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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neFly Feb 01. 2019

21. 튜닝 배틀  

-  무대 뒤에서 일하는 사람들

다큐멘터리를 보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3년 전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예술에 조금씩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궁금하거나 유명한 예술가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볼 때가 있다. 하지만, 우연히 발견하면 보게 되는 것이지, 반드시 보겠다는 의지로 찾아보는 것은 아니다.


며칠 전에도 우연히 채널을 이리저리 누르다 스카이 A&C라는 채널에서 멈췄다. 이 채널은 고전음악부터 예술작품까지 거의 전 분야에 아우르는 다큐멘터리를 한국어 자막으로 제공한다.


이번에 멈추게 된 이유는 "튜닝 배틀"이라는 생소한 제목 때문이었다. 튜닝? 현악기 줄? 아니면, 기타 줄? 그런데 배틀은 뭐지? 처음도 아니고 방송되고 있는 중간부터 보는데도 이렇게 궁금했던 적이 오랜만인지라 채널을 고정했다. 다행히 내가 보기 시작한 즈음부터가 클라이맥스로 흘러가고 있는 듯하여 시청하기에는 크게 무리가 없었다.  


이번 다큐멘터리의 배경은 조성진이 우승한 2015년 쇼팽 콩쿠르였다. 조성진 특집인가 싶었던 다큐멘터리는 1927년부터 개최된 콩쿠르에 참여한 연주용 피아노의 양대 브랜드인 스타인웨이 사와 야마하 사를 비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제목에서 말한 튜닝 배틀은 두 회사의 피아노 조율사에 관한 이야기 이리라. 그리고 콩쿠르 사이사이의 피아노를 조율하고 있는 두 회사의 조율사들에게 빠르게 집중하면서 나의 예상은 확인된다. 다큐멘터리의 튜닝 배틀은 무대 뒤에서 벌어지는 아주 외로운 배틀이다.


참고로, 나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 바이엘 상하권을 끝내고 체르니 30번을 시작하자마자 그만뒀다. 피아노는 안 친지 오래되었지만 그나마 피아노를 친 경력이 도움이 되는 건 키보드를 매우 빠르게 칠 수 있다는 정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피아노의 소리를 구분할 수 없는 막귀일 뿐만 아니라, 동일 종을 찾아 가격을 비교할 수 없는 저급한 수준으로 보면 된다. 자연히 스타인웨이라는 브랜드를 들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일본의 야마하 사를 아는 이유는 한때 - 아마도 사립학교의 예체능 교육이 알려진 이후 - 전국의 부모님들이 자식들을 위해 비싼 가격의 피아노 대신 전자 피아노를 사 주는 게 유행하면서 대중화되었기 때문이다.  


스타인웨이는 독일 함부르크를 기반으로 하여 독일 현지와 미국 뉴욕에 본사를 둔 1857년부터 수제 피아노 제조업을 시작한 악기 사이며, 야마하는 일본의 지방도시에서 1887년에 설립되었다. 같은 종류의 피아노를 비교할 수 있는 능력이 없지만, 그랜드 피아노 가격만 따져보면 스타인웨이 사의 것은 억대이며, 야마하 사의 것은 수 천만 원대이다. 가격 비교는 네이버에서 브랜드를 치고 처음 나오는 그랜드 피아노의 가격을 찾았다.  


3주간의 예선과 본선을 통과한 후, 결선에서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해야 하는 참가자들은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뚫고 나와야 할 피아노가 필요하다. 이들은 각기 자신에게 맞는 브랜드를 선택할 수 있다. 각 참가자들이 선택한 브랜드의 조율사는 개인에 맞게 피아노를 조율해준다. 결선 참가자들은 야마하의 무거운 소리로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했던 예선과 본선과는 달리, 밝은 소리로 바꾸겠다는 의지를 피력하는데, 이 중 세 명이 스타인웨이로 갈아타면서 총 다섯 명이 스타인웨이를 연주한다.  


