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빛나는 사람이 될 순 없었니?

기억 속의 선생님, 현실과 타협하는 내 모습이 아니었을까?

by 김지혜

선생님들과 함께 워크숍을 진행하였다.

선생님들의 역할극에 자꾸만 뭉클해져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도깨비의 은탁이 선생님이 생각난다.

선생님을 향한 삼신할미의 한마디


“아가 더 나은 스승일 순 없었니?
더 빛나는 스승일 순 없었어?”


눈물을 흘리는 선생님을 보고 나 또한 눈물이 났다.

어른이 되기 전 우리의 삶에 가장 많은 가르침과 영향을 주는 사람을 떠올리면 부모와 선생님이다.

우리는 성장기 대부분은 가정과 학교에서 보내고 그 울타리 속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내 기억의 선생님은 나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을까? 선생님을 통해 내가 바라보는 삶은 내게 어떤 의미일까?

초등부터 고등학교까지 12년간의 교육 과정을 돌아보면 내가 기억하는 선생님은 대부분 은탁이 선생님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불과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촌지를 관행처럼 여기며 살아왔었다. 가정이 불우했거나, 소위 센스 없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촌지로 인해 선생님이라는 존재에 무너진 신뢰와 뜻 모를 차별을 겪은 상처나 기억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에는 선생님께서 가정 방문을 했었다. 물론 매번 가정방문을 마치고 집을 나서는 선생님에게 하얀 봉투를 챙겨 드리던 엄마를 나는 기억한다.

내가 보지 않을 때 드리려 애쓰느라 대문 앞에 가서야 얼른 챙겨 드리는 모습!


매년 선생님의 가정 방문이 있을 때마다 없는 형편에 아빠랑 얼마를 넣어야 하나를 가지고 다투던 엄마의 모습은 나를 참 힘들게 했다.

내가 아주 공부 잘하거나 뛰어난 아이였음 혹시 촌지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모자란 나 때문인가 자책했다.


우리는 그리 가정 형편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먹고는 살았지만 너무나 알뜰했던 아버지 밑에서 무엇 하나 제대로 푸근하게 사본 기억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난 선생님께 드리는 그 돈이 너무 아까웠다.

난 평범한 아이였고 촌지를 챙겨 드린다고 선생님이 나한테 특별히 잘해주는 것 같지도 않았다.

항상 나보다 더 잘해주는 아이들이 있었고 그 친구들을 관찰한 결과 그 친구의 엄마들이 자주 학교에 오신다는 걸 우리 같은 아이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아빠랑 실랑이까지 벌이며 챙겨 드린 그 얼마 안 되는 돈은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다. 진학 상담을 위해서 부모님은 선생님과 무조건 상담을 해야 했다.

그때는 그런 소문이 참 많았다. ‘선생님이 그냥 서랍 문을 열어두고 있으니 직접 드리지 말고 봉투를 서랍에다 알아서 넣고 가면 된다’, ‘선생님이 받아다가 방석 밑에 봉투를 깔아 둔 걸 봤다’이런 이야기들은 친구들 사이에 공공연하게 들려왔고 흰 봉투에 돈을 채워서 당연히 와야 한다는 분위기였다. 음료수를 사 오면 ‘우리가 물고기가 맨날 물만 마시게’라고 어느 선생님이 그러셨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정말로 많은 소문들이 우리들 사이에서는 우스갯소리처럼 들려왔다.

엄마도 고민하는 모습이셨다. 난 여전히 평범했고 크게 점수 대비 학교 욕심을 내지 않는 학생이었다. 어차피 몇 푼 넣는다고 선생님이 나한테 잘해줄 리도 없고 선생님과의 부모 상담은 내게 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부모님께 절대 봉투는 준비하지 말라고 말씀드렸다. 엄마는 정말 그래도 되냐고 몇 번이고 물으며 불안해하셨다. 그냥 빈손이 너무 불편하실 엄마에게 음료수나 한통 사서 가라고 말씀드렸다.

당시 극심한 차별을 하는 선생님에게 10원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난 나중에는 엄마가 내 말을 안 들으면 엄마 원하는 대로 원서도 안 쓸 거라는 협박까지 했었다.

