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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neFly Dec 13. 2018

2. 당신의 내력은 어떻습니까?

- 속절없이 흔들리는 당신에게

저에게 2018년 최애 드라마는 ‘나의 아저씨’였습니다. 어느 회차인가에서 박동훈이 이지안에게 조언하던 중 드라마에서는 좀처럼 나오지 않을 법한 '내력’과 ‘외력’이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쉽게 추측할 수 있듯이 내력은 내부에 있는 힘, 외력은 외부의 힘입니다. 박동훈이 말하는 것처럼 사람도 내력이 외력보다 세면 버틸 수 있는 거고, 외력보다 약하면 무너집니다. '내력'은 ‘내공'이나 '뻔뻔함'이라는 단어와 바꿔 쓸 수도 있습니다. 제 개인적인 이야기가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흔들리는 당신에게 해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 적습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는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은 내력이 가장 약한 시기입니다. 모든 게 처음이라 그렇습니다. 분명히 들었는데 왜 하라는 대로 안 되는 건지, 하는 일마다 한심해하는 눈초리를 맞고, 내가 하지도 않은 일로 독박을 쓰는데도 선배는 모른 척하고, 넘어지고, 주저앉고, 그만두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다 좀 컸다고 작은 일이라도 맡았지만 실수를 하고 맙니다. 전체 업무 과정에서 보면 나의 실수 따위는 언제나 복구 가능한 것이기에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때는 그 일이 내 인생 전체를 삼킬 것 같아 밤잠을 설칩니다. 이런 상황은 오랫동안 반복되어 마치 영원할 것 같은 생각마저 듭니다. 그러다 스물아홉이 되는 생일날, 성숙한 어른이 되지 못한 상태에 서른을 맞이해야 한다는 현실에 덜컥 겁이 납니다.


30대에도 당신의 내력을 시험하는 일은 여전히 반복됩니다. 나의 결정을 흔들어대는 사람이나 상황이 얼마나 많은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습니다. 회사에서 직책을 맡고 있다면 외력과 내력이 지속적으로 충돌하여 마음의 병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당신에게는 약간의 미묘한 변화가 생깁니다. 물론, 당신이 알아채느냐 마느냐의 문제지만요. 이제는 문제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나름 판단할 수 있게 되는데, 이때 책임질 줄 아는 사람과 일한다는 것이 얼마나 행운인지를 깨닫게 되죠. 그리고, 이런 혼란스러운 상태에서도 포기만 하지 않는다면 내력은 쌓이니 실망하지 마십시오. 다만,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정신적으로 상처 받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어도 마음이 정화되지 않는다면 책을 읽어보는 건 어떨까요. 전 아주 도움이 됐습니다. 자기 전에 읽으면 꿀잠 예약입니다.  




저는 다른 일을 하다가 통역을 시작했습니다. 서른이 넘어 들어간 통역대학원에는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중에 저는 나이가 많은 그룹에 속했습니다. 수업은 긴장의 연속입니다. 선생님이 지목한 학생이 통역한 짧은 분량을 들은 후, 나머지 학생들은 '건설적인 비평'이라는 이름의 피드백을 합니다. 이때 대안이 없는 비난을 하면 욕을 먹으므로 매우 주의해야 합니다.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통역이나 번역을 하는 사람들도 말투나 단어 하나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편입니다. 저도 좋은 말만 들었겠습니까. 처음에 피드백을 받을 때는 얼굴이 벌게져 고개를 들지도 못했습니다. 그동안 내가 했던 한국어는 다 쓰레기였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고, 나라는 인간은 왜 이 모양인가 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모든 피드백을 받고 난 후 절망에 빠져 있을 때 마지막으로 선생님이 총평을 합니다.


