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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ne Gray Nov 18. 2022

사회학의 쓸모 (feat. 부르디외)

“정치가들은 사회세계에 대한 진리를 인식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선동의 합리적 도구들을 원하고 있습니다. 사회학에 부여되어 있으며, 사회학만이 수행할 수 있는 책무들 중에서 가장 필수적인 것 중의 하나는, 이렇게 사악한 방식으로 학문을 활용하여 시민과 소비자를 조작하고 기만하는 것을 비판적으로 와해시키는 것입니다. 시장의 강제력에 대해 유일한 자유를 표상하는 국가가, 자신에게 고유한 행위와 (특히 문화, 학문, 문학에 관한) 업무를, 마케팅 조사, 여론조사, 시청률 조사, 그리고 최대 다수의 추정된 기대에 대한 믿을만하다고 추정된 모든 기록들의 독재에 점점 더 종속시키고 있는 현실 앞에서 우리는 불안을 느낍니다. 사회학은, 자신들의 제국을 현실화시키고 정당화하기 위해서 과학(진짜 과학이건 과학으로 추정되는 무엇이건)에 점점 더 의존하는 권력들에 효과적으로 대항할 수 있는, 비판적 대항-권력의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국가권력을 포함한 모든 권력에 대해 자신의 자율성을 확보하기 위해, 국가의 도움이 보장하는 경제적 독립성을 활용하는 방법을 사회학이 알고 있어야 합니다."


 - 피에르 부르디외, 사회학을 찬미하다,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원 금메달 수상 연설 (1993), 번역: 김홍중”





어쨌든 나의 전공은 사회학이고, 박사를 졸업하게 되면 나는 (새로운 박사학위를 따지 않는 이상) 평생 사회학자의 타이틀을 달고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성골' 사회학자들과 달리, 학부는 정치학, 석사는 보건학, 박사는 사회학을 했으니, ‘사회학'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학자 타이틀을 달만한 자격도 없을 뿐더러, 사회학을 논할 자격은 더더욱 없다고 본다.


그럼에도 이 전공, 저 전공 기웃거려온 사람으로서 사회학이 스스로를 규정짓고 있는 방식을 제3자의 시각에서 이야기하자면, 굉장히 ‘폐쇄적이다' 라는 것이 나의 제1의견이다.

사회학이 탄생한 프랑스, 그리고 그곳에서도 저명한 사회학자였던 피에르 부르디외의 연설을 살펴보면서 사회학자인 그가 사회학을 변호하는 입장과 현대의 사회학자들, 그리고 사회학을 공부하는 자들의 입장이 여전히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느낀다.


부르디외는 사회학이 정치가들이 민중선동의 도구로 과학을 사용하는 입장에 대한 대응권력이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얼마나 확실하고도 현실적인 주장인지 모른다!

가까운 코로나 사태를 살펴보면 무엇보다도 확실하다. 요즘 프랑스에서는 12차 코로나 유행이 올 수 있으니 마스크를 쓰기를 권장한다는 보건부의 입장에 대해 비판하면서 ‘건강 권력'이라는 표현을 쓴다. 정부가 통제를 위해 개개인의 건강을 이용한다는 거다. 2년 넘도록 한국과 프랑스를 번갈아 왔다갔다 하면서 두 국가의 정부, 국민들이 보건정책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지 비교해본 입장으로서 부르디외의 설명이 너무나도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은 한국 사람들도 정부가 코로나를 정쟁에 이용했다(그리고 여전히 이용하고 있다)라는 의견에 대해 동의하는 사람들이 꽤 보이는데, 중요한 건 그런 의견이 단 한번이라도 집합적으로 연구된 적이 있느냐 하는 거다. 내가 알기로 전무하다. 서술적인 통계자료는 많다. 감염자가 어느 경로로 이동했는지, 누구와 밀접접촉을 했는지, 병상을 차지하는 코로나 환자는 얼마나 되는 지 등등. 그러나 그 이상으로 각 개인이 코로나에 대해서 그리고 코로나 정책에 대해서 어떤 의견을 갖고 있는지, 코로나로 인해 직접적으로 겪은 삶의 위협은 무엇인지, 어떤 집단에 대해 배척하게 되었는지, 인간관계에서의 변화는 무엇인지 등등 우리가 코로나라는 사태 속에서 느꼈던 무수한 상황과 의견들에 대해서는 전혀 조사된 바가 없다. 그런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생각’들이 사회학이 연구하고자 하는 대상이다.


