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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ne Gray Dec 13. 2021

지극히 정성을 다하기

6개월 즈음 지난 시점에서 돌아보니, 박사 펀딩을 따기 위해 마지막 인터뷰를 앞두고 지극히도 정성을 다했던 기억만 떠오른다.


불합격 통지를 받고 대성통곡하며 무너져 내렸던 순간이나, 이후 다시 회복기를 거쳐, 결국 박사에 합격하여 학업을 이어가게 된, 이후의 결과에 해당되는 시간들은 사실 잘 기억이 안 난다.


한 달여를 인터뷰 PT를 준비하고, 교수들과 함께 여러 차례 예행연습을 하고, 며칠 밤을 꼬박 지새우며 스크립트를 외워대던 시간만 떠오른다. 작은 방에서 하루 종일 혼자 중얼대며 보내던 그 과정들이, 하나에 미친 사람처럼 참 지극히도 정성을 다했던 순간들이었다.


나의 그런 노력에는 반드시 정당한 결과가 따라와야 되지 않겠느냐는 보상심리가 들었었고, 그 때문에 불합격 통보가 그리도 괴로웠었다. 석사를 마치고 모인 자리에서, 자기도 박사를 할 거라며, 교수랑 이야기해본 적은 없지만 아마 합격할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하던 동기에게 괜한 자격지심이 들기도 했다.


돌이켜보니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가 노력을 더 많이 했기에 더 좋은 결과를 반드시 얻어야 한다는 것도 나의 큰 오만이었고, 남들 다 쉽게 하는 것 같은 박사 입학을 왜 나만 산전수전 다 겪듯이 힘들게 하는지 의문을 품고 괴로워하는 것도 큰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나의 기억에 남는 것은 피 토하듯 노력하던 그 과정들이었다. 이제는 분노도, 괴로움도, 슬픔도 다 바닥 깊은 곳으로 가라앉아 잘 떠오르지 않지만, 정성을 다하던 나의 태도는 지문자국이나 주름처럼 생생하게 남았다. '학습'이라는 단어를 써도 좋을 것 같다. 최선을 다해보는 태도를 학습했다.


성취라는 결과가 없으면 노력이고 나발이고 의미가 없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특히 뭔가를 열심히 했는데도 안됐을 때 그런 생각이 자주 드는데, 맞는 말이다. 사람들은 실패한 사람들의 말에는 잘 귀 기울이지 않는다. 처음에야 주위 사람들이 위로해주곤 하지만, 시간이 좀 지나고 보면 사람들에게 실패한 사람의 노력은 노력이 아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어떤가?

사람들과 똑같이 내 노력이 노력이 아니라고 생각되나? 본인에게 솔직한 마음으로, 모든 앙금이 가라앉고 난 후 생각해보면 답은 금방 나온다. 자신이 인정할 만큼 열심히 했다면, 결과가 어찌 되었든 상관없이 지평이 한 단계 넓어진다. 내가 이 정도로 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하는 사실을 체득하게 된다.


결과는 생각보다 객관적이고 공평하다. 왜 주변에서 남들 다 하나 하기도 어렵다는 일을 두세 개씩 동시에 해내거나, 여러 군데서 동시에 러브콜을 받는 소수의 인재들이 한 명씩은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 사람들이 매번 운이 좋기 때문에 항상 성공할 수 있었던 걸까? 어려운 확률이다. 취업을 예로 들어도, 기업 당 100대 1 합격률이라고 치면, A, B, C 기업을 모두 합격할 확률은 100만 분의 1이다. 이런 사람들은 운이 좋다고 보기보다는 어떤 기준으로 보나 객관적으로 실력이 있다고 보는 게 맞다.


근데 이들이라고 처음부터 객관적인 수준의 실력을 갖췄을까. 난 이 소수의 인재들 역시 처음에는 좌절하고 실패한 경험들을 갖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부딪히고 깨지면서 자기의 지평을 넓혀오다 보니 어느샌가 '객관성'에 부합하는 실력을 갖게 된 거라고 생각한다.


결과는 타인의 평가다. 타인의 객관적인 인정을 받으려면 자신의 주관적인 인정부터 얻어야 한다. 자기 스스로 납득할 만큼 노력했다면, 주관적인 인정을 얻은 거다. 그 주관적인 인정들이 커지다 보면 언젠가는 타인의 객관적인 인정을 넘어서는 실력이 된다고 본다.


이제는 머릿속에서 '노력한 만큼 정당한 보상'이라는 환상을 버리자. 노력은 주관의 영역인데 정당한 보상은 객관의 영역이라 둘 사이에는 늘 괴리가 생길 수밖에 없다. 열심히 한 노력은 나 밖에 모르는 반면, 정당한 보상이란 것은 그런 내 노력을 모르는 타인의 평가에서 비롯되는 게 아닌가. 그런 환상을 가져봤자 나처럼 자격지심이나 들고 스스로 괴롭기만 하다. 그냥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가, 얼만큼이나 지극히 정성을 들일 수 있는 사람인가 그런 걸 추구하는 게 낫다. 나에게 과정이 의미가 있었다면, 그건 내가 주관적으로 인정을 얻은 거다. 이제는 그게 결과라고 생각하는 게 맞다. '노력한 만큼의 지평의 확장'이라고 프레임을 바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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