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방적인 짝사랑
내가 들었던 비난 중 가장 충격이 컸던 것은 "쟤는 공부만 잘해"였다. 돌려 말하면 공부 빼고 다 못한다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그 말을 했던 건 내 동생과 언니였는데 나는 한동안 그 비난의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말없이 그들을 먼 발치에서 째려보곤 했다.
그렇다고 내가 정말로 공부만 잘했느냐고 하면, 당연히 그건 아니다! 그러니까 우선 나는 공부도 제대로 하진 못했다. 그나마 집안에서 유일하게 4년제를 간 사람이긴 했는데, 어릴 때부터 사교육은커녕 문제집 한 권도 제대로 못 살 정도의 형편에서 자랐으니 다들 날 독하게 공부만 한 사람으로 알아봤다.
저들의 비난이 틀린 이유 두 번째는 나름대로 나도 잘하는 게 많다는 것이다. 공부 외에 흥미를 가진 것 중엔 운동이 있었고-실제로 운동은 학창시절 내내 반대표를 할 정도로 잘했다고!- 글쓰기는 여러 방면에서 능력을 인정 받기도 했다. 단순히 설거지나 청소 같은 집안일도 곧잘 했는데, 언니와 동생은 꼭 내가 바빠서 잘 못할 때만 그 모습을 목격했다.
이렇게 자기애가 큰 나도 절대 내 입으로 잘한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 하나는 바로 요리였다. 어릴 적부터 나는 청소와 요리를 선택하라고 하면 단 1초의 망설임 없이 전자를 골랐을 정도로 요리엔 관심이 없었다. 엄마나 언니들을 따라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보고 매년 2-3번씩 하는 차례 준비를 적극적으로 돕기도 했지만, 영 재미는 없었다. 내 입엔 거의 대부분의 음식은 맛있었기 때문에 굳이 무언가를 엄청난 정성과 노력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에 공감하지 못했다. 특히 더위에 취약했기 때문에 가스불 앞에서 오랜 시간 서있는 게 너무 고통스러워보였다.
그러다가 내가 본격적으로 요리를 했던 건 취업준비생 시절이었다. 하루종일 집에 있는 사람이 나였으므로 자연스레 온갖 집안일을 도맡아 했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가족들의 저녁식사를 책임지는 것이었다. 나는 취준생 신분으로 공부를 하다가도 저녁시간이 다가오면 그날의 메뉴를 고심하는 주부로 변신했다. 되도록 시켜 먹지 않고 직접 만들 수 있는 집밥을 많이 했는데,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요리의 매력을 발견했다.
요리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집중력을 극도로 끌여올려준다는 것이었다. 딴 생각을 하면 곧바로 손이 베이거나 뜨거운 물에 데였다. 한두번 그러다 보니 요리를 할 때만큼은 오롯이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그저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레시피와 재료들, 무언가를 맛있게 만든다는 행위에만 집중했는데 이게 또 은근-히 나의 마음을 묘하게 치유하고 자극했다. 어쩌면 나의 인생 암흑기도 이런 소소한 힐링들이 모여 극복할 수 있었을지도?
그 뒤로 나는 기회가 닿으면 요리를 한다. 주변에서 누군가 "OO이 먹고 싶어!" 라고 하면 주말엔 장을 보고 재료를 사다가 열심히 음식을 해서 그(또는 강아지들)에게 진상한다. 중요한 건 아직도 잘하진 못한다는 것이다. 세상 모든 일이 다 그렇듯, 어떤 일을 잘하려면 타고나야 하는 센스가 있는데 나에게는 그 능력이 좀 부족한 것 같다. 한동안은 열심히 해도 늘지 않는 실력에 의기소침하기도 했는데, 최근에 회사 팀장님과 식사를 하다가 들은 한 마디로 인해 앞으로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OO씨는 요즘 취미가 있어?"
"저... 요리요.
"정말?"
"잘하진 못하고요... 하는 걸 좋아해요."
"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그거야~ 하는 걸 좋아하는 거. 그게 더 최고야."
그 때 깨달았다. 그래, 잘하지 못하면 어때? 하는 걸 좋아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인정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일방적인 짝사랑도 사랑이라고! 그리고, 혹시 알아? 계속해서 대시하다보면 그 타고나야 하는 센스를 뛰어넘을 무언가를 내게 가져다줄지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