근데 이 점에서 사회학자들이 갖고 있는 치명적인 오류가 나타난다. 사회학자들은 ‘관측될 수 없고 측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개념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과학적 접근법에 대해 굉장한 거부감을 보이는 것 같다. 이런 경향성은 ‘개인의 생각' 자체를 연구하는 심리학보다도 더 심각한 것 같다. 특히 내가 소속되어있는 유럽의 학풍은 양적 연구에 대한 천시가 더더욱 심하다. 수치로 치환될 수 있는 어떠한 이론, 방법론, 접근법 모두 사회학에서는 무가치하다고 여긴다. 인간의 심리에 대해서 연구하는 심리학조차도 인간 심리의 작동 기전을 밝히려고 노력하는데, 그 인간들이 모인 사회를 연구하는 사회학에서 수리적 연구를 수치스러워한다는 건 참 이해하기 힘든 행태다. 양적연구던 질적연구던 단지 방법론일 뿐인데, 사회학에서는 ‘양적'인 수치로 치환될 수 없는 행태를 연구해야만 사회학이라고 보는 것 같다. 


근데 우리가 인간이지만, 매일을 깨어있는 정신으로 ‘사고'하면서 사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나는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려면 지하철을 갈아타야하는 데 종종 내가 어떻게 갈아탔는 지 기억조차 나지않는 경우가 많다. 뿐만 아니라 내가 5년전에 이런 주제에 대해서 침을 튀기며 이야기했다는데 지금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그냥 이끌리는 대로 기계적으로 행하는 경우들이 꽤 있다는 소리다.


사회학은 ‘측정할 수 없는’ 또는 ‘수치화 할 수 없는' 기전에 대해서 연구한다는 주장은 역설적으로 애덤스미스의 고전경제학 이론과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사고하는 존재라고 너무 당연하게 가정한다는 거다. 


고전경제학에서는 인간이 ‘합리적으로’ 사고하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행태는 계산될 수 있다고 가정한다. 사회학에서 인간은 ‘각자만의 방식으로’ 사고하기 때문에 인간의 행태는 계산될 수 없다고 가정한다. 일견 괴상한 주장처럼 보이지만, 경제학에서는 그렇기 때문에 인간행태에 대해서 수치화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사회학에서는 그렇기 때문에 인간행태가 수치화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내 주장은 이렇다. 인간은 일단 매번 ‘사고’하지 않는다!


가끔은 마치 보노보와 같고, 마치 세포와 같고, 마치 원자와도 같다.

물리학 전공자인 남자친구와 이야기하다보면 특히 느낀다. 나노스케일의 원자가 무슨 ‘사고'가 있겠는가! 근데 가끔 그 원자들 사이에 유사한 행태가 관찰되고, 그 행태가 지속되다보면 더 큰 단위에서의 경향성이 관찰된다는 거다. 보노보 연구를 하는 학자들도 이와 비슷하게 이야기한다. 근데 왜 인간만은 특별하게 다를거라고 상정하는가? 인간 역시, 굳이 복잡하게 ‘사고'하고 ‘평가'하지 않고 그냥 주어진대로 혹은 상황이 허락하는 대로 행동하는 경우들이 너무나도 많단 말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사회학이 경제학이 상정하는 ‘인간상'보다 더 극단적이라고 생각한다. 사회학에서 인간을 사고하는 동물이라고 상정하는 것 자체가, 어떤 환경적 어려움, 어떤 컨텍스트가 있든지 간에 그 상황에서 벗어나는 이상치의 인간만을 연구대상을 삼는 것 같다. 