그 이유는  야마하의 가장 큰 약점 때문이다. 바로, 무대에 있는 한 대의 피아노를 각 참가자에 맞게 섬세히게 조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터뷰를 하는 일본인 조율사는 참가자들의 모든 요구사항에서 가운데를 찾아 조율해야 한다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얼굴은 한눈에도 피곤에 절어 보였지만, 일본인 특유의 차분함으로 가리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의 표정만으로 이미 야마하 사가 이 배틀에서 질 거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다큐멘터리는 스타인웨이의 조율사를 잠깐 비추기는 하지만 비중 있게 다루지 않는다. 야마하 사의 피아노의 특징과 조율사에 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말하면서, 그 대척점에 스타인웨이를 놓아 야마하의 단점을 갖추었다고 억지로 인정하는 것처럼 비친다.  


마침내, 1등을 한 조 성진을 비롯해 3위까지 모두 스타인웨이를 선택한 참가자들이 우승한다. 스타인웨이의 판정승이다. 카메라는 조성진이 대회 관계자들과 우승을 축하하며 환한 미소를 짓는 장면에서 무대 뒤에서 애써 미소를 짓고 있는 야마하 사의 조율사의 얼굴로 전환된다.


피아노 자체의 특징 때문에 패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든 책임이 조율사에게 있는 것처럼 카메라는 집요하게 심정을 묻는다. 조율사는 '영감'을 받았다고 겨우 대답하지만, 인터뷰어는 잔인해지기로 결심한 듯 재차 묻는다. "어떤 영감입니까?"


멍한 표정으로 잠시 생각하던 조율사는 앞으로 고쳐나갈 것이 많으니 "더 공부해야겠다는 '영감'이 생겼다"라고 겨우, 정말 겨우 대답한 후에 자리를 떠난다. 다행히 이번에는 인터뷰어도 카메라도 그를 잡지 않았다. 이 방송국 놈들... 다큐멘터리는 그들의 5년 후의 재대결을 고하며 끝났다. 참고로, 이 다큐멘터리의 제작사는 NHK 방송국이었다.


이런 방송을 볼때마다 세상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거나 관심없는 직업이 많으며, 알고 있어도 아무 생각이 없었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열심히 각자의 맡은 바를 수행하고 있는지를 새롭게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노력이 때로는 보상받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여전히 가시밭길을 가는 사람들에 게는 경외감까지 생긴다.


이번 기회를 통해 새롭게 알게 된 피아노 조율사라는 직업을 검색해 봤다. 피아노 제작사에서 일하는 대단한 조율사들도 있지만, 우리 동네에 있는 강당, 예술관, 공연장 등에 구색을 맞추려고 비치해놓은 오래되고 낡은, 예산이 없어 교체되지 않는 피아노를 조율하고 계시는 분들도 있다. 마치 몇 안 되는 초대형 국제회의에서 일하는 통역사도 있지만, 매일 수없이 일어나고 있는 비즈니스와 프로젝트, 그리고 중소형 회의에서 바쁘게 일하는 통역사도 있는 것처럼.  


이들이 운영하고 있는 블로그의 글 몇 편을 읽어봤다. 어떤 조율사는 외롭게 버티고 있는 정말, 때 빼고 광을 내야 하지만 그런 건 신경 쓰지 않고 조율만 당하고 있는 피아노를 궁휼히 여긴다. 또, 충분한 경제적 보상을 하면 구석구석 모두 확인해줄 수 있지만, 쥐꼬리만큼 주고 많은 돈을 받는 만큼의 일을 해달라는 무식한 공무원도 있다고 허무해하는 조율사도 있었다. 너무도 익숙한 이야기들이어서 놀랐고, 동시에 슬프기도 하다.


존재하는 직업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현실감 있게 느껴진 건 처음인 피아노 조율사라는 직업. 다음에 혹시라도 피아노 조율사를 만나게 되면, 공통점이 없어 아무 말도 못 하고 뚝 떨어져 앉아 있지 말고 먼저 말을 걸어볼 수 있는 용기가 조금은 생겼다. 역시 TV는 참 좋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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