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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neFly Dec 22. 2018

9. 판콜에이와 콘택 600

- 엄마에 관한 손익 계산서

 판콜 에이와 콘택 600은 아주 오래된 내복약이다. "걸렸다 생각되면..."으로 시작되는 광고 카피가 아직도 생각날 정도이다. 이 글을 쓰면서 자료를 찾아보니 판콜에이는 종합감기약이고, 콘택 600 (현재 콘택골드)은 콧물감기약이다. 하지만, 내 기억에서 이 두 조합은 내가 매일 마시는 블랙커피와 같은 중독성 강한 기호품이다.



시골에서 서울로 아빠를 따라 올라온 엄마는 적극적인 성격에 맞게 닥치는 대로 일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세월 속에서 엄마는 더 많이 고생했을 것이다. 어린 시절의 엄마는 출퇴근을 했다. 새벽에 나가 저녁 식사가 끝나고 오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그리고, 항상... 술에 취해 있었다. 거기에 담배까지. 그 당시에는 여자가 술과 담배 중 하나만 해도 욕을 먹었는데 둘 다 했으니 어땠을지 상상이 갈 것이다. 엄마는 그 사실을 가족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숨겼다고 생각했겠지만 술이나 담배를 하지 않는 사람은 바로 알아챈다.


당시에 내게 담배는 부차적이었던 것 같다. 나는 엄마에게 술을 마시지 말라고 거의 매일 부탁했다. 하지만, 엄마는 듣는 둥 마는 둥이었다. 아무리 울면서 매달려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런 엄마가 창피하고 미웠다. 필요할 때 내 곁에 있어주지도 않았고, 출근하지 않는 맨 정신인 낮에는 인상을 쓴 채 집안일을 하니 다가가지 못했다.


엄마의 수중에 항상 있던 게 있었는데 바로 판콜에이와 콘택 600이었다. 이 두 가지에 중독된 이유는 몇 가지를 짐작할 수 있다. 담배를 피우니 기관지가 좋을 수가 없는데 그걸 기침감기라고 착각하고 먹기 시작했을 것이며, 소량의 카페인 성분이 술 깨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엄마는 이 콤보를 집에 돌아오기 전에 먹거나 집에 와서 먹었다.  아주 작아서 감추고 들어오기도 쉬운 사이즈의 약병. 주말에는 약국이 영업을 하지 않으니 엄마는 금요일 밤에 여분의 판콜에이와 콘택 600이 든 약봉지를 가방에 몰래 넣어 집에 왔다. 오랜만에 제정신인 줄 알고 안기면 술 냄새가 났다. 아무리 말짱해 보여도 가방에 약병이 있으면 술을 마셨다는 뜻이다. 엄마는 몰랐겠지만, 나는 매일 엄마 가방을 검사했다. 항상 속으면서도 오늘은 아니겠지 하는 마음이 있었나 보다.     


최악이었던 건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이었다. 모든 죽음이 그렇듯이 부지불식간에 들려온 소식에 우리 가족은 모두 큰집으로 가야 했다. 하지만, 그날도 엄마는 퇴근 전이었다. 어찌어찌하여 소식이 닿았는 데, 엄마는 집에 있는 내게 전화를 걸었다. 빨리 어디 어디로 내려오라고.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내려갔더니 엄마는 또 술에 취해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엄마는 돈을 쥐어주면서 바로 앞에 있는 약국에서 판콜에이와 콘택 600을 사 오라고 시켰다. 왜 나에게 시켰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먹은 엄마는 큰집 대문을 열자마자 곡소리를 내면서 들어가 적어도 30분 이상은 울었다. 그날 부로 나는 엄마에게 어떠한 기대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으며,  판콜에이와 콘택 600은 죽을 때까지 먹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  


