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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운 Feb 11. 2024

앞으로 가기 힘들 때는 잠깐 옆으로 걷자.


가끔 그런 날이 있다. 미치도록 잘 안 풀리는 날. 가뜩이나 열이 받는데 만나는 사람들도 어쩜 그렇게 날이 서있고 최악인지. 늘 보던 사람들임에도 낯설게까지 느껴진다.

그럴 땐 가장 최고의 방법은 조용히 집에 들어와 아무도 없는 방에서 몇 시간 내리 예능 프로그램의 유투브를 보거나 뉴에이지를 듣고, 액션영화와 소설을 보다가 잠드는 것이다. 거지 같은 하루의 마무리는 조용히 혼자 짓는 것. 그래서 나만 알고 있는 나의 까마득한 과거처럼 잊어버리는 게 가장 좋다.


하지만 우리네 일상은 그럴 수 없는 날이 태반이라 하루가 끝나가는 11시 59분까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없는 경우가 많았고 그럴 땐 마음의 준비도 없이 새로운 하루가 시작해버려서, 어쩐지 이 날까지 악의 기운이 고스란히 뻗치는 기분을 맛보곤 했다. 그런 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오늘 나는 옆으로 걸었구나.'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기면 우린 앞으로 걷는 게 당연하겠지만 그럴 수 없는 날도 있는 것이다. 그럴 땐 난 늘상 말 잘 들었으니까 오늘만 좀 거스를게요, 당당히 통보하고 옆으로 걷는다. 무심하고 또 담담하게. 그렇다고 어쩔 수 없이 걷는다는 게걸음이 아니라 몸을 좌양좌, 우양우 어느 방향이든 원하는 곳으로 돌린 다음 묵묵히 벽을 따라 쭉 걷는다.


하루를 그렇게 걸었다고 생각하면 평소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곤 했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빡빡한 스케줄을 소화했는지부터 시작해 생각보다 24시간은 길고 지루하다는 것, 늘 따뜻했던 사람들은 그저 사회적인 얼굴로 날 대했을 뿐이며 가깝다고 생각했던 이가 얼마나 희생하고 날 배려하고 있었는지. 옆으로 걸었을 뿐인데 내 시선에 담기는 것은 더 많았다.


그런 생각이 들면 갑자기 오늘은 생각보다 최악이 아니었구나, 라고 스스로 위로할 수 있게 된다. 잘 굴러가지 않았던 하루마저도 나는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 운영하려고 했다는 자부심도 든다. 벽을 따라 옆으로나마 걸으면서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는 것, 그게 가장 중요하단 생각이 든다. 앞으로 한 걸음 가지 못했다면 어떠랴, 알고 보면 우리는 긴 타원형을 따라 조금은 늦게라도 결국은 목적지에 도착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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