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생은 멈출 줄 모르고 불어났다. 내 가 n년째 운영 중이던 음악학원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상담은 줄지어 대기 중이고, 신입 원생은 끊임없이 불어나고 있었다. 그때 우리 학원은 가운데 문 하나를 두고 두 개의 공간으로 분리되어 있었고, 함께 수업해 주시는 선생님이 세 분이었다. 학원을 인수받고 얼마 되지 않아 원생들이 줄지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학원이 잘된다고 셈해볼 겨를도 없을 만큼 바빴다. 핸드폰은 늘 전화와 메시지가 와있었고 차량 운행 체크와 레슨으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세 분의 선생님이 계셨지만 내가 레슨해야 하는 아이들 또한 너무 많아서 두 대의 피아노에 아이들이 레슨 받을 교재를 펴고 앉아서 한 명의 레슨이 끝나면 곧바로 다른 피아노에 앉아 대기하고 있던 아이가 레슨을 받는 기행(?)을 해야 할 정도였다. 와중에 신입아이가 차를 아직 타지 않았다는 전화, 왜 아직 차량이 안 오냐는 전화, 오늘 수업 일정 조정에 대한 연락, 아이가 화장실에서 울고 있다는 연락을 매일 받으며 처리했다. 엄마 손에 억지로 끌려온 아이가 수업이 끝난 줄 알고 말도 없이 가버려서 그 바쁜 와중에 잃어버린 한 마리 양, 아니 한 아이를 찾으러 학원 건물 밖을 뛰어다니는 일이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있었다.
많은 아이들이 수업에 문제없이 잘 다녀가게 하기 위해 학원 시스템을 더 꼼꼼히 살펴야 했다. 모든 문서는 엑셀로 정리했고 서류를 정리하는 일은 단 한 장도, 하루도 미루지 않았다. 아니, 미룰 수 없었다. 다음 날은 다음 날에 생겨나는 일들을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모든 레슨을 마치고 나가면 5, 6살 연년생 나의 아들 둘을 데리러 어린이집에 가서 또다시 학원으로 데리고 왔다. 남편은 저녁 12시가 다 되어 퇴근했기 때문에 학원에 밥솥과 이부자리를 가지고 와서 내 아이들을 돌보며 학원 일을 마무리해야 했다. 수업을 마감한 후에도 처리할 일들과 더 완벽한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나도 날마다 밤 11시가 넘어 퇴근했다. 다행히 아이들이 연년생이라 엄마를 기다리며 대부분 잘 놀았다. 조용히 구석지에서 집중하고 있는 아이에게 다가갔다가 소화기 안전핀을 뽑고 노는 것을 발견했다거나-다행히 누르기 전에 발견했다.-색종이와 안전 가위를 주었는데 자기 몸통보다 큰 모차르트 소나타 악보집을 꺼내 대부분의 페이지 난도질을 하는 몇몇 사고들을 제외한다면.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고 매주 새로운 특강을 준비해서 수업하는 것, 동시에 독박육아까지 담당하는 것은 내 체질에 맞는 일이었다. 하지만 끝이 없이 늘어나는 원생들과 밤늦게까지 아이를 데리고 일을 하다 잠든 아이들을 깨워, 졸면서 걷는 아들 둘을 양손에 잡고 10분 정도 되는 거리의 집을 매일 밤 걸어가는 날들이 끝없이 반복되자 점점 두려워졌다. 내가 이걸 언제까지 해낼 수 있을까. 학원도 잘 돌아가고 아이들도 잘 크고 있었지만 조금만 흔들리면 모든 것들이 와르르 무너져버릴까 봐 노심초사하느라, 조금의 실수가 돌이킬 수 없이 나쁜 결과로 돌아올까 봐 걱정하느라, 분기별로 장염에 시달렸다. 너무나 감사했지만 동시에 불안과 긴장 또한 가득한 날들이었다. 인생에도 일시정지 버튼이 있다면, 같은 터무니없는 상상을 했다. 모두가 잠시 멈춘다면 그 틈에 끼어 나도 잠시 멈춰볼 수 있을 테니. 누구의 원망도 듣지 않고 누구에게 피해도 주지 않고 한숨 돌릴 수 있는 시간. 일어날 수 없는 환상을 어쩌다 한번 생각하다가, 가끔 떠올리다가, 자주 상상해 보고, 매일 바랐다.
어느 날 갑자기, 모든 단톡방이 거의 같은 시간에 울렸다. 링크된 뉴스는 마치 재난 영화처럼 끔찍하고 현실성이 없었다. 가짜뉴스가 또 어른들 사이에 퍼지고 있는 건가?
