.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다음 질문도 똑같다. “그래도 대략적으로요.” 레슨 20년 차가 되어가니 분명히 다시 대답한다. “확답을 드릴 수 없어 죄송해요. 정말로 대략적인 평균이 없습니다.”
나는 수업 진도를 기간에 맞추지 않는다. 아니, 맞출 수가 없다. 사람마다 각자의 속도가 너무나 달라도 너무 다르다. 바이엘 1권을 잘하다가도 2권에서 한 곡이 이해가 안 돼서 한 달 내내 같은 곡을 연습할 수도 있다. 바이엘 내내 버벅거리던 아이가 체르니 들어가면 날개를 달고 곡을 연주하기도 한다. 바이엘을 쉽게 끝내고 넘어가면 체르니에서 악보 보기가 버거워서 넘어가지 못하기도 한다.
오랜 기간 아이들 레슨을 하다 보니 암묵적인 규칙이 보였다. 바이엘을 지나서 체르니 100번 후반대가 되면 고학년이 되어서 학업에 시간을 쏟느라 예체능을 포기하는 것이다. 시간이 조금 흐르면 악보 보는 법은 거의 다 까먹고 예전에 대회에서 받은 트로피를 전시하는 것으로 만족을 할 뿐이다.
사실 피아노 연주는 체르니부터가 진짜다. 그때부터 나의 음악적인 취향이 보인다. 연주곡을 골라서 나만의 방식대로 연주하고 내가 치고 싶은 악보를 골라 스스로 연주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왜 체르니 들어가면 어렵다고 그만둘까? 여러 가지 시도 끝에 나만의 레슨법을 개발했다.
피아노를 배우는 첫날부터 계이름을 배우고 입박자 세는 법을 동시에 시작한다. 자세와 손가락 끝에 힘을 보내는 것에도 신경 쓰기 어려운데 입으로 말까지 하라니 어려울 것 같지만, 아예 음악을 배우는 시작부터 하면 이 연습방법이 기준이 되고 나중엔 저절로 눈이 음표를 읽고 속으로 박자를 ‘당연히’ 세게 된다. 바이엘은 악보가 쉽기 때문에, 계이름과 리듬 훈련을 다 끝내고 체르니를 들어갔을 때는 혼자 처음 보는 악보를 보고 연주하지 못하는 경우가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이론으로 악보를 해석하는 법을 배우고, 연습실에서 계이름과 박자 연습을 해온다고 해도 선생님 앞에 서면 당연히 틀린다. 아이들은 틀렸다는 것에 상심하기도 하고 아예 수용하지 못하기도 한다. 자, 이제 틀려도 된다고 말해 줄 차례다.
“안 틀리는 사람은 선생님이 필요 없지 않을까?” 그러고는 선생님이 너만 한 때에는 더 많이 틀렸다고, 그래서 피아노 학원을 울면서 뛰쳐나갔다고 말해준다. 아이들 얼굴에 시무룩한 마음보다 이렇게 잘하는 선생님이 예전엔 나보다 못 쳤다는 이야기에 배시시 웃음이 새어 나온다.
“그런데 선생님이 그때 틀리는 게 싫다고 포기해 버렸으면 어떻게 됐을까?” 아이들은 백이면 백 똑같이 대답한다.
“우리를 못 만났어요.” 그리고 저 발그레한 볼에 배시시 흘러나오는 웃음으로 나를 녹여버린다. 그래그래, 선생님이 너 만나려고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았나 보다.
아이들이 너무 힘들어하고 지칠 땐 오늘은 그만 쉬자고 제안한다. 힘든 마음이 지속되면 악기와 사이가 나빠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손가락을 백 번, 천 번, 굴려도 안 되는 날엔 그냥 쉬라고 한다. 신기하게도 다음 날 피아노 앞에 앉았을 때 갑자기 손가락이 굴러간다. 그러니 우리, 포기하지 않기로 해.