중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회사를 그만두면서 엄마는 술을 끊었다. 하지만, 담배는 떨궈내지 못했다. 당시에 나는 둘 중에 하나라도 안 하니 좋았지만 그놈의 담배 때문에 결국 엄마는 조금 더 누릴 수도 있는 삶을 일찍 마감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엄마가 애증의 대상이어야 하는 게 맞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던 건 엄마가 내게 보여준 정신적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인생에서 한 두 번쯤은 크게 방향을 틀어야 할 때가 있다. 아빠는 너무도 이성적이다 못해 부정적인 사람이었다. 내가 꿈을 이루지 못할 수십 가지 이유를 논리적으로 대면서 포기하기를 암묵적으로 강요했다. 나뿐만 아니라 언니에게도 그랬다. 아마도 유교 사상에서 딸이 중요하지 않은 매우 보수적인 사람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아빠 때문에 용기를 잃을 때마다 엄마는 나를 따로 불렀다. 일단 해 보라고. 어떻게든 도와줄 테니 해 보라고 했다. 중간에 아빠가 알게 되었을 때도 엄마는 화내는 아빠와 맞서 싸워 내가 계속할 수 있게 해 줬다. 어린 시절 정서적으로 따뜻했던 아빠가 더 이상 나를 지지해주지 않는 건 크나큰 충격이었다. 하지만, 엄마가 그 충격을 완화시켜주는 쿠션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에 엄마와 아빠에 대한 나쁜 기억은 상쇄되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지 2년쯤 되었을까. 남산 쪽에 있는 호텔에서 개최된 콘퍼런스에서 통역을 한 날이었다. 컨디션 조절을 못한 이틀간의 통역 - "가끔 내려야 할 역에 내리지 않아도 된다" 편에서 나왔음-에서 이틀째에 목소리가 거의 나오지 않았다. 가지고 있는 감기약은 더 이상 효과가 없었다. 산 중턱에 있으니 주변에 약국도 없고, 콘퍼런스는 곧 시작이고. 급한 마음에 직원 분에게 여쭤봤더니 길 건너 편의점에 의약품을 판다는 것이다. 한달음에 도착해 물어보니 직원이 가리키는 의약품 코너에서 발견한 건 다름아닌 판콜에이였다. 내 평생 먹을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아주 조그만 갈색 약병이 거기에 있었다.


선택의 여지도 없이 그 상표 딱 하나였다.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먹자니 어린 시절의 안 좋은 기억이 소환되고, 안 먹자니 일을 못할 거 같고. 결국 내 손으로 그 자그마한 약병을 사서 한 모금밖에 안 되는 양을 그 자리에서 마셔버렸다. 쌉쌀하고 싸한 액체가 목을 타고 넘어갔다. 이 쪼그만 게 무슨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안 먹는 것보다는 낫겠지 생각하며 일하러 갔다. 한 시간 정도 지나니 목이 조금씩 풀렸고, 최선을 다해서 저녁까지 통역을 마쳤다. 나도 엄마처럼 판콜에이의 덕을 본 것이다. 진 거같아 약이 올랐다.


그러면서 엄마가 이 물약을 어떤 심정으로 먹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내 나이였던 그녀가 감당해야 할 경제적 책임, 남편, 아들 하나와 딸 둘. 시골에서 무턱대고 올라온 부모님의 사정을 감안하건대 의지할 곳 하나 없는 곳에서 돈을 벌어야 하는 그 심정을 나는 결코 모를 것이다.


아무리 집안에 안 좋은 일이 있어도 회사에 가면 잠시 동안은 집이 잊힌다. 엄마도 그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퇴근 후 집에 갈 시간을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해 동료들과 술을 마셨지만 결국 돌아가야 하는 현실. 그 현실을 어떻게든 견디기 위해 술과 담배가 필요했던 거라면, 금방이라도 손 놓고 도망가고 싶은 마음을 자식들에게 들키기 싫어 판콜에이와 콘택 600으로 가리려고 한 거라면, 그리고 마음을 털어놓을 상대가 없어 그 밤을 삭히기 위해서라면,  그때의 엄마 나이가 된 내가 절대 상상할 수 없는 희생을 하기 위해서였다면, 이제는 엄마를 이해할 수 있다.


엄마가 살아계셨을 때, 적어도 입원했을 때 의사소통이 가능했을 때라도 엄마를 이해한다고 말했으면 좋았을 텐데. 자식은 항상 이렇게 후회만 한다. 엄마에 대한 기억은 좋은 것도 있고 안 좋은 것도 있지만, 함께 한 세월 동안 느꼈던 갖가지 감정을 계정으로 만들어 종합해 손익계산서에 적어보면 말할 것도 없이 순이익이다. 손익계산서는 공식적인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그래서 오늘 여기에 엄마의 손익계산서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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