TV를 켰더니 공영방송 뉴스에서 같은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내 눈을 의심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끔찍한 영상이 가짜뉴스가 아니라고? 한 나라에서 시작된 호흡기 바이러스는 실제 상황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전 세계에 급속도로 퍼졌다. 공기를 타고 퍼지는 바이러스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전 세계가 공포감에 휩싸였다. 예방주사도, 치료제도 없는 처음 만나는 전염병. 매일 핸드폰은 재난문자 알림과 뉴스를 공유하는 메시지를 확인하느라 놓을 수 없었고,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가 만든 벽 때문에 우리는 서로 만날 수 없었다.
온 세상이 모두 혼란 스러졌다. 학원 운영 지침을 알아보기 위해 교육청에, 시청에 연락해도 그 누구도 답을 내려주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우리 모두가 처음 겪는 일이었다. 매뉴얼이 있을 리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단 하나. 사람과 접촉하지 말 것. 나의 학원에서 바이러스가 퍼지는 것이 두려워 어느 학원보다 많이 쉬었다. 사교육뿐 아니라 공교육도 모두 멈췄다. 아이들도 학교를 가지 못했다. 집 바로 앞 놀이터가 보이는 거실 창문은 액자에 그려진 그림 그 이상이 될 수 없었다.
함께 일하던 세 분의 선생님들을 더 상황이 나빠지기 전에 정리해야 했다. 선생님들은 당장 마이너스가 아니면서 계약이 종료되는 것에 반발했다. 월급을 덜 받을 테니 자르지 말아 달라했다. 일하는 시간보다 월급을 덜 줄 수는 없었다. 그렇게 선생님들을 정리한 후 몸도 마음도 바닥나버렸다.
선생님들을 정리하고 상황은 급속도로 나빠져 몇일만에 출석부는 텅텅 비어갔다. 몇 안 되는 아이들이 들어왔다 나갈 때마다 연습실을 소독했다. 독한 알코올이 폐 안에 가득 차오르는 것 같았다. 학원을 오갈 땐 이틀에 한번 꼴로 주위 상가들의 간판이 내려졌다. 누가 더 오래 버티냐의 문제였다. 나는 남편의 월급으로 버텼다.
한 달의 절반을 수업하고, 절반은 쉬게 되는 상황에서 손 놓고 슬픔과 불안에 빠져 있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현재 처한 상황에서 어떤 시간을 보낼지 나는 선택해야 했다. 모두가 잠시 멈춘 시간 앞에서 나는 돗자리와 책을 챙겼다. 학원을 운영하기 전 전업주부였던 시간처럼-다른 점이 있다면 사람들을 피해서-작은 바닷가로, 댐 앞 공원으로, 들판으로 나가 아이들과 책을 읽었다. 아이들은 친구들을 만나는 대신 개미와 같이, 개미처럼 놀았다. 이끼를 들춰보고 나비에게 손짓하며 개구리와 같이 뛰고 새와 함께 지저귀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을 보냈다. 아이들은 가끔 '코로나 때'를 떠올리며 그때 엄마랑 매일 놀아서 좋았다고 한다.
나는 마음의 힘을 기르는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마음이 튼튼해서 거뜬히 버티는 방법을, 가능하다면 세상의 모든 방법을 배우고 싶었다. 여러 사람이 오랜 시간 동안 깊은 고민과 연구를 한 결과를 300페이지 정도로 읽기 좋게 알려주었고 몇 시간에 걸쳐 읽기만 하면 배울 수 있는 책이란 존재는 코로나 상황 중 내게 완벽한 희망이었다.
책은 오로지 학원이 안정되게 잘 돌아가게 하는 데에만 신경을 쓰던 나의 한계를 끊어버렸다. 코로나 상황이 끝났다. 나는 음악을 가지고 아이들의 마음을 키워주는 선생이 되기로 결심했다. 이후로 레슨은 이전보다 더 길어졌다. 피아노 치는 기술만 알려줄 수 없었다. 아이들이 선생님 앞에서 실패해도 자존심 상해하지 않도록 가르치는 법, 열심히 연습했으나 꼬이는 부분을 피하지 않고 결국엔 해내고야 마는 법, 연습을 충분해도 되지 않을 땐 내가 좋아하는 책을 꺼내 잠시 마음을 달래는 법, 노래를 부르며 스트레스를 날리고 위로와 용기를 얻는 법, 다른 사람의 연주를 경청하는 법, 다른 사람 앞에서 연주하다 틀리더라도 끝까지 연주를 마치고 내려오는 법, 그리고 오늘 힘들었더라도 내일 또 악기 앞에 앉을 수 있는 법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었다. 아이들의 연주가 손가락 운동에서 끝나지 않도록, 악기를 연주하며 그 음악으로 마음이 따듯해지고 유연해져서 자신만의 꽃을 활짝 피울 수 있도록 애쓰는 선생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