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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ne Gray Apr 08. 2022

박사를 시작하며

프랑스로 돌아와 박사를 시작하게 된지도 어느덧 3개월이 되어간다. 떠날 때는 언제고 다시는 못 올 것만 같았는데, 이렇게 돌아와 원하던 일을 하게 되었으니 마음이 새롭고 벅차다. 연구소에 내 자리가 생기고, 사이트에 나의 이름이 올라가고, 같이 연구생활을 나누는 동료들이 생기고, 내 박사 연구를 나의 연구라 인정해주는 교수들과 일을 하게 되었다는 게 전부 꿈 같다.


박사를 입학하는 과정에서 우여곡절을 많이 겪어서 그런지, 내게 주어진 기회가 참 커보인다. 석사 졸업 후 붕 떠버린 시간에 이런저런 방법을 찾아서 일도 함께 병행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에는 내가 이런 타계책을 찾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뜻하지 않게 실패하듯, 뜻하지 않게 이루어내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그러니 마음을 잘 다스리라는 말은 인생이 늘 불행하지만도, 늘 행복하지만도 않으니 너무 크게 동요하지 말라는 뜻인가 싶다.


자연스레 시간이 흐르거나 또는 절대적인 시간을 써야지만 얻을 수 있는 해결책들이 있는 것 같다. 어떤 문제에 마주했을 때, 그 문제가 너무 크고 버거워서 결코 해결할 수 없을것만 같을 때가 있다. 실제로 그 순간에 내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해결책들은 대부분 편협하고 단편적이다. 내 머릿속에 적절한 해결책이 이미 있다고 한다면, 문제는 '문제'가 아니라 그냥 처리해야 할 '일'일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이 흘러야 내 머릿속에 없던 무언가를 시도해보면서 해결책을 찾기도 하고,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단순히 시간이 흐르는 것만으로도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기도 한다. 


그러니 시간이 흐르는 것을 너무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학부기간이 3년이라 졸업이 빠른 프랑스 학생들, 학부때부터 대학원까지 줄곧 학업에만 집중해온 학생들은 이미 내 나이에 박사를 졸업한 경우도 많다. 나는 이제 시작이라, 졸업이 4년이 걸릴지, 5년이 걸릴지, 혹은 그 이상이 걸릴지 알 수 없다. 처음에는 두려웠다. 하고자 하는 일이라고 했지만, 앞으로 몇년이 될지도 모르는 시간을 이렇다할 돈벌이도 없이 오롯이 학생으로 살아야하고, 그렇게 어찌 졸업을 한다하더라도 먹고 사는 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을 알기에 두려웠다.


늦지도 빠르지도 않은 이 나이에 결국 이 길을 택한 것은 나의 이상하리만치 확고한 명예욕에서 비롯된게 아닌가 한다. 내 명예욕은 내 이름값이다. 이름값하는 삶을 살고 싶다. 내 이름이 곧 내 실력을 뜻하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 그런 명예욕이 한켠에서 나를 여기까지 밀어부치지 않았나 싶다. 


물론 내가 이 전공을 연구하는 데에 있어 나름의 대의는 있다. '공중보건에서의 숫자 그 뒤편에는 사람이 있다, 숫자가 아니라 사람을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시스템은 사람의 선의나 악의와 같은 감정에 기대어 돌아가서는 안된다.' 공중보건사업을 하다보면, 정책가들과 의사들 간에 가장 많이 부딪히는 지점이 바로 여기였다. 정책가들은 숫자가 중요하다. 공중보건에서의 사망률, 유병률 같은 수치를 관리하는 게 공리적으로 중요하다. 의사들은 사람이 중요하다. 사망확률이 100만분의 1이라고 할지언정, 그들에게는 1이라는 그 환자가 더 중요하다. 옳고 그름이 문제가 아니라, 두 가지 각기 다른 철학적 관점을 어떻게 적절히 시스템화 할 것인지가 문제다. 그런 혼자의 대의를 위해 연구자가 되야겠다 결정한 면도 있다.


이런 생각들이야 어찌되었든, 박사졸업자가 설 자리가 그리 많지 않다는 현실은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다. 학계 역시 스포츠계나 연예계와 마찬가지로 몇몇 뛰어난 학자들에게만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고 나머지 무수한 사람들이 생활고와 불안정한 고용상황에 허덕인다는 사실 또한 잘 안다. 


그럼에도 어찌할 수 없다. 할 수 있는 일이 이것 뿐이고, 하고 싶은 일도 이것 뿐이다.


하고 싶은 일을, 뛰어나게 잘하면서, 돈도 많이 벌고, 명예까지 얻을 수 있다면 그야말로 좋은 일이겠으나 지금 나의 시간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하고 싶은 일과 동일하다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한다. 많이들 그렇겠지만,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이 둘 다 있다는 것도 참 귀한 경우고, 그 둘이 일치한다는 것은 더더욱 귀한 경우니. 할 수 있으면서 하고 싶은 일을 계속 해나가다 보면 또 언젠가는 지금의 내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타계책이 나타날 수도 있지 않겠나 싶다. 그건 시간이 해결해 주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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