결국 엄마는 음료수 한통만 사들고 선생님을 뵈었고 어떤 상담도 없이 이 학교에 이런 과에 지원할 생각이다 라고 하니 그냥 선생님은 그렇게 하시라는 대답으로 상담은 아주 짧게 끝이 났다.

학생으로서 고 3 임에도 제대로 선생님과 상담 한번 한적 없었고 그 담임 선생님 수업 시간에 질문도 별로 받아 본 적도 없다.

결국 난 내가 계획했던 대학에 붙었고 선생님께 할 수 있는 소심한 항의로 마지막까지 저런 스승에게는 인사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졸업식 날까지 학교를 다녔다.

졸업식 날까지 난 그분과 한 번도 눈을 맞추지 않았고 인사를 하지 않았다. 졸업식 날 다른 선생님과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교무실을 찾았고 그곳에 담임선생님이 계셨지만 난 여전히 아는척하지 않았다. 그것이 넉넉하지 않고 아주 뛰어나지 않은 내가 할 수 있는 차별에 대한 소심한 무언의 복수였다.

내가 학교에서 선생님이 칭했던 마지막 사람은 그런 기억으로 끝이 나버렸다.


세월은 이제 나를 엄마로 만들었다.

워킹맘들은 사실 다른 엄마들과 어울릴 시간이 별로 없어서 정보력이 떨어진다. 요즘 트렌드나 상황에 대해 잘 모른다. 첫째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는 날은 우리 워킹맘들 에게는 엄청난 전환점이자 새로운 긴장의 시간들이다.

가정 방문을 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선생님과 상담은 한다. 하지만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다. 그리고 상담을 했다. 아무런 문제가 없는 얌전한 아이여서 상담할 내용이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그런데 어쩌다 알게 된 엄마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빈손으로 상담 간 것을 이야기하자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아! 아직도 이 세상은 그대로 인가라는 실망감이 밀려왔다.

엄마가 된 지금도 이런 걸로 내가 고민을 하고 갈등을 해야 하다니 정말로 이 사회는 하나도 변한 게 없다는 현실에 너무 속상했다.

하지만 두려웠다. 내가 받았던 그런 차별을 우리 아이가 받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몰려왔다. 모두가 하고 있다면 그리고 나만 안 한다면 차별 아닌 차별을 받을 수도 있다.


어린 시절 엄마가 어려운 형편에 적은 돈이라도 볼품없이 드렸던 이유가 이런 거구나!

귀여움을 못 받더라도 혹시나 구박받을까 걱정하셨구나. 적던, 많던 내 아이가 눈 밖에 나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이 아닌 걸 알면서도 부모는 해야 한다는 맘이 생기는 거구나!

엄마가 아빠랑 다퉈가며 그렇게 속된 짓을 하려 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결국 난 우물쭈물 그렇게 아무런 성의 표시도 못하고 학부형 첫해를 초짜로 보냈다.

면세점에서 파는 화장품 정도는 사야 한다는 엄마들도 있었고, 티 안 나게 교무실에 음식을 시켜 드려야 한다는 엄마도 있었고, 집주소를 알아서 집으로 보내야 한다는 엄마도 있었다. 이런저런 무성한 이야기와 조언들이 센스 없는(?) 나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결국 아이가 2학년이 되었고 또다시 상담의 날이 다가왔다.

난 고민 끝에 다른 엄마들이 추천한 한번 써본적도 없는 면세품 브랜드 화장품을 사서 가방에 넣고 갔다.

뭔가 은밀한 거래를 하는 거 마냥, 선생님과의 어떤 대화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못하고 이걸 어떻게 자연스럽게 전해 드려야 하나라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상담하는 동안 선생님과 마시려고 음료수 두 캔을 샀다. 목이 말랐던 난 혼자 마실 수 없었기에 얼른 선생님께 한 캔을 드리고 내 음료수를 마시고 싶었다. 선생님께 음료수를 드리니 손사래를 치면서 드시지를 않는다.

