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당할 수 없던 과거로 돌아간다면
난 지금 보다는 나은 인간일 수 있을까?
누군가 묻는다.
“여러분, 혹시 지금 아주 잠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으세요?”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때는 바로 중요한 선택의 순간이거나 지금 후회가 되는 바로 그 순간일 것이다.
내가 이 질문을 받았을 때 난 단 10분만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다.
중학교 2학년 친구와 공부한다는 핑계로 수다를 떨며 밤을 새우던 그날!
난 중학교 2학년 때 심한 왕따를 당했었다.
그 이유는 단지 내가 다른 반 친구, 영서(가명)와 친하다는 이유였다.
당시 학교에는 일진처럼, 좀 논다는 아이들의 서열이 있었다.
서열 2위, 넘버 투가 되기 위해 약간의 세력 다툼이 있던 때, 우리 반에는 영서와 넘버 투를 경쟁하고 있는 친구 은희가 있었다.
난 일진은 아니었지만 그냥 영서와 친했다.
영서는 학교에서는 노는 친구로 통했지만 나랑 있을 때는 그냥 착한 중학생 소녀였다.
하지만 같은 반, 은희는 내가 영서랑 친하다는 이유만으로 아주 서서히 반 친구들을 하나둘씩 나랑 어울리지 못하게 했다. 유치하게도 영서랑 안 놀면 친구들이 나랑 놀게 해 주겠다고 까지 했었다.
결국 나는 반에 친구가 한 명도 없는 왕따가 되었다. 지금도 그때의 마음 한편 쓸쓸함이 느껴진다.
수업을 마치면 난 영서랑 하교를 같이하며 수다를 떠는 그 시간을 매일 기다렸다.
난 단 한 번도 나의 그런 왕따의 상황을 영서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냥 1년만 참자라는 생각으로 버텼다.
시험공부한다는 핑계로 영서를 우리 집에 초대했다. 밤새 공부하자고 결심하며 시작했지만 우리는 수다로 밤을 새웠다.
그날 난 궁금했다. 왜 영서는 은희랑 그렇게도 사이가 나쁘고 세력 다툼을 하게 된 건지..
영서에게 묻자 뜬금없이 영서는 대답한다.
“난 누가 나보고 더럽다고 하는 말을 참을 수가 없어”
순간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영서는 사실 은희와 한때 단짝 친구였다. 둘은 약간의 비행 청소년처럼 밤늦게 까지 여기저기 쏘다니고 함께 놀던 사이였다. 어느 늦은 밤 둘은 놀이터에서 담배를 피우며 놀고 있었다. 순찰을 돌던 경찰이 그들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그 둘은 열심히 도망갔다. 은희는 무사히 도망쳤지만 내 친구 영서는 경찰한테 붙잡혔다.
그리고 그날 밤 영서는 경찰에게 강간을 당했다. 그 일은 영서가 중학교 1학년 때 일어난 일이다.
그 이후 그 둘은 사이는 멀어졌다. 혼자 도망친 친구인 것도 서운하고,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 것 같은 친구, 영서는 그렇게 은희와 불편한 관계가 되었다.
그날 영서의 이야기를 듣고 잠시 내 몸에 경련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가슴은 미친 듯이 뛰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게 문제는 그날 이후였다. 그 날 이후 난 영서의 눈을 맞출 수가 없었다.
왕따를 당하면서까지 지켰던 내 우정과 의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 친구의 고백은 나에게 함께 있는 순간을 너무나 불편하고 힘들게 했다.
15살인 내가 듣고 소화하기 힘든 이야기였다.
결국 약간은 불편한 관계를 지속하며 빨리 3학년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왕따인 상황도 힘겨웠고 영서와의 관계도 불편했다.
결국 그렇게 1년이 흘러 나는 영서와 멀어지게 되었다.
영서는 실업계 고등학교로 나는 인문계 고등학교를 진학하며 우리는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어졌다.
고등학교를 진학하고도 난 영서에게 계속 죄책감을 가지고 살았던 것 같다.
어느 날 나는 영서의 집으로 찾아갔다. 영서는 다른 곳으로 이사 가고 없었다.
그렇게 세월은 흘렀지만 내 안에 고스란히 남아 꼭꼭 묻어 두었던 죄책감.
대학을 졸업하고 나는 해외에 취업을 했었다. 해외업체에 근무하며 휴가로 한국에 온 어느 날 서점을 찾았다. 필요한 책들을 사서 가져가려고 이런저런 책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내 나이 26살 때였다.
잠시 창밖을 바라보는데 영서가 지나가고 있었다.
영서는 5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의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었다. 영서는 엄마가 되어 있었다.
책을 잡은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창밖에 내 앞을 지나 저 멀리 사라지는 그 순간까지 나의 손과 다리는 하염없이 후들 거렸다.
내 안의 갈등이 떨리는 손으로 다리로 느껴졌다.
뛰어나가서 영서에게 인사를 할까? 그녀는 내가 아는 척하는 것을 과연 좋아할까? 지금 아들과 행복해 보이는 그녀는 그 비밀을 아는 내가 더 불편하지 않을까? 온갖 생각을 하는 동안 그녀는 결국 골목을 돌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그녀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렇게 난 영서에게 제대로 그날의 일에 대해 사과하지 못했다.
이젠 나도 두 딸의 엄마가 되었다.
TV에서 me too 사건의 보도가 나오면 15살 영서의 이야기를 들은 거처럼 나는 가슴이 다시 쿵쾅거린다.
그날의 영서는 15살의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면서 왜 그 이야기를 했을까?
오랫동안 생각했다. Me too 사건들이 봇물 터지듯 매일 기사로 나오던 그때, 영서는 계속해서 나에게 묻는다.
“너는 내가 왜 힘든 이야기를 너에게 털어놓았는지 모르겠니?”
Me too 기사를 볼 때마다 나는 중 2 영서와 함께 있던 내방의 창가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녀의 지난 참혹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
그날 그녀가 입었던 초록 조끼, 그리고 그 조끼의 단추, 그녀가 바라보던 창가, 조금 열려 있던 창문, 그녀의 짧은 머리가 마치 정지된 영화 장면처럼 떠오른다.
영서는 이후 나에게 어떤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 이후 충분히 느꼈을 것이다.
가장 믿었던 친구가 공감하고 위로해 줄거라 믿었을 그녀의 고백에 나는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
아마도 지금도 원망 조차 한번 못하고 가슴 한편에 꼭꼭 묻어두고 살고 있을지 모른다.
가장 친한 그 누군가에게도 공감받지 못한 그녀의 이야기를 다시 꺼낼 용기를 내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어쩌면 지금도 스스로를 탓하고 있을지 모른다. ‘왜 내가 늦게까지 놀았을까. 왜 내가 더 빨리 달리지 못했을까, 왜 난 이렇게 안 좋은 가정환경에서 자란 걸까?”
바보 같이 아무것도 못했던 그날의 기억에 오늘도 나는 스스로에게 변명한다.
난 너무 어렸다고, 그날의 충격은 나를 어떤 반응도 할 수 없이 얼어붙게 만들었다고…
그런 영서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던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없었을까?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난 그날의 내방 창가에 그녀와 함께 했던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어리석었던 나의 그 시절로 단 10분만이라도 돌아가고 싶다.
그리고는 그냥 영서를 안아주고 싶다.
‘영서야 절대로 니 탓이 아니야! 너의 잘못이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