하지만 못 쉬게 하는 경우도 있다. 박자 쪼개는 연습을 안 해왔을 때다. 이건 체르니 들어가기 직전과 체르니 초반에 보통 있는 일이다. 어느 정도 노래를 알게 되니 악보를 대충 보고 짐작으로 연습해 오는 경우다. 하루에 레슨을 다섯 번 넘게도 한다. 어떻게 다섯 번이나 하게 되냐고 묻는다. 선생님이 먼저 쳐주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대개 음악적 재능을 품고 온다. 이것이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나은 유전자들을 갖는 것인지, 한국 사람들이 음악성이 좋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한번 음악을 들으면 대부분 아이들은 외워 버린다. 음악을 외우는 것이 나쁜 것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악보를 해석하는 에너지를 쓸 필요가 없게 만들어버린다. 그것은 당장 연주를 위한 지름길 같지만, 사실 악보를 보는 법을 배우는 기회를 앗아가 버리는 것이다.
가끔 나보다 훨씬 더 청음이 좋은 아이들도 만난다. 너무나 안타까운 것은, 그 아이들이 체르니 이상을 연주하게 된 후 만나면 악보를 못 읽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내가 한번 쳐주면 레슨은 금방 끝난다. 특히 바이엘은 짧고 쉽기 때문에 대부분의 아이들은 바이엘 몇 곡쯤은 외워버린다. 그런데 체르니로 넘어가면 복잡한 악보는 외울 수가 없다. 그래서 나의 레슨은 ‘가르쳐주는 것’ 이전에 먼저 ‘질문하는 것’이다. 틀린 부분에서 멈추게 한 후, “방금 틀렸어. 뭐가 틀렸을까?” 질문한다. 선생님 앞에서 생각해 낼 수도 있고,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학생은 연습실에서 고민하고 오게 한다. 선생님 앞에만 앉으면 잘 치던 부분도 엉망으로 치게 되는 그 마음을 알기 때문이다.
물론 다시 연습실로 돌려보낼 때 아이의 마음에 에너지를 가득 주고 보내야 한다. 장난스러운 말로 웃게 만든 후 “넌 분명히 찾아낼 거야. 선생님이 레슨을 얼마나 잘하는 줄 알아? 선생님 눈에는 보여. 네가 얼마나 잠재력이 충분한지. 하지만 스스로 찾아야 네 것이 되는 거야. 선생님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힘내서 찾아와 보자. “
틀린 부분을 찾아내서 나오는 아이의 표정을 상상할 수 있는가? 아이는 마치 개선장군처럼 잔뜩 상기된 얼굴과 자존감이 충만한 상태로 당당히 걸어온다. 스스로 틀린 부분을 찾아내 결국에는 연주해 내면 나는 벌떡 일어서서 손바닥이 뜨거워지도록 박수를 친다.
“역시 해낼 줄 알았어! 선생님도 이렇게 네가 자랑스러운데 넌 얼마나 뿌듯하니?” 아이는 뛸 듯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손을 흔들며 돌아가고 다음 날 학원 들어오는 표정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렇게 아이는 자란다. 그리고 더불어 잘한다. 그리고 이후에 어려운 부분을 만나면 아이는 씩씩하게 피아노 앞에서 악보와 정면으로 씨름한다. 아이는 스스로 연주할 수 있는 연주자가 되고, 체르니 30번이 되면 나는 레슨을 하는 선생의 자리에서 내려와 조언하는 관객이 된다. 아이들이 열심히 연습해서 긴장한 모습으로 선생님 앞에서 곡을 들려주는 것, 지금까지 포기하지 않고 매일 피아노 앞에 앉았기에 지금 노래를 들려줄 수 있는 것, 그것으로도 아이는 박수받아 마땅하다. 이쯤 되면 아이는 고학년쯤 된다. 선생님과 주고받은 마음이 쌓이니 피아노 학원 안 보내주면 다른 학원도 안 간다고 부모님을 협박(?)하는 아이들도 있고, 중학생이 되면 다시 돌아오는 아이들도 많다. 매일 새로운 것을 배우고 학업으로 지친 스트레스를 음악을 연주하며 달래는 아이들, 틀려도 다시 마주하는 법을 배우고, 마음에 힘을 내는 법을 배운 아이들의 마음이 얼마나 튼튼하고 향기로운지!
나는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보며 함께 자란다. 내가 아이들을 꽃피우게 돌봐주면 아이들이 나의 꽃밭이 되어 내게 힘을 준다. 우리는 여기서 서로 돌보며 꽃 피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