음료수 한잔에 왜 이렇게 크게 반응하실까? 선생님의 그런 모습에 가방에 든 화장품은 꺼낼 용기도 못 냈다.

결국 난 우물쭈물거리다 내 아이 선생님에게는 성의 한번 못 보이고 그렇게 지나가버렸다.


그리고는 다음 해 김영란법(청탁 금지법)이 시행되었다.

청탁 금지법 시행 이후 스승의 날이라도 법적 문제의 소지가 있으니 보내지 말라는 공문과 문자가 학교에서 왔다. 그 이후 기준에 맞는 아주 작은 선물이라도 문제의 소지가 있다 보니 받지 않고 돌려보낸다는 말을 들었다.

카네이션도 받지 않고 모두 돌려보내셨다.


신기한 건, 이제 좋아졌구나 다행이다 라는 생각 대신에 "그럼 이제 어쩌란 말이야?"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런 제도로 뭔가 성의 표시를 못한다는 건 학부형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촌지를 대신할 사례는 뭘까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그렇게 낯선 제도였다.

하지만 이제 우린 촌지 없는 교사와의 관계가 자연스럽다.


그렇게 내가 가졌던 선생님에 대한 그 옛 기억은 드라마 도깨비에서 보던 은탁이 선생님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결국 그러한 환경은 누군가가 만들었고 그 속에서 어쩜 보통의 선생님이 바로 은탁이 선생님일 것이다.

촌지를 주지 않은 내가 별나고 못난 엄마라면 촌지를 받지 않는 선생님은 또한 별난 선생님으로 취급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이를 기르고, 학교에 보내고 선생님을 만나며, 나의 그 옛 선생님들에 대한 기억은 조금씩 희미해져 간다.

두 아이를 키우며 내가 만난 아이의 선생님들은 스승이고 교육자이고 또 다른 부모 같은 분들도 많았다.

졸업 후 3년밖에 안된 앳되 보이는 선생님 주신 아이에 대한 진심 어린 조언은 내게 저절로 머리가 숙이게 만들었다. 상담 후 집에 와 한참이나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아이의 선생님과의 상담은 나의 고3 선생님에 대한 이미지를 희미하게 만들어간다.

삼신할미는 묻는다. “아가 더 나은 스승일 순 없었니? 더 빛나는 스승일 순 없었어?”

왜 이 말은 그렇게 오랫동안 내 머릿속에 남아서 떠나지 않았을까?

당시의 선생님에 대한 미움이 억울함으로 나를 울리고 가슴을 두드렸을 리 없다.


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 이 말은 당시 선생님에 대한 기억보다는 '더'라는 한 단어 때문이었다.

은탁이 선생님의 울먹임은 더 나은 나를 꿈꿨지만 현실과 타협하며 그 꿈을 잊어가는 자신을 상기시켰을 것이다.

그건 내가 뭘 하건 지금의 나의 삶, 우리네 삶고 별반 다르지 않다.

적어도 모두가 양팔을 가졌는데 나 혼자 한 팔 밖에 없는 인간 처럼 취급받았다면 그 순간 나는 당당하고 싶었다.

누군가 나를 외팔이로 취급해도 내겐 당당히 두 팔이 있다는 믿음은 엄마의 불안과 다르게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엄마가 된 난, 나의 엄마와 같이 현실과 타협하는 방법을 찾으려 했다.

나는 강할 수 있었지만 내 아이는 그렇지 못할 것 같은 불안함, 내 아이의 그런 상황에 내가 더 힘들어질 것 같은 걱정에 결국 더 나는 부모가 되기보다는 더 쉬운 타협을 생각했었다.


지금의 제도와 더 좋은 환경과 내가 만나보지 못했던 훌륭한 선생님들을 이제는 만날 수 있다.

혹시나 내가 만났던 그러한 선생님을 아이가 만나더라도 아이는 그때의 나처럼 강해 질 수 있다.

어른이 되기 전 삶에 가장 많은 가르침과 영향을 주는 사람은 부모와 선생님이라고 믿었다.

그렇다면

나는 왜 더 나은 부모일 수는 없었을까?

나는 더 빛나는 부모일 순 없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