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어도 못하면서 중국에서 판매 1위를 어떻게 했나!
만약 우리가 아무런 선택의 여지가 없는 한계점에 부딪힌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결정은 단 두 가지 뿐이다.
포기하거나, 그 한계를 뛰어넘거나…
난 결혼 전, 싱글 시절, 싱가포르 업체에 취업을 하게 되었다.
2000년도 당시 해외 취업이라는 것, 해외에 근무를 한다는 것은 대구에 살던 나로서는 참 보기 드문 사례였다.
2년 계약직 business developer로 말레이시아 지사 근무를 위해 부모님을 한 달 반 동안 설득하고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이런저런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난 친구들과 앞으로 만나기 힘들 거라는 이유로 해외로 나가기 전 한 달 동안 송별회를 가졌다. 당시에는 SNS 도 없었고, 친구들 과의 연락은 이메일 정도였다.
2년간 친구들과 연락이 힘들다는 생각에 정말 많은 친구들을 만나 밥도 먹고 술도 먹으며 송별회를 가졌다.
그리고 시작된 말레이시아에서의 직장생활,
6개월 정도 근무 후 갑자기 동남아 경기가 나빠졌다. 경기는 내가 근무하던 설비 업체에 큰 타격이었다. 경기가 나빠지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6개월 만에 나는 해고의 위기에 놓인다. 한국으로 가면 친구들 보기 민망하니 1년 반 잠수를 탈까, 해고 전에 덜 비굴하게 당당히 퇴사를 할까 고민했다.
나에겐 정말 이 두 가지 선택권 밖에 없는 걸까?
결국 내가 내린 결정은 직무 변경을 요청하고 중국에 영업으로 지원하겠다는 것이었다.
중국어 한마디 못하는 내가 중국에 설비 영업을 하러 중국으로 보내달라고 했을 때, 사장님은 ‘내가 잘못 들었나?’ 하는 표정이셨다.
내가 중국 지사 근무를 지원했던 이유는 당시 중국 지사는 경기와 무관하게 아주 급성장 중이었다.
당시 많은 글로벌 기업들이 중국으로 생산 기지를 옮기고 있었다. 화교계의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업체는 좀 더 빠르게 중국으로 생산기지를 옮기고 있었고 그에 대응하기 위해 설비업체인 그 회사의 중국 지사도 한국이나 다른 어느 국가보다 빠르게 설립되어 운영되고 있었다.
회사의 말레지아와 싱가포르 화교계 직원들은 중국에 파견근무를 원하지 않았다.
결국 싱가포르 사장님은 본인이 데려온 직원이 유휴인력이 된 것이 안타까웠는지 중국지사 3개월 파견으로 일단 보내주었다.
그렇게 3개월 출장으로 가게 된 중국에서 나는 2년 반을 근무하고 퇴사하였다.
퇴사 당시 난 중국 지사 매출액의 반을 담당하는 영업 1위 사원이었다.
당시 중국 지사에 근무하는 영업 사원은 중국인, 말레이시아인, 싱가포르 인 그리고 나, 한국인이 있었다.
나만 빼고 모두 화교계로 중국어가 가능했다.
하지만 유일하게 완전 외국인이며 중국어를 못하는 나로서 수많은 제약 속에 생활해야 했다.
통역을 해주는 이도 없었다.
그곳에 근무하는 말레이시아인과 싱가포르 주재원은 모두 높은 직급으로 내가 통역을 요구할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당시 중국어 공부를 할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한국에서 보내온 중국어 책 한 권은 고작, 인사말, 나의 소개 정도였지 내가 일을 하는 데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다.
내가 찾은 방법은 회사에 있는 설비, 부품 매뉴얼이었다. 영문 번역이 되어 있는 매뉴얼이나 설명서를 찾아 중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일상에서는 동료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외워서 똑같이 발음하며 슈퍼에 가거나 식당에서 그나마 밥이라도 먹었다. 성조가 뭔지도 몰랐고, 그냥 이렇게 그들은 발음하니 나도 따라 했을 뿐이었다.