선생님의 피드백은 맨살에 채찍을 맞는 것 같습니다. 입학 후 초반에는 사람에게 있는 자존심이란 자존심은 싹싹 긁어낸다고 느껴질 만큼 가혹합니다. 공부하는 데 나이를 생각하면 안 되지만 어린 동생들 앞에서 채찍을 맞는 기분을 아실는지요. 하지만, 당연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따위로 실전에서 통역했다가는 학교 망신은 나중이요, 내가 망신당하게 되니까. 그때 어떤 선생님이 적응하기 힘들어하는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통역대학원에 들어왔다는 거 자체로 영어를 잘하는 걸 입증한 거니까 나가서 다른 일을 찾아보라고. 여기서 못한다고 인생을 실패한 건 아니라고. 그때는 그 말이 심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정말 맞는 말이었습니다. 그깟 영어 못한다고 인생 실패자는 아니지 않겠습니까?


일단 다니기로 결심하면 루저라는 느낌은 2년간 계속됩니다. 그때도 저는 여전히 내력이 외력보다 약했던 시기여서 말로 받은 상처는 아무리 건설적이고 긍정적이어도 힘들었습니다. 수업이 끝나면 서로 자아비판을 하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고 다음 수업에 들어가 또 동일한 피드백을 받습니다. 특히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를 본 날은 밥맛은 떨어지고 술맛이 최고조입니다. 이러한 감정 소모의 최고봉은 졸업시험입니다. 꽉 막힌 부스에 앉아 헤드셋을 통해 들려오는 한국어를 영어로, 영어를 한국어로 통역한 내 목소리를 녹음하여 제출하고 나오면 끝입니다. 총 걸리는 시간은 길어야 10분입니다. 수능시험보다 훨씬 짧은 시간에 2년간 배운 스킬의 결과물이 평가를 받습니다. 그때는 그랬죠. 시험은 실력을 완벽하게 반영하지 못한다고.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실력을 측정할 도구의 하나인 것은 사실이라는 점은 인정합니다. 졸업시험을 본 날, 저는 밤에 자다가 깼습니다. 내가 틀린 부분이 정확하게 하나하나 다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저는 벽에 뒤통수를 찧어가며 또 자책하면서 날을 새우나 싶더니... 잠은 오더군요.


겨우 졸업시험에 통과한 후 현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짜잔~~~ 바닥만 박박 긁었던 2년의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적어도 제가 잘못하지 않은 통역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게 되었고, 오해가 있는 부분은 한 발 양보할 수 있게 되었으며, 실수도 마음 상하지 않고 인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개인적으로 부스에 찾아와 영어를 조금 할 줄 안답시고 하는 잘난 척하는 이들에게도 웃으며 설명하거나, 그래도 내 잘못이라고 우기면 그냥 웃으며 예, 예 할 수 있는 "뻔뻔함"을 내 몸에 빌트인 (built-in)하게 된 것입니다!!!!! 2년 전보다는 내력이 조금 더 강해졌다는 뜻이겠지요. 여기서 말하는 뻔뻔함이란 부정적인 뜻이 결코 아닙니다. 타인에게 상처 받지 않을 수 있는 면역 시스템을 갖추게 되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30대 후반으로 갈수록 내력이 외력보다 조금 커지는데, 그동안 나름의 시간을 살아내고 도달한 결론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내가 없어도 아주 잘 돌아가고, 내가 상상하는 최악의 상황은 웬만해서는 잘 안 일어난다는 사실이죠. 이 사실을 인지하게 되면, 나의 내력은 유지보수를 거치고, 방화벽은 업그레이드됩니다. 이제는 그렇게 어려웠던 영혼이 1도 없는 말도 잘할 수 있고, 얼굴에 침 뱉고 싶은 인간에게도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되며, 지위가 높은 인간이 싼 똥을 치워야 할 때에도 화장실에 들어가 대차게 욕한 번 하고 난 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나와서 일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이 가능한 이유는 나와 일을 분리하는 법을 조금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단, 부작용은 있습니다. 남들에게 '독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신경 쓰지 말자고요. 그들이 내 인생을 책임져주지는 않으니까요.


