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를 쓴 지도 10년이 넘었다. 처음에는 수험생 시절 마음을 다잡기 위해 칭찬일기 식으로 쓰던 것이 오늘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일기라고는 하나 말처럼 매일매일 쓰지는 않는다. 생각이 많을 때, 그보다도 끓어넘치는 분노나 절망, 두려움을 마구 표출하고 싶을 때 주로 쓴다. 막상 평온하고 행복한 일상을 보낼 때에는 일기장을 들여다 보지도 않는다. 그렇게 두 달에 한번, 세 달에 한번 꼴로 쓸 때도 있다. 그러니 내 일기장은 바탕화면의 워드파일이라기보다는 휴지통에 더 가깝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고 보니 어느새 일기장이 11권이 넘어간다. 인생에 딱히 크게 이룬 바는 없더라도, 나에 대한 11권 치 기록이 생겼다는 것은 좀 자랑스럽다. 일기장을 한참 뒤적거리다 보니, 어렴풋한 기억 속에서 내가 살아온 날들이 아득한 꿈처럼 느껴진다는 김혜남 작가의 문장이 생각났다. 17살의 나는 지금을 기록해두지 않으면 내가 이 순간에 살았다는 사실을 꿈처럼 잊어버릴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사진과 영상만으로는 결코 담을 수 없는 내 생각들을 줄곧 기록으로 남겨두기로 결정한 건 두고두고 잘한 일이다. 그럼에도 이제 서른이 넘어서 보니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던, 쓰지 않은 날들이 후회가 된다.
요즘은 기록하는 방법에 대해 연구하고 고민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난 것 같다. 기록학자인 김익한 교수의 유튜브 채널과 저서가 많은 이들을 주목을 받는 것도 이런 추세를 반영하는 것 같다. 다산 정약용의 둔필승총 - 둔한 붓이 총명한 머리를 이긴다 - 정신과 그의 기록광적인 행적을 보여주는 500권의 저서를 보니 시대가 바뀌었다고 한들 인간에게 중요한 역량은 여전히 비슷한 것 같다. 박사과정은 특히나 기록하는 힘, 글쓰는 능력을 기르는 데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라 이런저런 기록광인들의 이야기들이 기꺼이 와닿는다.
논문이나 저술과 같은 장문의 글은 말할 것도 없고, 간단한 이메일이나 사사로운 일기를 쓰는 데에도 왠지 잘 써야할 것만 같다는 부담감 때문에 열었던 창을 꺼버리고, 펜을 놓아버린 적이 꽤 있다. 지금도 자주 글쓰는 일을 게을리 할 때가 있는데, 여전히 시작도 전에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커서 그렇다.
논문이 하도 쓰기 싫어서 핑계거리나 찾아볼까 하고, < 매일 15분씩 논문을 쓰는 법 Writing your dissertation in fifteen minutes a day > 이라는 책을 멀리 미국에서부터 배달해서 읽었다. 제목에 내용이 다 들어 있다. 98년도의 저자는 하루 딱 15분 간 아주 작은 토막글을 써내려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한다. 논문 작업을 하는 연구자들 뿐만 아니라 글을 가까이 하는 모든 사람들이 읽어봐도 좋을 것 같다. 의미 있어 보이는 주제와 번뜩이는 아이디어 말고도 내가 그때 그 순간 느낀 감정, 웃긴 일, 짜증나게 하는 것들, 시시콜콜한 경험 등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들을 다 기록하라는 말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런 작은 단서들이 모여 자신의 경향을 알게 하고 궁극적으로는 자신만의 세계관을 발전시킨다고 한다.
그 작은 기록에서부터 시작하여, 이 메모들을 오리고 붙이고 빼고 끼워 넣으면서 하나의 논리정연한 글을 창작하는 것이 글쓰기 업의 본질이지 않을까 싶다. 근데 그건 15분 메모하는 노력보다도 더 크고 무시무시한 노력이 필요할 것 같아서 일단은 못 본 척 하기로 했다. 당분간은 매일 15분씩 써내려가는 것만으로도 되었다 생각하련다. 그런 의미에서 마음에 안들고 결론도 없는 이 글을 꾸역꾸역 브런치에 올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