그곳에서 난 타이거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성질 급하고 까칠한 한국인! 지금 생각하면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독불장군 같은 나였다. 나에게 싱가포르 사장님은 중국 현지 엔지니어 중 가장 성격 좋고, 참을성이 많으며, 나의 어설픈 중국어를 눈치 빠르게 이해하고 기술 역량이 뛰어난 과장급 엔지니어를 붙여 주었다. 이 또한 내가 매출을 올리기 시작하자 지원이 가능한 인력이었다.
그렇게 중국에서 나는 영업 매출 1위의 영업직원이 되었고, 그렇게 top으로 있으며 손뼉 칠 때 그 회사를 떠났다.
그럼 난 현지어도 안되면서 어떻게 매출 1위 영업사원이 되었을까?
기대하지 않는 나의 역량이 발휘된 것인가, 나는 영업의 신이었을까?
2000년도 초 한국 기업을 포함해 많은 대기업들이 중국으로 제조업을 이전하고 있었다.
당시 주요 설비는 한국이나 자국에서 가져오더라도 부대설비나 현지화의 욕구를 가진 업체들에게 나의 영업은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뿐만 아니라 나는 누구도 가지지 않은 장점을 가졌었다.
그건 내가 싱가포르 회사 소속으로 한국인이 한 명도 없는 회사에서 중국말을 못 하며 중국에 근무하는 한국인 20대 청년이라는 점이었다.
누가 봐도 " 이 인간 뭐야? "라는 의문이 드는 존재다.
어떤 고객이든 어렵게 고객과 연락이 되고 나면 중국말이 어설픈 난 영어나 한국어로 대화를 해야 했다.
"넌 누구냐?"는 질문에 나를 소개하면 고객들은 시간을 내어 주었고, 회사 소개를 하러 가면 현지인들은 중국어를 못하는 나를 본사에서 온 직원으로 착각하기도 했었다.
그렇게 나는 중국 엔지니어와 함께 중국 내 일본, 한국, 유럽업체의 영업을 다녔다.
나의 실력보다는 중국의 경기와 너도 나도 현지 설비 투자를 하던 잠재 고객이 많았다는 환경적 요소가 나의 큰 실적의 밑거름이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그곳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기회와 그곳에 있었던 나! 그런 상황이 나를 최고의 영업 매출 직원으로 만들어 준 것이다.
내가 가진 커다란 장애물은 엄청나게 많았다.
중국어, 엔지니어링에 대한 배경 지식, 친구 하나 없는 오지에서 유일한 외국인으로서의 생활!
과연 이러한 장애들은 나에게 진정 걸림돌이 었을까?
내가 가진 이 각각의 한계들을 마주하는 순간 나의 선택은 두 가지였다.
그냥 그만두고 한국으로 가던가 아무거나 해보자!
어쩌면 한계라는 상황은 고민 없이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는 절박함을 주는 가장 큰 에너지인지 모른다.
극복할 수 없는 한계의 상황들은 나를 좀 더 용감하게 만들어주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무엇이든 해보자는 결심을 좀 더 쉽게 할 수 있게 해 준다.
우리는 가끔 마주하는 몇 가지의 한계에 모든 가능성의 문을 닫아 버리기고 포기하기도 한다.
마치 영원히 고칠 수 없는 어떤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삶의 의미가 없게 느끼며 우리에게 여전히 남은 역량들을 잊기가 쉽다.
거나하게 얻어먹은 환송회도, 부모님의 반대에도 큰소리치며 날아온 해외 취업도, 모두 내가 결정한 선택이었다. 부끄럽게 돌아가고 싶지 않은 내가 마주한 절박함은 나에게 해보지 않는 도전을 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가끔은 우리에게 주어진 많은 선택권은 더 나은 무언가를 위한 것이 아닌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한 핑계와 수만 가지 이유를 만들게 한다.
지금 내가 한계를 느낀다는 건 바로 용기라는 열정과 도전이라는 행동을 이끌 기회의 다른 모습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