아직은 현실의 나이를 받아들이기 힘든 40대 중반이 되니 내력과 외력이 거의 비슷해지는 느낌입니다. 그렇지만, 완벽하지 않습니다. 하긴, 세상에 완벽할 수 있는 일이 몇 가지나 될까요. 이미 겪어본 일이니 흔들리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지만, 거죽이 다른 모습을 하고 나를 쓰러뜨리려고 안달 난 외력을 마주하게 되면 여전히 당황스럽고 옴싹 옴싹 무너질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삼십 대와 다른 점은 짧은 시간 안에 '아아. 전에 걔구나'라고 알아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최악의 상황은 일어나지 않는다’를 알고 있기 때문에 정상적인 감정상태로 돌아오는 시간은 전보다 많이 줄어듭니다.  


이렇게 내력이 쌓이면 다른 사람의 내공도 보이기 시작합니다. JTBC에서 방영했던 ‘비긴 어게인’의 한 편이 기억납니다. 데뷔한 지 20년이 지난, 자신만의 음악을 하고 있는 여가수와 데뷔한 지 5년 남짓 된 남자 후배 가수가 함께 팀을 이루어 무대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후배 가수는 여자들이 좋아하는 얼굴에, 기타도 웬만큼 치고, 노래도 웬만큼 하는 인기가수였습니다. 무대에 홀로 있을 때에는 눈부실 만큼 빛이 나는 그야말로 스타입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이 한 무대에 섰을 때 내력의 차이는 어마어마했습니다. 선배 가수는 여건이 안 좋아도 노래에 집중해 현장에서 듣는 만큼 감동적이었습니다. 반면에, 후배 가수는 자신의 노래를 부르는 데도 박자가 빨라지고 호흡이 딸려 긴장감이 화면을 뚫고 저에게까지 전달되었습니다. 이후 인터뷰에서 그 후배 가수는 자신의 약한 내력을 인정하며 선배 가수를 존경한다고 말했습니다. 좀 살아본 분은 아시겠지만, 자신의 모자란 내공을 인정하고 상대방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은 실망스럽게도 많지 않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건 정말 멋진 일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는 후반으로 갈수록 점점 나은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여기까지 말하고 나니 엄청나게 대단한 사람인 양 자랑한 거 같네요. 저도 자주는 아니지만 가느다란 가지가 살랑거리는 바람에도 심하게 흔들리는 것처럼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여전히 남의 떡이 더 커 보이고, 나한테 없는 것에 실망하기도 합니다. 잘난 척하는 이들 앞에서 있는 척하고 집에 돌아와 비참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 악마의 구멍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 온전히 집중하는 시간을 가지면 내력은 다시 올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한 번 늘어난 내력은 좀처럼 약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나이만 먹으면, 경험이 많으면 저절로 생기는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끊임없이 자신에게 집중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장점을 먼저 생각하고 그걸 중얼거려 보세요. '나는 괜찮다.', '이 따위 일이 내 인생을 좌지우지하지 않을 것이다.' '저건 애초에 내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해야 조금이라도 행복할까?'와 같은 긍정적인 근육을 몸 여기저기에 키워놓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믿어주세요. 그러다 보면, 당신의 내력은 조금씩 강해질 겁니다.  


이쯤에서 다시 걱정이 됩니다. 당신, 괜찮은가요? 너무 힘들어 제 말이 들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편지를 다시 한번 읽어주십시오. 그리고 직접 종이에 지금 상황에 대해 장점과 단점을 적으세요. 어떻게 해서든 장점이 많게 만들어 놓아야 합니다. 그래도 안 되겠으면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을 떠올리십시오. '이것'은 고스란히 당신의 내력으로 바뀔 겁니다. 당신보다 조금 더 경험한 사람이 하는 말이니 믿어도 됩니다. 힘냅시다. 당신에게만 하는 말이 아닙니다. 저도 매일매일 힘내겠습니다. 행복해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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