다수의 사회구성원들이 주어진대로 행동하는 그 경향성을 밝히려면 수학적, 물리학적 해석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왜' 다수의 사회구성원들이 그렇게 무의식적으로 행동했을까에 대해 밝히려면 그 과정을 둘러싼 내러티브에 대한 질적 연구가 필요한거고.


비판적이고 대항적인 권력이 되고싶으면, ‘주장'이 아니고 ‘과학’을 하면 된다. 솔직히 까놓고 50-60명 인터뷰 해놓고 그 내용을 분석해서 연구논문을 쓰면 그건 그냥 ‘주장'에 불과한거 아닌가? 나도 사회과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양적연구 이상으로 질적연구가 할 수 있는 일이 너무나도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이지만, 한편으로는 새로운 기술과학에 대한 사회학의 배타적인 태도에 대해서 굉장히 회의감이 든다. 나는 연구가 이론에 머무르지 않고 실천적이었으면 좋겠다. ‘주장’으로 남아있는 연구를 과연 일반인 중 누가 얼마나 공감을 하겠는가. 그리고 그 이상으로 그런 질적연구가 과연 정책에 반영될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많은 수준의 데이터로 증명을 해도 대중이 믿지 못하는 사회가 되버렸는데, 겨우 몇명의 사람들이 자신의 내러티브를 공유한다고 해서 그게 정책으로 이어지겠는가.


사회학은 우리의 삶에 진정으로 쓸모있다. 우리가 실질적으로 느끼고 겪고 있으나, 제대로 표현되고 집계되지 못한 현실에 대해서 꼬집어 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현실을 지적하는 이상으로 그 쓸모를 하려면, 새로이 다가오는 기술적인 접근법에 대해서 장벽을 허물어야 한다. 지금의 사회학은 밥그릇 싸움을 하는 것인지, 자기만의 세계에 철저히 벽을 세우고 있는 기분이다. 그래봤자 사회학에 좋을 게 뭐가있는가. 자기만의 명성을 지켜봤자 누가 인정해준다고. 진정 학문이라면, 자신의 쓸모를 증명해야한다. 심지어 이제는 머신러닝과 딥러닝이라는 좋은 기술이 있지 않는가! 집계되지 못할 것만 같았던 많은 현상에 대해서 연구할 수 있는 기술적인 뒷받침이 되는 사회가 도래했다는 말이다.




  


“저는 지금 사회학이 어떤 효용을 갖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답하기 시작했습니다. ...  ʻ자기 자신의 유용성과 존재 근거에 대한 질문을, 당신은 물리학자 또는 화학자, 고고학자나 심지어 역사학자에게도 던지십니까?ʼ 이상하게도, 자신 존재의 정당성을 실감하는 것이 사회학자에게 그토록 어려운 일이라면, 그것은 세상이 사회학자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거나 아니면 너무 적은 것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가장 과도한 요구에 부응하고자 하는 사회학자들, 그리고 막스 베버가 말했듯이 ʻ국가에 의해 매수되고 특권이 부여된 소(小) 예언가ʼ라는, 불가능하고 우스꽝스러운 역할을 수행하고자 하는 사회학자들이 언제나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 피에르 부르디외




사회학자로서 겪었던 악의적인 평판에 대해 브루디외는 위처럼 말한다.


안타깝게도 지금의 사회학자들 역시 그와 별반 다른 이야기를 할 것 같진 않다. 자기 자신의 유용성과 존재의 근거에 대한 질문이 지속적으로 사회학자들에게만 던져진다면, 그건 질문을 던진 자의 잘못일까 질문을 받는 자의 잘못일까. 많은 사회학자들, 그리고 나같은 사회학 초짜들이 다시금 생각해볼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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